냉전 반세기, 역사적 과제 스스로 풀고 끝난 20세기[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동서냉전 시기에 핵보유국들은 폭탄의 숫자를 늘리고 발사시설을 다른 나라가 알 수 없도록 땅 밑이나 바다 밑 잠수함에 감춰두기 위해 애썼다. 저마다 ‘극비’라고는 했지만, 세기말에 전체 숫자가 수만 개까지 존재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한반도에도 주한미군의 작은 핵무기(핵 배낭)가 배치되었다가 90년대 비핵화 정책에 따라 철수했다.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무기를 서로 충분히 보유하고 있음으로 해서 2차 대전 이후 강대국 사이
지구가 한 마을처럼 가까워진 100년[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20세기를 특징지을 수 있는 키워드는 한둘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키워드는 ‘글로벌’이란 말일 것이다. ‘세계화’ ‘지구촌’ 같은 단어가 관련 키워드로 언급될 수 있다.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활달한 문화예술이 국경을 넘어 자유로이 교류되고,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지구촌 어디든 갈 수 있는 교통시스템이 구비되었다. 지구의 이편에서 저편까지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매스미디어와 개인통신 등의 수단이 구축되었다.19세기까지만 해도 상상에 그치던 놀라운 변화였다. 20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19세기 말에는 세계적으로 많은 천재가 태어났다. 20세기를 이전과는 다른 문명세계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 천재들을 많이 소개했지만, 벨기에가 낳은 ‘리오 헨드릭 베이클랜드’(1863-1944) 역시 20세기 문명을 소개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천재 중 한 사람이다. 벨기에 겐트에서 태어난 베이클랜드는 겐트시립 기술학교와 겐트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약관 21세 나이에 화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6세(1889년)에는 모교의 화학 부교수로 임용되었다. 비교적 순탄하게 화학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베이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국제 정세는 늘 변한다. 한동안은 마치 영구히 변함이 없는 것처럼 한가롭기만 하다가도, 한번 변화가 시작되면 내일 일을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격변하기도 한다. 이것은 한여름이나 한겨울같이 지루한 날씨가 이어지다가 급격히 변하는 환절기의 날씨에 비할 만하다.중국 춘추시대는 수백 년 동안이나 정세변화가 없다가 전국시대로 들어서면서 급격한 이합집산이 벌어졌다. 1백년 넘게 하루도 전쟁 없는 날이 없더니, 이윽고 진(秦)나라 정왕(政王) 때 전국이 통일된다. 그가 바로 진시황이다. 격렬한 환절기를 지나 ‘물의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1890년대 파리에 등장한 선전 포스터. 그림 속의 여인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 마치 공중전화를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화기와는 다른 점이 있다. 입에 대는 송화기 없이 두 귀에 각각 한 대씩의 수신용 폰을 대고 있을 뿐이다.일명 테아트로폰(Theatrophon; ‘극장 폰’이라는 뜻), 프랑스어로 떼아토푸안느(Thtrophone)라 부르는 음악 감상용 중계기다.1876년 벨의 전화기가 본격적으로 상업화된 이후 사람들은 소리를 전달하는 이 도구를 다른 용도로도 활용해볼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그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장자(莊子)는 살림에 별 관심이 없어서 집이 가난하였다. 당장 끓여 먹을 곡식이 없어, 가족들이 굶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잡곡 몇 되라도 빌리려고 고을 수령 감하후를 찾아갔다. 감하후는 인색한 사람이었으나 상대는 덕망 높은 장자가 아닌가.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이렇게 둘러댔다.“물론 빌려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유가 없으니 몇 달 후 세금 거둘 때가 되면 그때는 3백 금이라도 빌려드리겠습니다. 기다려 주시겠죠?”말을 듣고 장자는 얼굴이 붉어졌다. 당장 잡곡 한 봉지 살 몇 푼이 없어서 온 것인데,
전기 에너지를 무선으로 주고받는 ‘꿈의 기술’[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1899년 테슬라는 콜로라도 스프링필드의 고지대에 새 연구소를 마련했다.지진과 안개를 일으키고 번개를 불러들이는 전파연구를 맨해튼 도심에서는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테슬라는 전선을 통하지 않고 전기 에너지를 전송하는 무선에너지 전송시스템을 연구하고 있었다.무선통신과 무선 에너지 전송기술은 아주 다른 얘기다. 무선통신은 테슬라의 시기에 이미 많은 발명가가 시도하고 있었으며, 간단한 힌트만 던져줘도 금방 문제해결이 될 만큼 비교적 손쉬운 기술
우아한 상류사회 ‘뉴욕400’의 회원이 되다1889년 웨스팅하우스와의 협력계약, 1891년 미국 시민권 획득, 1893년 시카고 콜롬비아박람회에서의 승리, 이듬해 나이아가라폭포에 수차설치 등, 테슬라는 명성을 떨치며 승승장구했다. 1897년 웨스팅하우스에 대한 특허권 사용 계약서를 찢어버린 뒤에도 10여년은 경제적 어려움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그는 당시 뉴욕 상류사회에서도 성공적인 주류사회(inner circle)의 사교클럽인 ‘뉴욕 400(포 헌드레드)’에도 받아들여졌다. 이 사교클럽은 자기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사업가, 정치가,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추수(秋水)편에 나오는 말을 가만히 음미하노라면 임진왜란 직후 왜국에 건너가서 왜왕을 무릎 꿇렸다는 사명당 대사의 전설이 떠오른다. 불 위를 걸어가고 끓는 물 속에 들어가서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며, 사해의 용왕을 불러 풍운뇌우(風雲雷雨)를 부르게도 하고 거두게도 하니, 왜왕이 벌벌 떨며 백배사죄하였다는 소설 속 이야기 말이다.불 위를 걸으면서 터럭 하나도 그을리지 않았다는 기인들의 이야기는 그 밖의 많은 경전이나 전설 속에도 수다하게 녹아 있다. 어떻게 해서 그런 기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조작된 재정난...에디슨 경영권을 잃다[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웨스팅하우스’와 승부를 가리기도 전에 ‘에디슨일렉트릭’은 매출이 떨어지고 재정상태가 악화되었다. 예전 같으면 금융시장에서 얼마든지 자금을 융통할 수 있었지만, 웬일인지 자금줄도 막혀버렸다. 주식시장에서 주가도 곤두박질쳤다.웨스팅하우스를 꺾어보려고 모든 방법을 시도하는 동안 경영에 허점이 생긴 것이다. 에디슨은 예전부터 종종 자금 융통을 의존했던 금융계의 큰손 피어스 모건(J.P. 모건)의 제안에 따라 톰슨-휴스턴사와 합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에디슨전기회사가
테슬라 미국의 쓴맛을 보다. ‘미국식 농담’과 ‘미국식 자본주의’[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어느 날 테슬라는 에디슨 사장에게 현재 발전기의 문제를 좀 더 효율적으로 가동할 수 있도록 재설계 수준으로 개량해보자고 제안했다. 그 사이 테슬라는 에디슨과 회사 간부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선임연구원으로 승진해 있었다. 그는 어차피 시스템을 교류 중심으로 바꾸는 일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지금 판매하는 직류발전기라도 고장이 적고 열효율이 높도록 개량해보자고 생각을 바꾸었다. 발전기를 개량하면 수리하느
나는 아주 대단한 천재 두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그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고, 또 한 사람은 지금 내가 당신에게 추천하는 이 젊은이입니다.교류와 직류, 전기를 일상에 끌어들인 ‘쌍두마차’[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1884년 여름. 미국 뉴욕 맨해튼의 기계공장 사무실. 마흔이 안 된 나이에 벌써 머리가 희끗하게 보이는 금발의 사업가는 지금 막 도착한 젊은이가 품에서 꺼내 건네준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유럽 파리에 지사장으로 나가 있는 창업동료 찰스 베처러가 친필로 쓴 추천서였다.의자에 앉아 나머지 추천의 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