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작뉴스 김남기 기자]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서울의 대장간은 역사성과 희소성을 평가받아 천호동 동명대장간, 전농동 동광대장간, 대조동 불광대장간, 수색동 형제대장간 4곳이다. 장인의 경력을 기준으로 모두 50년 이상 전통을 이어오고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도심 개발과 함께 서울의 대장간은 대부분 사라져 그 수는 이제 손에 꼽힐 만큼이 됐다. 오랜 세월 부단한 성실함으로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보내온 서울의 전통 제조업이자 시민들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던 대장간의 면면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발행한 ‘서울의 대장간’을 바탕
[이모작뉴스 김남기 기자] 1970년대 명절 때가 되면, 이발소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동네 싼 이발소는 몇 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수고를 해야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발소가 흔치 않다. 미장원이 익숙지 않은 노인은 사우나 이발소를 자주 이용한다.서울에는 14,000여 곳의 이용원이 존재(2022년 9월)한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이용원은 단 2곳뿐이다. 종로구 혜화동의 ‘문화이용원’과 마포구 공덕동의 ‘성우이용원’은 100여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켰다. 두 이용원은 시민 가까이에서 소통하며 전통 방식의 ‘이용(理容)’ 문화를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석가탑을 세울 때 봉안된 것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다.‘직지심체요절’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는 1377년에 고려 말 백운스님이 선불교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여러 이야기를 모아 만든 책이다.‘팔만대장경’은 고려 고종 38년(1251)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81,258개의 목판 양면에 새겨 넣어 몽골의 침략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다.현대에 들어서는 비밀리에 인쇄된 5.16 군사정변 공약은 군사정부의 서막을 열었고, 26년 후 인쇄된 6.10 민주항쟁 선언문은
차미란은 윤해원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자취하던 주인집 딸이었다. 하얀 칼라 깃을 단 검은 교복을 입고 두 갈래로 머리를 땋아 묶은 미란이 누나는 어쩌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여름방학이 가까이 다가오자 미란이의 방 안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조그만 책상이 놓여 있었으나 고3인 미란이가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무슨 꿈을 꾸는 듯 마당에 나와 수돗가에 핀 선홍색 봉숭아꽃을 손톱에 물들이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윤해원은 서울 P대학을 마치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된다’- 중국의 철학자 루쉰[이모작뉴스 김남기 기자] 길이란 사람이나 동물,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게 땅 위에 있는 일정한 너비의 공간을 가리키기도 하며, '배움의 길', '순례자의 길'처럼 개인의 삶이나 사회·역사적인 전개, 도리나 의무를 일컫는다.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에 관심을 두고 그들이 거닐었던 7개의 길을 소개한다.도성의 아침을 활기차게 채웠던 상인들의 시장길, 밤의 안전을 책임졌던 순라꾼들이 다녔던 순라길도 있다. 또 지방에서 상경해 관직 생활을 시작한 선비의 출근길, 도성문을 나
[이모작뉴스 김남기 기자] 후암동은 남산의 남서측 산록에 위치한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도성 밖의 한적한 농촌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신시가지로 개발되어 대규모 고급 문화주택지가 조성된 지역이다. 당시에 지은 문화주택이 아직도 302채가 남아 있어 후암동은 현존하는 적산가옥의 최대 집결지이다. 후암동의 문화주택은 건축적 가치와 보존상태가 양호하지만 다세대 주택 등으로 계속 개발되면서 사라지고 있어 거주에 대한 지원대책 등 보존 방안도 필요한 시점이다.후암동 유래한편, 후암동의 유래에 대해서는 2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가장
[이모작뉴스 김남기 기자] ‘돈암동’은 1930년대 늘어나는 경성의 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대단지 주택지로 개발로 대규모 도시 한옥이 건설되고, 1950년대부터 박완서와 문화예술인들이 거주했다.돈암 일대는 1930년대 이후 새로운 삶을 꿈꾸는 중산층의 거주지로 부상했다. 해방 이후 정치‧사회 및 문화예술인이 몰려들었다. 이곳이 아직도 서울의 대표적인 주거지로 주목받고 있다.서울역사박물관은 2021년 돈암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의 결과를 담은 ‘도성 밖 신도시, 돈암’ 보고서를 발간했고, 이를 바탕으로 돈암동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담아낸
1760년 ‘망우동지’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 마을기록[이모작뉴스 김남기 기자] 서울 북부에 위치한 망우동은 구리시와 인접해 있다. 망우동은 예전에는 위치한 ‘망우리 공동묘지’로 유명했고, 현재는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탈바꿈하면서 시인 박인환 등 문인과 애국지사가 모셔진 공간으로 유명하다.서울 북부지역에 있는 망우동의 삶의 역사를 담은 기록인 ‘신망우동지(新忘憂洞誌)’는 영조 36년(1760년)에 상하 두 권으로 간행됐다. '망우동지'는 지명 연원ㆍ산천 및 능묘ㆍ고적ㆍ풍속ㆍ토산ㆍ지역 인사들의 행적 등을 수록하고 있다.이를 바탕으
냉전 반세기, 역사적 과제 스스로 풀고 끝난 20세기[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동서냉전 시기에 핵보유국들은 폭탄의 숫자를 늘리고 발사시설을 다른 나라가 알 수 없도록 땅 밑이나 바다 밑 잠수함에 감춰두기 위해 애썼다. 저마다 ‘극비’라고는 했지만, 세기말에 전체 숫자가 수만 개까지 존재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한반도에도 주한미군의 작은 핵무기(핵 배낭)가 배치되었다가 90년대 비핵화 정책에 따라 철수했다.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무기를 서로 충분히 보유하고 있음으로 해서 2차 대전 이후 강대국 사이
지구가 한 마을처럼 가까워진 100년[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20세기를 특징지을 수 있는 키워드는 한둘이 아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키워드는 ‘글로벌’이란 말일 것이다. ‘세계화’ ‘지구촌’ 같은 단어가 관련 키워드로 언급될 수 있다.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활달한 문화예술이 국경을 넘어 자유로이 교류되고,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지구촌 어디든 갈 수 있는 교통시스템이 구비되었다. 지구의 이편에서 저편까지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매스미디어와 개인통신 등의 수단이 구축되었다.19세기까지만 해도 상상에 그치던 놀라운 변화였다. 20
있으려무나, 꼭 가야 하겠느냐?아니 갈 수는 없겠느냐?까닭 없이 여기 있기가 싫어졌느냐?아니면 남의 말을 들었느냐?그래도 몹시 애달프구나,가려고 나서는 그 까닭을 알려나 주려무나- ‘있으렴 부디’, 성종(成宗)[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갑자기 파란 하늘의 한쪽으로 먹구름이 끼는가 싶더니 실비가 내린다. 설마 눈물은 아니겠지 하면서도, 망연한 생각이 든다. 어찌 설명해야 하나. 원래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의 묘역이었으나 성종의 능자리로 정해지면서, 다른 곳으로 옮긴 후 들어온 왕, 어쩌면 멀쩡하게 있던 묘를 옮기고 들어와서 흘리는, 토
창공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청산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성냄도 벗어놓고 물욕도 벗어놓고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라하네[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조선의 11번째 왕 중종은 57세(1488~1544)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세상을 떠난다. 그는 연산군을 폐군 시키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행운의 왕이었을까, 아니면 평생 자기 뜻을 온전히 펼치지 못하고 권신들에게 휘둘린 나약한 왕이었을까?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경기 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의 희릉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여. 이름을 정릉으로 바꿨다. 그러나 명종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19세기 말에는 세계적으로 많은 천재가 태어났다. 20세기를 이전과는 다른 문명세계로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 천재들을 많이 소개했지만, 벨기에가 낳은 ‘리오 헨드릭 베이클랜드’(1863-1944) 역시 20세기 문명을 소개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천재 중 한 사람이다. 벨기에 겐트에서 태어난 베이클랜드는 겐트시립 기술학교와 겐트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약관 21세 나이에 화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26세(1889년)에는 모교의 화학 부교수로 임용되었다. 비교적 순탄하게 화학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 베이
윤항구(70)는 모처럼 아침 일찍 읍내 농협에서 운영하는 파머스마켓에 들렀다. 마침 개장 직전이라 직원들이 줄을 서서 구호를 외친다.고객은 왕이다!우리는 신하다!진강농협 파이팅!!!윤항구는 그 구호에 가슴이 뭉클하다. 칠십 평생 무지렁이로 살다가 난생 처음 임금이 되려나 보다고.곧죽어도 파머스마켓인디 서울 명동 백화점보다 못할소냐! 없어야할 것 빼놓고는 다 있는 것 같았다. 항구는 마켓에서도 늘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다. '열다섯에 고향 떠나 서울 신당동 영등포 로타리 대방동 천호동을 전전하면서 인생을 여러 번 탕진하다가 강남 신
조광조의 도학(왕도) 정치의 개혁 시절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나 자신의 뜻대로나, 중종은 한 번도 정국을 제대로 이끌어나가 본 적이 없었다.“오늘의 우리에게는 어떤 이상이 있습니까? 어떤 전통이 있습니까? 과연 이 시대가 제대로 흘러가고 있습니까?”[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왕위 초반, 중종의 권위는 실추되고 권신들의 힘은 더욱 커졌으며, 공신 지정이나 공훈까지도 마음대로 하는 파탄 지경까지 이르렀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느끼자, 중종까지도 갈아치울 수 있음을 공공연히 내비치며 위협했다.정통성이 허약한
이제 모두 세월따라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있어요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언젠가는 우리 모두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언덕 밑 정동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광화문 연가’, 이문세[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강남에 금싸라기 땅 위에 자리 잡은 두 명의 조선 왕과 한 명의 왕비가 잠들어 있는 정릉을 찾아간다. 이 비싼 땅 위의 넓은 초록의 공간, 왕릉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녹지가 가능했을까, 고맙기까지 하다.그런데 녹지 철망을 돌아가면서 아무래도 눈에 익다. 언젠가 와본 듯하다. 가만히 보니 언젠가
[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1890년대 파리에 등장한 선전 포스터. 그림 속의 여인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 마치 공중전화를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화기와는 다른 점이 있다. 입에 대는 송화기 없이 두 귀에 각각 한 대씩의 수신용 폰을 대고 있을 뿐이다.일명 테아트로폰(Theatrophon; ‘극장 폰’이라는 뜻), 프랑스어로 떼아토푸안느(Thtrophone)라 부르는 음악 감상용 중계기다.1876년 벨의 전화기가 본격적으로 상업화된 이후 사람들은 소리를 전달하는 이 도구를 다른 용도로도 활용해볼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그
강창석(姜昌石)은 평생 시골우체국 집배원으로 일하다가 십수년 전에 나이가 다 되었다고 그 일을 그만두고 오징어 귀떼기만한 작은 텃밭을 가꾸며 살아가고 있다. 그이에게도 못다꾼 꿈들이 왜 없겠느냐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꿈꾸지는 않는다. 강노인은 세상으로부터 소박을 맞을까봐 고심하지도 누가 불러주지 않는다고 투덜대지도 않는 성미가 아닌가.봄비는 하릴없이 내리고 앵두꽃이 바람에 날리는 날 강노인은 막걸리 한 사발 앞에 두고 추억에 잠긴다. 월출산 아래 국민학교에 꿈처럼 아득한 봄아지랭이 피어오르던 날, 창석의 짝꿍 한묘순(韓妙順)이 무
전기 에너지를 무선으로 주고받는 ‘꿈의 기술’[이모작뉴스 정해용 기자] 1899년 테슬라는 콜로라도 스프링필드의 고지대에 새 연구소를 마련했다.지진과 안개를 일으키고 번개를 불러들이는 전파연구를 맨해튼 도심에서는 더 이상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테슬라는 전선을 통하지 않고 전기 에너지를 전송하는 무선에너지 전송시스템을 연구하고 있었다.무선통신과 무선 에너지 전송기술은 아주 다른 얘기다. 무선통신은 테슬라의 시기에 이미 많은 발명가가 시도하고 있었으며, 간단한 힌트만 던져줘도 금방 문제해결이 될 만큼 비교적 손쉬운 기술
우아한 상류사회 ‘뉴욕400’의 회원이 되다1889년 웨스팅하우스와의 협력계약, 1891년 미국 시민권 획득, 1893년 시카고 콜롬비아박람회에서의 승리, 이듬해 나이아가라폭포에 수차설치 등, 테슬라는 명성을 떨치며 승승장구했다. 1897년 웨스팅하우스에 대한 특허권 사용 계약서를 찢어버린 뒤에도 10여년은 경제적 어려움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그는 당시 뉴욕 상류사회에서도 성공적인 주류사회(inner circle)의 사교클럽인 ‘뉴욕 400(포 헌드레드)’에도 받아들여졌다. 이 사교클럽은 자기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사업가, 정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