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사위가 신중하다. 조심조심 앞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가 하면 슬며시 뒤로 빠진다. 그리고 소리 없이 빙그르르 돈다. 더없이 경건하다. 스님들은 회색장삼에 갈색가사를 걸치고 그 위에 백색 적색 황색 녹색의 띠를 둘렀다. 그 화려한 차림새에 고아한 발사위가 참 잘 어울린다. 어느 틈에 머리 위로 올린 양손이 활짝 펼쳐지면서 바라도 양쪽으로 나뉜다. 바라에 달라붙은 한 줌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인다. 오른손 바라가 회전하며 먼저 내려오고, 뒤따라 왼손의 바라도 내려온다.극락전 앞마당에서 네 명의 스님들이 승무 공양을 올린다
눈이다. 눈발이 허공을 가르며 휘날린다.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점점 더 거세진다. 바람에 쫓기는, 더욱 굵어진 눈발이 허공에 가득하다. 며칠 동안 포근하더니 다시 한파가 몰려온다는 신호인 것 같다. 겨울은 역시 겨울이다. 눈과 바람을 쌍으로 초대한다.나는 점심 후, 커피 잔을 들고 베란다에 나왔다가 꼼짝없이 묶여버렸다. 쏟아지는 눈발에 사로잡혀 커피 잔을 들고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한다.어느새 함박눈이다. 거센 눈발은 사라지고 함박눈이 사뿐사뿐 내린다. 바람도 잔잔해졌다. 유리문 너머 나뭇가지에도 길에도 차곡차곡 함박눈이 쌓인다.
지방도로를 달리다가 눈길을 확 끄는, 우뚝 선 느티나무를 만났다. 남편은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핸들을 꺾었다. 멀리서도 그 아우라가 만만치 않았는데, 가까이에 와 보니 더욱 더 가슴이 벅차오른다. 화순 이서면 야사리의 느티나무 한 쌍이다. 쌍둥이 느티나무는 보면 볼수록 생동감 넘치는 데칼코마니 작품이다. 수령 400여 년의 고목은 마을의 당당한 수호신이요, 당제를 모시는 당산나무이기도 하다.나는 절로 옷깃을 여미고 우람한 나무들을 둥치에서부터 우듬지까지 훑어본다. 허공에 쫙 펼쳐진 쥘부채가 따로 없다. 둥치가 서로 단단히 붙어 있
한여름의 새벽은 해가 중천에라도 오른 듯 훤하다. 오늘 하루도 얼마나 더 열섬 속에서 허덕여야 하는가. 어젯밤은 열대야에 지구촌의 가슴 아픈 뉴스들까지 쏟아져 잠을 설쳤다. 아프카니스탄과 아이티의 참상. 가슴이 답답해 서성이는데 뜻밖의 초록이 눈을 간질인다. 유리 꽃병에서 피어나는 싱싱한 이파리들. 고구마순이다. 고구마순이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풍성하게 자랐다. 고구마 두 개가 피워 올린 싱그러운 초록 세상이다. 할아버지 수염 같은 하얀 잔뿌리들은 부지런히 단물을 빨아올리느라 여념이 없다. 그렇다. 더위는 더위이고, 지금은 녹음방초
엄마! 꽃 받으세요.아들이 덥석 내 가슴에 꽃다발을 안긴다. 웬 꽃다발? 눈이 부시다. 탐스러운 하얀 수국에서 터져 나오는 백색 빛. 곁에 낀 연분홍 장미들도 탐스럽지만, 일단 빛깔에서 뒤로 밀려나고 만다. 아들이 선배 결혼식에 가기 전에 내려놓은 제 식구들을 데리러 왔다. 그러니까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결혼식장의 꽃이 나에게까지 온 것이다. 나는 저절로 입을 벙긋거린다.아유, 넘 예쁘네. 나보다는 승미한테 줘야지?아니에요, 어머님. 전 괜찮아요.며느리가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치는데, 아들이 걱정 말라고 한다. 꽃다발을 두 개나
싫어, 싫어. 지금 집에 안 가. 더 놀다 갈 거야. 아빠, 빨리 점퍼 벗어!녀석은 점퍼를 입고 나서는 아들을 흘낏거리며 벌렁 대자로 누워 시위를 한다. 기세가 만만찮다. 치켜뜬 눈에, 불끈 쥔 앙증맞은 손과 발은 쉴 새 없이 거실바닥을 쿵쿵 친다. 떼쓰는 모양도 어쩌면 저리 귀여울까. 저절로 웃음이 난다. 우리 부부는 녀석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행복의 극치에 이르렀다. 녀석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노는 재미가 꽤 쏠쏠했던가 보다.남편은 더없이 자애로운 할아버지다. 억지로 데려가지 말고 이해를 시켜야 한다며 녀석을 꼭 안고서 말문을 연다
3월이 낼모레로 다가오니 자연의 기운이 역시 다르다. 때맞춰 들려오는 남녘 지리산 곳곳의 봄소식이 반갑기 그지없다. 복수초의 첫 꽃망울을 시작으로 매화, 산수유, 히어리, 진달래가 손짓을 한다.모처럼 꼭두새벽에 일어나 산수유와 매화를 비대면으로 마주한다. 산뜻하면서도 은은한 고품격의 모습에 시쳇말로 심쿵한다. 며칠 전만 해도 매서운 2월 추위가 눈발까지 흩날리며 기세를 부리더니, 다 지나갔다. 게다가 내일부터는 드디어 코로나19를 잠재울 수 있는 백신 투여가 시작된다. 마음이 가뿐하다 못해 그동안 움츠려들었던 심신에 날개를 단 기분
‘1월도 추억 속으로 묻혀가는 마지막 날입니다. 마무리 잘 하시고 다가오는 2월에는 좋은 일만 가득한 멋진 나날이 되길 빕니다.’살가운 그녀가 아침 일찍 카톡을 보내왔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과 불빛인지 햇빛인지에 물든 주홍 나뭇잎이 문자의 배경으로 깔려 있다. 마음이 푸근해지면서도 왠지 가슴 한 편이 허허롭다. 오늘이 1월의 마지막 날이라니…. 새해 시작이 엊그제만 같은데, 세월이란 놈은 일언반구도 없이 앞만 보고 내달린다.내달리는 세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추억 속으로’
[이모작뉴스 김남기 기자] ‘액티브 시니어’들의 삶의 희노애락을 담은 팟캐스트가 새로이 런칭했다. 네이버 오디오 클립에 오픈한 ‘이모작 에세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이모작 에세이’는 “이 세상 모든 인생이 작품이 되는 에세이”의 줄임말로 내레이션, 드라마, 콩트, 뉴스 등의 형식으로 제작됐다.시니어가 주 청취대상이며, 이모작뉴스에 게재되고 있는 에세이들이 주요 콘텐츠다.주요 시리즈를 살펴보면, 에세이 시리즈는 ▲오은주의 신중년 요즘세상 ▲김경의
가을볕이 다사롭다 못해 살갗을 간질인다. 산책 나오길 잘했다. 엊그제만 해도 땡볕을 피하느라 모자를 눌러쓰고 나무 그늘 아래로 찾아들곤 했는데. 계절의 순환은 아무리 되풀이되어도 신기하고 또 새롭다. 아무렴, 지난해의 가을볕이 오늘의 가을볕으로 찾아올 리가 없다. 새삼 자연의 순리에 따른 터전의 존귀함이 엿보인다. 우리 인생의 수레바퀴가 지치지 않고 굴러가는 데는 그 터전의 존재가 최우선일 게다.나는 가을볕에 온몸을 맡기며 근린공원 가는 길로 접어든다. 화살나무는 가을에 정점을 찍는다더니, 자잘한 선홍색 이파리에 눈이 부시다. 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