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논어역평’ 저자 조명화 “중국 이해의 첩경은 중국 언어와 글에 대한 해독력을 높여야”

박애경 기자
  • 입력 2019.10.01 00:29
  • 수정 2021.06.08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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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작뉴스 박애경 기자】 지난 9월 25일 종로구 교북동에 있는 조명화 선생님의 연구실을 찾았다. 가을볕이 다사롭게 앉은 실내는 고즈넉했다. 선생님은 글을 쓰고 있던 중이었는지 두 개의 모니터에 글씨가 빼곡했다. 긴 테이블에 마주 앉아 따뜻한 보이차가 담긴 찻잔을 들어올렸다.

Q. 뵙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의 『논어역평』에 대한 소개를 ‘최재천의 책갈피’에서 들은 바 있었거든요. 기존의 논어 해설서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평가를 여기저기서 많이 듣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모작뉴스’ 독자들에게 선생님의 책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먼저, 제가 독자들에게 선생님을 소개해도 될까요? 선생님 책에 소개된 그대로입니다.

조명화 선생님은 1955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나 광주일고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학사·석사·박사 학위를 마쳤다. 일찍이 상인(常仁)스님과 법안(法眼)거사에게서 불교학을 배우고, 1973년부터 지금까지 간송미술관 최완수 선생님에게서 사상사와 미술사를 배우고 있다. 1984년부터 대학에서 중국문학을 가르치다 정년 6년 전인 2013년 교수직을 떠났다. 현재는 오로지 인간과 세상을 통찰하는 놀이에 전념하며 자유로이 즐겁게 살고 있다.

A. 좋습니다. 저를 소개하다 보니 길게 말씀하셨는데, 이제부터는 짧게 주고받읍시다. 학술 대담은 단문 단답이 좋습니다. 그래야 독자가 읽기 편하니, 독자를 배려하기로 합시다. 학술 외적인 내용이야 기자님 알아서 하시구요.

 

Q. 알겠습니다. 그럼, 『논어역평』이라는 책이름부터 설명해주세요. 좀 어려운 듯해서….

A. 논어를 ‘현대한국어’로 번역하고, 동시에 내용도 비평하겠다는 뜻입니다.

 

Q.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셨다는 말씀인데, 현대한국어를 강조하시는 까닭과 또 비평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A. 말이나 글은 사회변화에 따라 변합니다. 세계공용어 수준의 언어들은 좀 덜합니다만, 한국어는 한문 투를 벗어난 글쓰기를 시작한 지 백년도 안 된데다, 사회변화의 속도도 빠르기 때문에 수십 년 전의 문장도 읽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논어처럼 중요한 고전은 당대의 언어로 새롭게 번역하는 일을 지속해야 합니다. 그래서 현대한국어를 강조한 겁니다. 그건 한국어의 발전을 위해서입니다. 한국어가 발전하지 못하면 한국어 사용자들의 행복도는 낮아질 수밖에 없거든요. 그리고 논어를 비평하겠다는 것은 한반도가 지금까지 중국에서 들여다 표준으로 삼았던 유교라는 것의 본질을 조선시대와는 다른 각도로 보자는 겁니다. 유교 전제왕권 국가를 벗어난 지 한 세기가 지났지만 한국인에게는 유교가 종교처럼 내면화한 측면이 있거든요. 그것을 좋다 나쁘다 말할 수는 없지만, 문화적으로 중국에 종속될 위험성은 제거하자는 겁니다. 저는 그 시각에서 비판하였습니다.

 

Q. 그런 문제점은 한국에만 있나요?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A. 일본의 경우 유교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우리보다는 유연했습니다. 조선 같았으면 사문난적으로 매도당했을 견해나 주장도 에도시대에는 활발하게 용납되는 분위기였습니다. 명치유신 이후 국력이 커지면서 그들은 서구문물의 번역에만 국한하지 않고 중국 고전에 대한 번역도 방대하게 진행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어는 매우 발전하였습니다. 중국은 학문조차 정치에 종속되는 나라입니다. 정치 상황에 따라 유교 경전의 해석도 달리하는 사회가 중국입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의 기술이라면 몰라도 중국의 학문에는 그다지 점수를 주지 않습니다. 중국은 큰 이웃이니 우리가 무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되지만, 현재까지만 놓고 볼 때 우리가 본받을만한 점은 드문 나라입니다.

 

Q. 현대한국어로 번역한 사례를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A. 陽貨편의 “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 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이라는 대목을 기존 번역서들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①굳다고 하지 않겠느냐? 갈아도 엷어지지 아니한다면. 희다고 하지 않겠느냐? 물들여도 검어지지 아니한다면. 내가 어찌 박이겠느냐? 어찌 달려 있고 먹지 않을 수 있겠느냐? <차주환, 『논어, 동양의 지혜』, 을유문화사, 1964>

②단단하다고 말하지 않더냐? 갈아도 얇아지지 않으니! 희다고 말하지 않더냐?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 내 어찌 박이 될 수 있겠는가? 어찌 스스로 먹이를 구하지 않고 댕그렁 넝쿨에 매달려 있기만 할 수 있을손가! <김용옥, 『논어한글역주』, 통나무, 2008>

③견고해서 갈아도 얇아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더냐? 희어서 물들여도 검게 물들지 않는다고 하지 않더냐? 내가 어찌 쓴 호리병박이겠느냐? 어찌 매달려서 먹히지 않겠느냐? <李澤厚 저, 임옥균 역 『논어금독』, 북로드, 2006>

읽어서 이해하실 수 있습니까? 어렵죠? 그 밖의 수십 종 번역서들도 대체로 비슷하게 번역합니다. 맥락은 무시한 채 낱말의 사전적 의미만 우리말로 바꾸고서는 직역했다고 여기는 거지요. 그러나 언어는 사전적 약속에서 나온 게 아니라 사회적 약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맥락이 중요합니다. 맥락이 이해되도록 번역해야 합니다. 상대를 칭찬하는 말도 맥락에 따라서는 조롱하는 말이 되잖아요? 저는 그 문장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아무리 갈아도 얇아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 단단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 흰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러하다. 나는 필힐(佛肸)에게 가더라도 바뀌거나 물들지 않아. 그리고) 내가 왜 조롱박(같은 신세)이어야만 하니? 왜 (조롱박처럼) 매달리기만 하고 먹을 수는 없(는 신세로 일생을 마쳐)야만 하니?”

쿠데타를 일으킨 필힐의 초청에 공자가 응하려고 하자 자로가 부당하다고 제지합니다. 이에 공자가 자로에게 대꾸하는 내용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그러한 맥락을 이해시키고자 괄호를 사용하여 번역했습니다. 번역은 출발어의 이해력도 중요하지만 도착어의 표현력이 더 중요합니다.

 

Q. 우문을 해보겠습니다. 혹시 논어라는 책을 한 마디로 정의하거나 요약할 수 있으십니까?

A. 우문 아닙니다. 학자라면 한 권의 책으로만 말할 게 아니라, 서너 페이지 문서로도, 한 줄의 글로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논어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군자가 되어라!”입니다. 그 요약 뒤에는 이런 문답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군자는 어떤 사람? 仁을 완성한 사람. 仁을 완성해야 하는 까닭은? 지배계층의 필수 자질이니까. 그렇다면 공자는 결국 제자들에게 지배계층이 되라고 했단 말인가? 빙고! 공자는 제자들에게 도덕이나 학문을 가르쳤던 게 아님. 내가 곧 재상이 되어 너희들에게 자리를 마련해줄테니까 너희들은 자격을 갖추고 있어, 재상이 되면 나는 周왕조 초기에 주공(周公)이 만들었던 제도와 질서를 회복할 거야. 어떻게?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봉건적 질서를 재구축하는 것이지.”

 

Q. 仁이란 도대체 뭐기에 그걸 지배계층의 자질로 여겼지요? 仁의 개념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실 수 있습니까?

A. 중국인의 사유방식에 개념이란 건 없어요. 공자는 “仁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기껏해야 “仁한 사람은 그런 짓은 안 해!” 정도였지요. 그래서 우리처럼 개념을 위주로 하는 플라톤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중국 고전을 읽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아, 플라톤주의 교육을 받지 않은 옛날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개념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주저리주저리 설명하는 주석서들이 줄지어 나오게 되지요. 하지만 개념 없기로는 주석가들도 마찬가지이니까, 주석서 역시 읽어도 어렵습니다. 현대 중국학을 하는 학자들은 그런 관행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Q. 사정이 그렇다면, 선생님은 仁에 대한 개념을 규정하셨습니까?

A. 물론이지요. 그런데 규정하기 전에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설명한 다음에 규정합시다. 仁은 도덕 덕목이 아닙니다. 원래 군주의 멋진 외모나 행위를 칭송하던 말이었습니다. 공자는 그 말을 군주의 자격이라는 뜻으로 약간 비틀어서 사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학자들은 仁을 ‘자아 인식과 반성을 포함하는 개인적 인간의 내면적인 도덕적 삶’이라고 규정하곤 합니다. 공자를 철학자로 보는 견해이지요. 풍우란(馮友蘭, 1895~1990) 등 서양철학을 공부했던 중국 학자들이 공자를 그리스의 철학가들처럼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공자를 철학자로 만들려고 노력할지라도, 仁은 도덕이 아니라 지배계층의 행동규범일 뿐입니다. 정치는 도덕과 관계없다는 마키아벨리적 관점에서 보지 않더라도 공자는 도덕주의자가 아닙니다. 논어에 109 차례나 언급되는 仁을 정리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타인을 의식하면서 타인과 공감하고, 나아가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며, 공직에 나가서는 공익을 우선시하고, 사적인 욕망을 절제하면서 례라는 규범을 존중하기’ 어딜 보아도 내적 심리를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그저 지배계층으로서의 행동규범들입니다. 그리고 그 규범의 실천은 바로 孝와 悌로 나타납니다. 공자를 仁이라는 도덕을 강조한 인본주의자로 보는 시각은 그래서 기본적으로 오류입니다. 공자는 철학자도, 윤리주의자도, 학자도 아닙니다. 정치권력을 잡으려 했던 사람입니다. 제자들로서는 어떻게 해야 仁을 완성할 수 있는지, 누가 仁한 사람인지를 집요하게 묻지만 그때마다 공자의 대답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교언영색에는 인이 없다느니, 그 사람의 허물을 보면 인한지의 여부를 알 수 있다느니, 인자는 산을 즐기고 지자는 물을 즐긴다느니 하는 모호한 법어들만 나열합니다. 仁뿐 아니라 義·禮·知·孝·悌·忠·信 등 다른 추상명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후학들은 仁의 개념을 규정하고자 몰두하지만, “仁이란 人이고, 그 둘을 합해서 말하자면 道이다.”라는 애매한 규정만 내놓을 뿐입니다. 불교 못지않은 관념세계를 유교에도 만들고자 했던 성리학자들은 ‘아낌의 이치, 마음의 덕(愛之理 心之德)’이라거나, ‘우주가 만물을 낳는 마음(天地生物之心)’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러자 담사동(譚嗣同, 1865~1898)이나 강유위(康有爲, 1858~1927)처럼 서구학문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仁을 에테르나 전기처럼 만사만물을 관통하는 우주의 최후 실재와 동등하게 여기기도 하고, 자유·평등·박애의 근대적 이념을 위한 철학의 근본이라고 규정하게 됩니다. 현대 철학자 이택후마저 ‘천지에 참여하는 본체로서의 성질’이라고 규정한 다음, 인을 본체로 하는 철학적 기초를 다시 세우자고 주장합니다. 이런 규정들은 모두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다,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다, 길면 기차~”라는 언어유희나 마찬가지입니다. 단편적인 유사점만 가지고서 양자는 동일하다고 단정해버리는 것이지요. 사과를 바나나라고 규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것은 시맨틱 시프트(semantic shift: 시간이 지나면 어떤 말의 의미가 본래의 뜻과 크게 달라지는 현상)와도 다릅니다. 이런 황당한 주장들이 별다른 점검 없이 오늘날에도 학문적 방법론으로 동원되는 것이 중국의 인문학입니다.

 

Q. 중국의 학문이 그렇게 된 배경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A. 중국의 학문이 그렇다고 말할 게 아니라, 중국인은 학문을 그렇게 접근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 이유는 학문에 비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학문이 정치권력에 종속되어 버렸는데 어떻게 비판이 가능하겠습니까? 게다가 개념을 중시하지 않으니 언어에 논리적 정합성이라곤 없습니다. 중국인의 사유방식과 학문은 그런 토대 위에 있습니다. 우리도 같은 문화권이었으니까 사정은 비슷합니다. 그런데 그런 특징을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그러할 뿐’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Q. 동서양이 자주 교류하는 요즘은 서구인들이 중국 학문의 그런 특징을 비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A. 일정 부분 그렇기는 합니다. 하지만 서구인은 한자와 중국 글의 문화적 문법을 알기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중국 글의 속뜻을 읽어내지 못하니 비판한댔자 겉돌 뿐입니다. 중국의 글은 손쉽게 왜곡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事出有因 査無實據(사출유인 사무실거)’라는 문장과 ‘査無實據 事出有因(사무실거 사출유인)’이라는 문장을 봅시다. 같은 문장 두 개를 순서만 달리했을 뿐인데 맥락은 정반대가 됩니다. 앞 구는 ‘빌미가 있어서 발생된 일이지만 조사해보니 근거는 없었다’는 뜻이고, 뒤 구는 ‘조사해서 근거를 찾지는 못했지만 일의 발생에는 원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전자는 죄가 없다는 뜻이고, 후자는 공소를 한다는 뜻입니다. ‘連戰連敗’(싸우기만 하면 계속 졌다)와 ‘連敗連戰’(계속 패하면서도 기어이 싸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태평천국의 난 때 증국번이 중앙에 보고하는 문서를 아랫사람이 위치만 바꾸어가지고 책임을 벗어났던 실제 사례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失業(직업을 잃음)’을 ‘待業(직업을 기다림)’이라고 표현하거나 가난뱅이를 ‘待富者(부를 기다리는 사람)’라고 표현하는 것은 웃어넘길 수 있는 왜곡입니다. 하지만 부하에게서 뇌물 받는 것을 ‘예절성 수뢰’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본질을 호도하는 표현은 그저 웃을 수만은 없습니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안 했다.”라는 말보다 훨씬 악취가 나는 호도이지요. 중국사상의 대가라는 전직 하바드대 교수 벤자민 슈워츠(1916~1999)는 “신기하게도, 정확하게 이 차원에서 仁 개념은 플라톤의 향연에 나타난 궁극적 언표 불가능성으로서의 소크라테스의 善과 美 개념의 일면을 연상시킨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지금 聖하고 仁하다고 자처할 수는 없다”라는 공자의 말을 “성과 인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언표 불가능한 것이다”라고 해석해버린 결론이지요. 중국의 언어나 문화적 문법에 대한 서구 학자들의 이런 인식 수준은 논어나 공자에 대한 해석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 수밖에 없습니다. 중국 출신의 미국학자들은 의도적으로 왜곡하기도 하구요. 그런 것을 토대로 중국의 학자들은 공자를 서구 철학자들과 대등하게 설명하고자 더욱 노력하게 되지요. 이런 상황은 저로서는 코미디로 보일 뿐입니다. 저의 책은 그런 점을 지적합니다.

 

Q. 시원한 설명이기는 한데, 다소 생소하기도 하고 다소 과격하게 느껴지기도 하군요.

A. 그럴 겁니다. 우리네의 관념으로 학문이란 점잖은 것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학문이란 재미있어야 한다는 주의입니다. 그래서 요즘말로 좀 튀는 표현도 수용되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Q. 그런데, 중국을 그처럼 우습게 봐도 될까요?

A. 중국을 우습게 본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의 인문을 과거의 기준이 아닌 현대 우리의 기준으로써 보자는 겁니다. 모든 인문학은 결국 언어로 귀결됩니다. 중국을 이해하자면 중국의 언어와 글을 이해해야 합니다. 논어를 통해 중국의 언어와 글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되면 저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는 부분들이 생겨날 겁니다.

 

Q. 언어와 글이 그처럼 이중적이고 왜곡되는 현상은 어떻게 해서 형성되었을까요?

A. 정치권력이 학문마저 장악한 역사가 너무나 오래이기 때문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중국의 정치권력은 비판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사람 목숨을 쉽게 죽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언어는 비유나 은유나 중유(重喩)가 발달하게 됩니다만, 나중에는 의도적으로 비판하지 않았을지라도 비판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가혹한 형벌을 가합니다. 중국사나 조선사에 필화(筆禍)가 잦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식인들은 의사표현을 할 때마다 자기검열을 당하는 겁니다. 이중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었지요. 한편 세월이 흐르면 왜곡된 기록도 사실로 바뀐다고 믿기 때문에 중국인은 기록을 편의적으로 수정하거나 왜곡합니다. 꺼리는 부분을 파내버리고 연결시키거나, 반대되는 내용으로 채워버리거나, 지은이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거나, 고문상서처럼 가짜 경전을 만들거나 하는 일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납니다. 사고전서(四庫全書)처럼 집대성이라는 이름으로 나라 전체의 책을 수집한 다음 내용을 첨삭하기도 합니다. 중국 학술사에서 위서(僞書) 만들기를 꺼리지 않는 것은 그런 배경이 있습니다. 남의 것 모방하기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정도는 약과이고, 남이 지은 시구를 돈을 주고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 중국인들이 짝퉁 만들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도 비슷한 배경이라고 봅니다. 이런 사정을 모른 채 중국의 책을 읽으면 황당한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어요. 중국 바깥에서는 이런 사정을 알기 어려운데, 중국의 빤히 알 수 있는 우리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Q. 그런 문화에 대한 반성은 중국사에서 없었나요?

A. 왜 없었겠어요? 다만 그런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지 못했을 뿐이지요.

 

Q. 문답이 길어졌는데, 하나만 더 여쭙겠습니다. 중국에는 유학 외에 다른 흐름도 있지 않았습니까? 제자백가라든지 도가라든지 하는 것들 말입니다.

A. 있었지요. 공자의 사유방식과는 다른 사유방식을 선호하는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유학이 관학(官學)이 되어 유교가 되자 다른 흐름들은 주류로 올라설 기회를 잃게 됩니다. 그리하여 도가적인 사유방식은 기껏해야 관직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 임시적인 방편으로 이용될 뿐이지요.

 

Q. 학술적인 질문만 드리고 말았는데, 혹시 독자들에게 말씀하고 싶은 내용은 없으십니까?

A. 우리는 종래로 지구상에서 중국을 가장 잘 이해하는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중국이 서구세력에게 무너지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우리는 중국을 더는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6·25를 거치면서 더욱 모르는 나라가 되구요. 이는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100년 가까운 단절과 중국에 대한 무지는 1992년 수교를 재개한 이후 우리에게 많은 시행착오를 안겨주었습니다. 초기 중국 전문가들은 대체로 중국을 국제 공산주의 운동사라는 측면에서만 볼 뿐이었습니다. 중국인의 사유방식이나 문화적 문법을 이해하지 못해 번번이 실수하곤 했습니다. 지금의 중국 전문가들은 그때보다는 낫지만 사정은 비슷합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첩경은 중국의 언어와 글에 대한 해독력을 높이는 겁니다. 그러자면 중국의 고전에 밝아야 합니다. 고급의 중국어 실력은 현대의 백화문이 아닌 고문을 구사할 줄 아는 능력이거든요. 그리고 중국의 고전에 밝으면 중국인의 사유방식을 장악하게 됩니다. 중국인의 사유방식을 장악하고 중국인의 말과 글이 내포하는 뜻까지 읽어낼 수 있으면 중국과의 교류에서 손해를 입지 않게 됩니다. 상당한 경력을 지닌 분들이 중국의 고전을 공부한다면서 전통적인 주석에만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좀 더 설명해볼까요? 중국에서는 권력이 정당하게 행사되는지에 대해서는 분분하게 의논하지만 권력을 정당하게 잡았는지에 대한 의논은 일지 않습니다. 각자는 그저 자신의 분한(分限)만을 얻고자 노력합니다. 자신의 분한을 차지하기 위해 사람들은 미디어를 활용하는데, 공자는 미디어를 이용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봅니다. 논어는 물론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제자백가 기록들은 모두 공자 이후 유행했던 미디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미디어는 실제를 전달하지는 않지요? 실제를 가공하여 전달하지요? 공자나 논어를 편집했던 사람들은 미디어의 그러한 속성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고 봅니다. 권력자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과 그 욕구에 부합하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출 뿐 아니라, 권력자가 자신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도록 만드는 기술도 갖추었던 사람들입니다. 미디어의 타깃은 대중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권력자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미디어들은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고, 경쟁 때문에 실제를 더욱 과장하거나 왜곡하게 됩니다. 직필을 내세우는 춘추필법이란 것은 당시 유행하던 미디어의 허구를 지적하고자 생겨난 관념이라고 봅니다. 그것들은 모두 군주를 향해 ‘이것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통치술입니다’라는 주장입니다. 철학이나 윤리나 사회나 우주를 논한 바는 결코 아닙니다. 그리하여 춘추시대는 권력을 향한 인간의 상상력과 욕망을 자극하는 미디어가 넘치는 시대가 됩니다. 춘추시대라는 환경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진(秦)과 한(漢)처럼 중앙집권제 사회가 정착된 이후에는 그게 불가능하게 됩니다. 어쨌든 공자는 미디어를 이용하여 시대 이슈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봅니다. ‘주공(周公) 문물의 회복’이라든가 ‘제하(諸夏)와 이적(夷狄)의 구분’이라든가 하는 테제를 내세운 것이 주효했다고 봅니다. 묵가·도가·법가·음양가 등 제자백가는 사실 공자가 주도했던 유가의 아류이거나 반동일 뿐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천지창조의 신화나 종말의 예언이라는 이미지를 형상화하여 형제애를 강조한 것이나, 마피아가 가족애를 강조하는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것이나, 모두 비슷합니다. 모두 권력을 향한 기제입니다.

 

Q. 역시 시니컬하게 매듭을 지으시는군요. 오늘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혹시 논어역평 외에 선생님의 다른 책을 소개해주실 수 있습니까?

A. 학자는 그저 일생에 한 권의 책만 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몇 가지 다른 책들은 보조적인 내용에 불과합니다. 귀 매체의 발전을 기대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올해는 한중 수교  27주년이 되는 해이다. 1992년 8월 24일 이데올로기적 대립구도가 국가경제발전이라는 목적에 의해 와해됐다. 지난 27년 동안 한국과 중국은 우호적인 관계로 동북아 정세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왔었다. 하지만 사드 문제로 불거진 한중갈등은 경제, 문화 교류에 찬물을 끼얹었다. 최근 유엔총회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왕이(王毅)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이 다시 손을 맞잡고 긴밀한 소통을 이어가기로 하면서 냉랭한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 지는 듯하다. 중국은 우리에게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래서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려면 중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한다. 그 출발선에 중국의 언어와 글에 대한 해독력을 갖춘다면 방법은 훨씬 수월해진다. 조명화 선생님의 『논어역평』이 중국을 이해하는 데 있어 훌륭한 필살기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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