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기의 밑줄긋기 2]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박명기 기자
  • 입력 2018.10.06 11:21
  • 수정 2019.08.28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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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폴 발레리의 해변묘지

ⓒ박명기
ⓒ박명기

제주에는 바람이 참 많다. 그 바람을 제대로 맞으려면 ‘올레’를 걸어야 한다. 7년 전 올레길을 나 홀로 3박4일 뚜벅뚜벅 걸었다. 출발지는 6코스 쇠소깍이었다.

바다와 포구, 해안 절벽, 오름과 소로길 등 걸음마다 마치 비밀의 숲을 헤쳐 나가는 느낌이었다. 비록 몽돌해안 자갈에 치여 발톱이 빠지고, 물집이 잡혀 절뚝이며 걸었지만 바람 속에서 ‘완전한 고독’을 맛봤다.

트레킹화 대신 조깅화를 선택한 것도 원망하지 않았다. 짬나면 한라산 산정을 한 번씩 눈도장을 찍으면서 ‘절대고독’을 즐겼다.

문득 길모퉁이를 돌자 영화의 한 장면처럼 풍경이 펼쳐졌다. 그 해변묘지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사각형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경이로웠고, 몽환적이었다. 그건 바람의 넋인 것 같았다. 넘실대는 파도의 혼 같았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는 시 ‘해변묘지’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고 노래했다. 놀라운 것은 그때 내 입에서 저절로 그 시의 한 구절이 음악처럼 흘러나왔다는 것.

대학 시절이었던 1980년대 이성복, 황지우, 최승자 등과 함께 시대를 풍미한 시인 중에 남진우도 있었다. 그의 시 ‘로트레아몽 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대한 일곱 개의 노트 또는 절망연습’의 7연에도 이런 시구가 있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지난해 9월 내가 창간한 인터넷신문이 창간 5주년을 맞았다. 나한테 준 포상이자 처음으로 휴가를 떠났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택했다. 800km 전체 구간이 아닌 140km였지만 ‘태양의 나라’ 스페인의 작열하는 햇살 속에서 ‘혼자 걷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이번에도 길들이지 않은 새 등산화는 첫날부터 내 발뒤꿈치에 손바닥 절반 크기(?) 같은 물집을 선사했다. 발은 천근만근 무겁고 때때로 온몸이 휘청대는 고통이 엄습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고통조차 행복했다.

가도가도 그늘이 없는 들판, 밀을 수확한 마치 거대한 골프장 같은 능선과 평원을 지나면서 절로 ‘고독’해졌다. 침묵 속에서 나를 돌아보았다. 오롯이 길만 강물처럼 흘러가는 그곳은 어느덧 명상의 길이 되었다.

고통을 즐겨라. 고통을 응시하자 어느새 즐거워졌다. 카뮈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이 단지 햇살이 눈부셔서 살의를 가진 것처럼, 태양이 뜨거워 되레 고통을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그 길에서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가을을 맞았다.

여행작가인 폴 서루는 “길이 끝나면 이야기는 끝난다”고 썼다. 하지만 나의 길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이후 계속 걸었다. 가을에서 봄까지 매 주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서울 둘레길 8코스를 걸었다. 드디어 북한산 둘레를 빙 돌아 도봉산역에서 완주 도장을 찍었다.

내가 평소 갖고 있는 여행과 관련 견분철학(?)은 “여행은 가슴이 뛸 때 가야 한다. 그리고 무릎이 성할 때 많이 가야 한다”다. 쉰을 넘겼지만 여전히 내 무릎은 성했고, 내 가슴은 쿵닥쿵닥 뛰었다.

나에게 ‘바람이 분다’는 것과 ‘살아야겠다’는 것은 한 문장이다. 여행을 떠나게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내 삶의 자극이자 의지가 담겼기 때문이다.

제주 올레길은 언론인 출신 서명숙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나서 구상했다고 알려진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판매부수 2400만부를 기록한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 영감을 주었다.

아, 나는 지금도 제주 해변묘지와 산티아고 순례길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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