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 라이프➇] 묘한 3대

김경 기자
  • 입력 2019.10.2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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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김경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나는 잠 잘 때마다 거의 매일 꿈을 꾸는 편이다. 어떤 경우에는 꿈속에서 또 잠을 자는 입체적 꿈까지 꾸면서 꿈과 현실을 혼동하기도 한다. 장자는 나비의 꿈을 꾸고 나서 물화(物化)를 얘기했지만, 나는 그저 꿈속의 이야기에 내재된 의미 파악에만 열을 올린다.

어린 시절, 나는 우주 공간을 날아다니며 신비한 환상의 세계를 여행하는 꿈을 자주 꾸곤 했다. 지금도 물론 그런 꿈은 진행형이다. 나는 유난히 금성과 화성에 관심이 많다. 그 별들의 밝기나 빛깔 등의 과학적 사실은 뒷전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별을 관찰한다는 게 그저 큰 즐거움이다. 각각의 별에서 존재하는 다른 성(性)이 이곳 지구까지 날아왔다는 존 그레이의 예지가 얼마나 통쾌한가. 나는 금성에서 우아한 날개를 펼치며 날아왔고, 그대는 화성에서 외줄을 타고 내려왔다.

당신은 말이야, 도대체가 생각이 있는 사람이야?

그럴 수도 있죠, 뭐. 뭘 그런 걸 가지고 까칠하게…. 그냥 대충 살자구요.

나는 남편을 힐끗거린다.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은 그렇다 쳐도, 저렇듯 진지한 표정이라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시간을 맞춰 집을 나서려다 말고 안경을 찾느라고 한참을 허둥지둥 법석을 떨었다. 외출하는 데에 신발 못지않게 소중한 게 안경이 아니던가. 말썽쟁이 안경은 제자리인 서가의 한쪽이 아닌, 주방의 선반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만약 기차를 놓친다면 큰 낭패다. 승강기 안에서도 남편은 도리머리를 하며 표정을 영 풀지 못한다.

실은, 당신의 그 태도가 더 문제라고. 알아?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불가능이라구. 그렇게 대충 살려면 뭣 때문에 사나?

어머? 내 깜냥대로 이만큼이면 족하지. 그깟 일로 생사 문제까지 건드려? 해도 너무 하는 거 아냐? 나는 막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말을 애써 삼키려니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그래, 이쯤에서 입을 다무는 게 상수다. 원인 제공자는 명백히 나라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지금은 상당히 양호한 편이다. 사실 남들은 나이 들수록 건망증이 심해진다는데, 다행히 나는 정반대다. 그 동안 주야장천 얻어들은 남편의 질책 때문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나는 평생 세 가지 일만 하고 사는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남편 친구들 부부 모임에서 잠깐 자리를 비우고 돌아오니 한 부인이 넌지시 물었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 딱 세 가지라면서요? 책 읽기, 잠자기, 물건 찾기요.

아, 네….

한쪽에서 입술을 비죽이며 웃고 있는 남편과 내 눈이 충돌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신혼 때부터 티격태격했던 원흉은 역시 나였다. 나는 정말 정리정돈에 젬병이었다.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물건들이 왜 내 눈에는 띄지 않는 것인가. 의문만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일찍이 친정아버지도 무척 염려했던 대목이다. 전등이 꺼진 깜깜한 방에서도 필요한 물건은 어떤 것이라도 곧바로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고 아버지는 누누이 강조했다. 내가 정말 아둔한 건가. 아무래도 태생적으로…. 맞다, 맞아. 바로 그거다. DNA의 문제였다.

나는 남편을 빤히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당신 장모님인 손 여사 별칭이 뭔지 알기나 해요? ‘묘한 여자’, ‘묘한 여자’라구요.

별칭은 친정아버지의 작명 솜씨로 탄생했다. ‘묘’를 길게 늘이고, ‘한’에 악센트를 주면서 발음할 때의 아버지의 표정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표정, 또한 묘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결코 단순 가볍지 않은 심오함이 깃들어 있었다. 워낙 잉꼬부부로 소문난 부모님은 거의 다툰 적이 없었다. 단지 ‘묘한 여자’라는 별칭이 등장하면 아버지의 심기가 몹시 불편하다는 신호로 봐야 했다. 대부분이 정리정돈에 몰지각한 어머니 탓이었다. 그 나머지는 시비를 가리면서 표출되는 언어 구사의 문제였다. 어머니의 잘못에 지적을 하는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지적을 받은 어머니의 말투는 한결같이 변함이 없었다. 어머니는 네, 그러네요, 라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순순히 수긍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것 같네요.

그렇다고 인정해야지, ‘같네요’가 뭐요? 하여튼 묘오한 여자라니깐.

아버지는 끝내 ‘묘한 여자’로 결론을 내리면서 다툼의 막도 내렸다. 나는 요즈음에야 아버지의 깊은 속내를 조금은 깨달은 느낌이다. ‘묘한 여자’는 여러 가지 복합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뛰어난 언어감각에 유머가 더해지고, 어떠한 값으로도 매길 수 없는 애정까지 곁들여진 말이다.

아버진 역시 당신하곤 차원이 달라요. 헌데… 그 심정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어? 나는 뜬금없이 튀어나온 뒷말에 움찔한다. 남편의 말이 옳다. 난 왜 이리도 생각이란 걸 못할까. 스스로 백기를 들고 읍소한 꼴의 말을 무심코 내뱉어버렸다. 남편이 박장대소를 한다.

모전여전이군 그래. 장인어른께 한 수 야무지게 배웠네. 오늘부터 당신도 묘한 여자야.

술을 못하는 남편이지만, 그 표정이 잔뜩 취해 넉넉한 웃음을 터뜨리며 ‘묘한 여자’를 발음할 때의 아버지의 표정을 꼭 닮았다. 나도 모르게 웃음보가 터진다. 문득 이 오묘한 DNA를 물려줄 딸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핸드폰이 부르르 떨린다. 아들이다.

엄마 며느리가 오늘 명언을 남겼네요. 지갑을 찾느라 야단법석을 떨어 내가 찾아줬더니, 뭐랬게요? 글쎄, 둘이 살면서 한 사람만 알고 있으면 된다고 하네요.

맞네, 진짜 명언이다. 괜히 쓸데없는 잔소리 나불대지 말고 너나 잘하셔!

넵, 잘 알았습니다. 명심합죠, 어머님.

아들은 깔깔거리며 전화 속에서 사라진다. 나는 절로 손뼉을 치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역시 내 며느리로 손색이 없다. 묘한 3대다.

기차는 레일 위를 미끄러지듯 달린다. 남편은 어느 틈에 잠에 떨어졌다. 묘한 여자와 사느라 고단도 하겠지. 아니다. 그대는 행복한 남자다. 내 덕에 늘 깨어 있는 뇌와 여전한 혈기를 소유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잠든 남편의 모습이 더없이 평온해 보인다. 금성에서 날아온 묘한 선녀의 매력을 꿈에서나마 깨우쳤나 보다. 내일은 새벽 일찍 일어나 동쪽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다. 개밥바라기라는 아름다운 별칭을 지닌 금성이 틀림없이 반짝일 것이다. 심안이 아닌 육안으로 충분히 볼 수 있을 것 같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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