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주의 신중년 요즘세상 27] “나는 할빠입니다”

오은주 기자
  • 입력 2019.11.11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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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심리학과 졸업 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늪' '저녁 산행' 추천완료 등단소설집  [달의 이빨] [하루 이야기] [잠든 정원으로부터] 출간2011년 한국소설작가상 수상현재, 한국문화콘텐츠 21 운영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195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심리학과 졸업
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늪'
'저녁 산행' 추천완료 등단
소설집 [달의 이빨]
[하루 이야기]
[잠든 정원으로부터] 출간
2011년 한국소설작가상 수상
한국문화콘텐츠21 운영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기생 친구들끼리 모인 저녁식사 자리라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고 술맛도 나건만 민규씨는 왠지 좌불안석이다. 아직은 현역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있는 60대 초반의 나이인지라 저녁모임의 시작시간도 7시였다. 민규씨는 1차만 끝내고 일어서도 집에 가면 9시가 넘는다는 생각이 뱅뱅 돌았다. 59세쯤 정년을 채우고 회사에서 은퇴해서 취미생활 말고는 재취업을 하지 않은 민규씨는 현역친구들과의 만남이 사회에 대한 감각을 유지시켜 주거나 추억을 불러들여서 좋았다. 특히 고등학교 동기생들이라면 가치관이 상당히 비슷해서 미묘한 정치나 경제 현안에 대해서도 서로 얼굴을 붉힐 일이 없는, 기분이 좋은 모임인지라 웬만해선 빠짐없이 참석하는 쪽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런 저녁모임이 시들해지고 말았다. 그 시점을 정확히 말하자면 6개월 전에 손자가 태어나서부터였다. 새삼 친구들을 돌아보니 환갑을 넘었는데 요즘 세태대로 자식들이 아직 결혼을 안 했거나 결혼을 했어도 아기를 낳지 않은 비율이 더 높았다. 손주가 있는 친구는 민규씨 자신을 포함해서 3명뿐이었다.

“야, 근데 요새 경식이는 왜 모임에 안 나오냐? 어디 아픈가”

“아니, 걔 요즘 딸내미네 딸 봐주느라고 꼼짝도 안 하잖아.”

“딸내미네 딸이면 외손녀인데 할머니들은 다 뭐하고 할아버지인 경식이가 애를 봐?”

“친할머니는 지방에 살고, 우리도 알다시피 경식이 마누라는 젊었을 때부터 몸이 약하잖아. 그래서 경식이가 아침부터 아예 가까이 이사 온 딸네집으로 출근한대.”

“요즘 그런 집이 많긴 해.”

10명이 넘는 친구들은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새로운 세태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나도 앞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 건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가 애기를 보면, 얼마 전만 해도 할아버지는 신문 보고, 아빠는 핸드폰만 본다고 아직은 멀었다고 하더니만 손주 육아가 우리 곁에 바짝 다가왔네.”

화제가 손주 육아로 흘러가자 민규씨는 뭔가 점점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이 자리에서 빨리 일어설까를 궁리하던 민규씨의 태도를 읽은 한 친구가 물었다.

“민규, 너 뭔 일 있냐? 왜 좌불안석이야?”

민규씨는 이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창피한 사실도 아닌데 밝히지 못해 끙끙거릴일이 아니지 않은가!

“나, 할빠야!”

“할빠가 뭐야?”

“요즘 국어사전에도 등재됐어. 아빠 역할을 하는 할아버지라는 뜻이야. 아들네서 손주 봤다고 너네한테 한 턱 쏜지가 벌써 6개월 됐네. 그 후에 며느리가 손자 백일이 지나고 복직을 했어. 요즘 몇 달째 마누라랑 아들네 집으로 아침에 가서 고물거리는 손주녀석 봐주고 저녁에 돌아오는 생활을 하고 있어.”

민규씨는 여기서 유머를 섞어가며 한 박자 쉬어가기로 했다. 자꾸 얘기해봤자 아직 손주를 품에 안아보지 못한 친구들은 동조를 못할 터였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질문 있는 친구? 무슨 의미가 있냐고 안 물어봐?”

손주를 먼 저 본 친구가 역시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어휴, 큰일 한다. 사실 1대를 건너뛴 할아버지 할머니의 격대교육이 애들한테도 안정감이 있고 좋다고 하더라.”

“뭣들 하냐? 가문과 나라발전을 위해서 육아에 전념하는 우리 친구 민규 할빠를 위해 술 한잔 주고 빨리 보내자.”

“맞아 나 빨리 집에 가야 해. 애기 목욕을 끝내야 비로소 하루가 진짜 끝나거든.”

지난 3개월의 할빠 생활이 가져온 변화에 민규씨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총총히 일어서는 민규씨는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어봐주지 않은 친구들에게 먼저 대답을 했다.

“나이 들어가면서 손자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지금의 내 행동이 그 밑거름이 될 거야.”라고.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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