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 라이프⑨] 비봉 여사

김경 기자
  • 입력 2019.11.1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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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김경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나는 날개를 접은 한 마리 매미다.

젖 먹던 힘까지 다리에 실으며 입을 앙다물고 주문을 외듯 진지하게 읊조린다. 나는 전신을 나무 등걸에 밀착한 매미를 연상하며 최대한 암벽과 한 몸이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 암벽은 여태까지 지나온 암벽들과는 달리 밧줄이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발을 디딜 만한 간격으로 움푹움푹 홈이 파여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아무리 생각해도 묘책이 없다. 나는 마음을 단단히 다지면서 남편의 꽁무니만 쫓아 열심히 기어오른다. 남편도 나와 거의 똑같은 자세여서 나를 끌어올려줄 상황이 아니다. 일순간 비장감이 가슴을 친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까마득히 추락하는 일만 남았다. 행여 시선이라도 흐트러질까 봐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겁난다. 등에 진땀이 흐른다. 됐어, 이제 다 왔어. 남편의 목소리에 황급히 눈을 치뜬다.

손바닥에 닿는 촉감이 좀 전과는 영 다르다. 흙, 흙이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치켜들고 조심스레 흙을 밟으며 직립한다. 된 숨을 몰아쉬고 나서 주위를 휘둘러본다. 뭔가가 이상하다. 확신하고 올라왔는데 비봉 정상이 아니다. 정상에 세워졌다는 진흥왕 순수비 빗돌이 저만치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퍽이나 친절한 비봉이시다. 그러니까 여기는 정상에 무사히 안착하기 위해 힘을 잠시 비축하라는 쉼터라고나 할까. 20평 남짓한 너럭바위에 빙 둘러 벼랑과 암벽들이 자리하고 있다.

저기 좀 봐. 다들 잘도 올라가네. 우리도 한 숨 돌리고 다시 힘을 내보자구.

목적지를 눈에 담은 남편은 웃음꽃이 만발한 얼굴로 즐거워한다. 나는 남편처럼 얼굴을 펴기는커녕 아예 한껏 쭈그리고 만다. 아니 심장마저 오그라들었다.

아니, 아니에요. 난 더 이상은 한 발짝도 못 가요. 절대로, 절대로….

아무리 살펴봐도 빗돌에 이르는 길이 만만찮다. 개미길 같은 터널이랄까. 암벽 틈바구니에 난 길은 겨우 한 사람이 들어서기에도 비좁아 보인다. 사람들이 몸을 움츠리고 거미손을 만들어 더듬더듬 암벽을 짚어가며 올라간다. 아찔하다. 내 나이가 몇인데, 더는 모험을 하고 싶지 않다. 멋모르고 여기까지 올라온 것만으로도 후회막급이다. 실은 암벽을 타기 전부터 얼마나 조마조마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어찌어찌 올라간다고 해도 내려갈 때는?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도 묘안이 서지 않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유혹적인 말이 소곤거렸다. 할 수 있어. 포기하지 마! 기회는 단 한 번뿐이라는 거 몰라? 나도 모르게 스르르 유혹에 넘어간 게 불찰이었다. 아무튼 빗돌은 여기가 아닌 더 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이 문제다.

이 사람아, 여기까지 와서 주저앉겠다고? 올라왔던 암벽에 비하면 저 코스는 식은 죽 먹기야. 자, 가슴을 쫙 펴봐.

몰라요, 몰라. 난 무조건 못 가요. 가든 말든 다 내 맘이니 종용하지 말라구요.

자,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회는 단 한 번뿐입니다. 부인, 이 남편을 믿고 일어서시지요.

기회는 단 한 번…. 또 유혹적인 발언이 귀청을 때린다. 남편이 덥석 내 손을 잡아끈다. 웬걸, 남편의 손이 요술손인가. 금세 내 마음이 돌변하고 만다. 그래, 할 수 있어. 나는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발을 뗀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한 떼의 사람들이 빗돌 주위에 포진해 있다. 모두들 사진을 찍느라 야단들이다.

우리 어부인 인증 샷 남겨야지. 빨리빨리 한쪽에 서 봐.

나는 아직도 안정감을 못 찾는 종아리로 빗돌 가까이 다가서다가 얼핏 시선을 저 멀리 아래로 떨어뜨린다. 순간 현기증이 올라오면서 심장이 쿵덕쿵덕 뛰기 시작한다. 들썩이던 고소공포증이 ‘때는 이때다’ 하고 급습한 것이다.

아유 무서워. 죄다 관둬요, 인증 샷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요.

잠깐만 참아요. 인증 샷을 포기하면 어떡해?

간신히 빗돌을 붙잡았다 싶은데, 느닷없이 거센 바람이 휘몰아친다. 선글라스라도 날릴 기세로 덤벼든다. 일단 모자를 벗어 배낭에 넣어본다. 문득 어디선가 기개 넘치는 우렁찬 함성이 쏟아진다. 1,400여 년 전의 세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기골이 장대하고 당당한 선조들의 피가 끓어오른다. 단연 신라의 진흥왕이 으뜸이다. 갑옷을 입은 진흥왕이 해발 556미터의 정상에 서서 호랑이처럼 포효한다. 학자 정신으로 무장한 추사는 비문을 읽느라 해가 이우는 것도 모른다. 나는 절로 숙연해진다. 그들은 스러졌으나 결코 스러지지 않았다는 자취, 내가 껴안은 비봉이 그들을 온전히 품고 있다.

빗돌에서 약간 물러나와 남편과 나란히 선다. 언제 미세먼지가 떠다녔냐는 듯, 시야는 그지없이 쾌청하다.

와우, 장관이네. 이쪽은 평창동이고, 저쪽은 고양시입니다.

남편은 경쾌한 어조로 설명하기에 바쁘다. 나는 시나브로 긴장감이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시야를 한 치 한 치 넓혀나간다. 높은 산 아래에 물이 흐르고, 평평한 들에는 길이 뻗고 건물이 모여 있다. 서울이라는 한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형언할 필요 없이 남편 말대로 장관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하산 길은 올라왔던 길과 다르다. 쉼터에서 올라온 암벽을 떨치고 다른 암벽의 틈새 길로 들어선다. 으스스한 암벽 길은 상행선이었고 하행선은 훨씬 편안하다. 능선을 타고 걷다보니 비봉과 같은 높이의 사모 바위 아래에 이른다. 사모 바위에 오르는 것은 그냥 제자리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하자고 남편과 합의한다. 마음이 더없이 한가하고 평온하다. 나는 사모 바위 밑에서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날뛴다. 소나무 사이사이에 박힌 모난 바위들에 폴짝폴짝 오르내린다.

비봉 여사님,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하산하시죠.

비봉 여사님? 오, 괜찮은 칭호인데….

잠깐, 남들은 날 비자, 비봉(飛鳳)으로 착각하겠는데?

남편은 내 말을 중도에 부러뜨리고선 고개를 갸웃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주절거린다.

아무렴, 비봉(碑峯)에 올랐으니 비봉(飛鳳) 여사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스스로를 향해 힘껏 박수를 친다.

암튼 당신 대단해. 은근 뚝심 있어.

다, 당신 덕분이죠, 뭐. 올라가길 정말 잘했어요. 이 자신감… 보여요? 앞으론 그 어떤 일이라도 다 해낼 수 있다구요. 이제부터는 비봉이 내 든든한 버팀목이에요.

우리는 본격적인 하산을 시작한다. 산수화 병풍 같은, 산이 지닌 본연의 절경을 감상하서 여유롭게 능선을 타고 내려온다. 자연은 아무리 쳐다보고 또 바라보아도 시선을 접을 수 없는 매력의 산실이다.

어, 밧줄이네? 잘 보라구. 이렇게 뒷걸음으로….

남편이 잽싸게 밧줄을 움켜잡으며 시범을 보인다.

지금 누굴 가르쳐요? 비봉에 오르신 몸을 깜박하셨나?

 

아참, 소인이 감히 비봉 여사님을 몰라보고….

실제로 내 몸은 새털처럼 가볍다. 창공을 날기에도 부족함이 없는데, 이런 일은 땅 짚고 헤엄치기다. 나는 암벽에서 내려와 밧줄을 소리 나게 탁 놓으며 한 마디를 잊지 않고 챙긴다.

누가 뭐래도 비봉 여사예요. 명심, 또 명심해요.

아뿔사! 나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낀다. 이래서 나는 안 된다. 아직도 멀었다. 비봉(飛鳳) 여사라고 불리기엔. 혹 비봉(碑峯) 여사라면 모를까. 아니 비봉(碑峯)마저도 어울리지 않는다. 북한산의 모든 봉우리를 다 섭렵하고 난 뒤에 불려도 결코 늦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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