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애경의 人花方暢 1] 겸양지덕 제비꽃 ‘함영준’

박애경 기자
  • 입력 2018.11.12 22:04
  • 수정 2021.06.08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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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에 앞서...

얼마 전 묵은 친구로부터 한권의 책을 선물 받았다. 어릴 적 동경의 대상이었던 이해인 수녀님의 수도서원 50주년을 기념해 출간한 <기다리는 행복>이라는 책이었다. 책의 절반을 못미처 마주대한 소제목이 머리를 훅 내리쳤다.

 

사람꽃도 저마다의 꽃술이 있다

 

수녀님의 꽃술 순례를 따라 가보면 접시꽃, 나리꽃처럼 꽃술모양이 밖으로 돌출된 것은 화려하게 보이고 치자꽃이나 민들레꽃처럼 납작하게 달라붙어 있는 것은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연산홍이나 옥잠화처럼 꽃술이 가느다란 것은 섬세해 보이며, 초롱꽃, 둥굴레처럼 고개를 숙여야만 볼 수 있는 꽃술은 겸손해 보인다. 백일홍이나 해바라기 꽃술은 둥글게 원을 그리며 촘촘히 붙어 있어서 친밀하고 다정한 결속력이 있어 보이고 얼레지나 달개비꽃은 꽃잎보다 오히려 꽃술이 매혹적이란다. (이해인의 기다리는 행복)

 

이렇듯 수녀님은 다양한 모습의 꽃들이 저마다 다른 꽃술을 지니고 있듯 사람 또한 그러하단다. 공감백배 아니 천배, 만배다. 그러다 문득 사람의 인생사까지 생각이 미쳤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아 낸 후 얻어진, 우리가 품고 있는 내면, 사람꽃술을 순례하고 싶어졌다. 이 모양, 저 모양, 살아 온 모양이 제각각인 사람꽃들이 세월 속에 흩뿌린 인생꽃술 이야기를 담고 싶어졌다.

 

이 글의 대제를 어거지(억지의 잘못된 표현)인화방창 人花方暢으로 잡은 이유이다. 인화방창은 따뜻한 봄날에 온갖 생물이 나서 자라 흐드러짐을 표현하는 만화방창(萬化方暢)’이라는 한자성어에 힌트를 얻어 꼼수부린 결과이다.

 

농익은 꽃술향기 품은 사람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야산 둔덕에 자리를 내어 탁배기 한사발 들이키며 이 꽃 저 꽃과 수다를 떨고 싶다. 달콤 쌉싸래한 탁배기 향은 수다를 풀무질하고, 수다는 허허로이 수풀 속으로 떨어지지만 이내 꽃씨가 되어 어린싹을 틔울 것이다. 바야흐로 새봄이다.

 ‘제비꽃 꽃술’ 함영준

여느 선술집처럼 ‘한남동 북엇국’ 저녁풍경도 시끌벅적 유쾌했다. 주홍빛 조명과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이 따뜻함과 정겨움을 더했다. 한잔 술에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나의 꽃술순례 첫 번째 주인공을 만났다.

함영준. 그는 22년간 조선일보 기자, 특파원, 사회·국제부장을 거쳐 주간조선 편집장을 지낸 바 있다. 기자로서 국내외 정관재계 인사들의 흥망과 각종 사건사고 속 다양한 인물들을 밀착해 지켜보면서, 특유의 분석적이며 통찰력 있는 문장으로 대중들에게 알권리를 누리게 했다. ‘1999년 제10회 관훈클럽 최병우기자기념 국제보도상’을 수상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평생 ‘글쟁이’라 불리길 바라는 그의 마흔 후반, 위기가 찾아왔다. 소위 ‘잘나가는’ 신문기자로서의 임무를 스스로 내려놓은 것이다. 뜻밖의 선택에 주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뭔가 큰 잘못을 했던지, 아니면 자만심이 지나치거나 먹고 살만 하던지 등등.’ 하지만 그는 권위와 안락을 뒤로하고 함영준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 했다. 그의 바람은 편집국에서 사업국으로의 부서이동 명령을 계기로 실천으로 옮겨졌다.

조선일보 퇴사 후 개인사무실을 차려 프리랜서 저술가로 활동하고, 교수, 강연자,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2018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홀로서기와 정체성 찾기에 열심을 다해왔다. 올라가고 내려가기를 반복하면서 말이다.

나는 그의 홀로서기의 기록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나를 비롯해 인생 후반을 시작하는 이모작뉴스의 독자들이 타인의 삶 속에서 자그마한 철학을 얻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가을이 절정을 넘어선 10월 24일 저녁, 북엇국이 유명한 이곳에서 우리는 한창 물오른 대방어회, 칼칼한 김치전과 묵은지돼지찜을 안주삼아 오미자 소주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는 서로 근황과 사업에 대한 안부를 물었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주거니 받거니 했다. 이야기 한 토막에 술잔 부딪힘이 더해지고 술 주전자도 비워갔다.

기분 좋은 취기가 느껴질 때 나는 그에게 물었다. “더 일할 수 있었던 사십대에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나오신 거 후회하지 않으세요?”라고. 그는 주저 없이 말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다소 무모할 수 있었던 그의 홀로서기 결단과 그 과정에서 남긴 고군분투 족적이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이모작세대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주는 듯하다.

*********

Q.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A. 오랫동안 근무한 직장을 그만두고 홀로서기를 해야 할 때 마무리를 깔끔하게 해야 한다,

새 출발이 그 이전의 것과 단절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 끊고 맺음을 잘해야 시작도 활력을 찾을 수 있다. 시작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 나이 들어서 시작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열정만으로 밀어 붙이는 게 능사가 아니다. 시간을 투자해 철저히 준비해야 실패 확률을 최대한 줄일 수 있다. 또한 프로페셔널한 자세도 필요하다. 프로페셔널은 자기의 강점을 바탕으로 지식을 쌓고 성과를 내는 사람을 말한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프로페셔널은 경쟁력이자 무기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자기성찰이 꼭 필요하다는 얘기다.

 

Q. 자기성찰이라고 하면?

A.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이 홀로서기 도전의 첫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정들었던 태평로 신문사 문을 나설 때, 1월 하순 날씨치고는 꽤나 포근했다. 미지의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있긴 했지만, 제2의 인생을 잘 살아보리라 다짐했었다. 교보생명 뒤 빈대떡집 ‘열차집’에서 막걸리 한 사발을 걸친 후 후암동 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면서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지금까지 인생에 만족해 왔는지?’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지?’ ‘자신을 괜찮은 인간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지?’ 등등. 그런데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그렇다’라고 답변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내가 선택한 조직에서의 이탈이 나 자신에게 있음을 직시했다.

당시 나는 괜찮은 연봉에도 늘 부족함을 느꼈고, 남에게 큰 도움을 주지 못하면서 허례허식에 싸여 있었고, 지위가 오르고 월급봉투가 두꺼워질수록 마음은 때가 끼고 점점 각박해지고 있었다. 기자가 아니라 기술자라는 회의감, 젊은 시절의 패기와 혈기는 지위 높은 사람들 앞에서 때론 위축되기도 했다. 이러한 나의 초라함을 감추기 위해 외형적으로 과장된 행동을 하곤 했었다. 그러다 나의 모습을 철저히 객관적 시선에서 바라보았고, 그래서 나는 자기포장을 벗기고 괜찮은 인간 ‘함영준’으로 살아보기 위해 제2의 인생을 선택한 것이다.

 

"길이 너무 실없이 끝나버린다고 허탈해 할 필요는 없어. 방향만 바꾸면 여기가 또 출발이잖아“

-영화 <가을로> 대사 중

 

Q. 제2인생의 도전기가 궁금하다.

A. 먼저 앞날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부터 세웠다. 나는 여느 퇴직자처럼 사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애초에 마음먹었던 ‘익숙한 일에서 출발하는 것’, 그것은 곧 글이었다. 월간·주간지 등에 연재물을 쓰거나, 때로는 신문 칼럼을 쓰면서 나중에 이것을 묶어 책으로 낼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당분간 적자재정일수 밖에 없었지만 이를 감수하겠다고 다짐했다. 퇴직금을 아껴 쓰면 최소한 3~4년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집에서 일을 할까 생각도 했지만, 경제적 부담이 되더라도 일과 생활공간을 분리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글쓰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출과 수입에 대해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나갔다. 계획을 세우고 나니 무모하고 불안하게만 느껴졌던 나의 도전이 실현가능한 희망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쌓은 관록과 여유라는 무기를 가지고 다가올 인생에 공격수로 다시 한 번 뛸 수 있다는 자심감이 들었다.

 

Q. 도전은 지금도 진행형이지만 그간의 도전을 통해 얻어진 것들과 잃은 것들은 무엇인지.

A. 잃은 것은 전혀 없다. 얻은 것으로 모두 채웠기 때문이다. 처음 홀로서기를 할 때 난 내 자신을 믿지 못했다. 그러나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서로 대립하고 화합하면서 서서히 나를 변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나의 변화는 공격수로서의 후반 인생을 잘 이겨내는데 큰 도움이 됐다. 내게 찾아온 변화는 일곱 가지였다. 우선 나를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고, 인간관계가 편해졌으며, 행복하다는 생각을 자주하게 됐다. 그리고 며칠씩 일에 몰두해도 힘들지 않았고, 신은 간절히 바라고 열심히 노력하는 자에게 응답하신다는 진리를 체험하면서 좀 더 신실해지고 신앙심도 깊어졌다. 아울러 남을 배려하게 됐으며, 두려움이 적어졌다. 이정도면 얻은 게 엄청나지 않은가?

 

Q. 이러한 긍정적 변화를 얻는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한 때 우울증을 겪으셨다는데...

A. 그렇다. 우연한 기회로 청와대 정책비서관으로 몇 년간 일하게 됐다. 당시 나는 권부의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민주화된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스스로 힘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국회의원 도전을 결심했다. 2012년 4월 19대 총선을 준비하기 위해 그보다 1년 전인 2011년 봄에 청와대에 사표를 냈다. 하지만 정치가 내 길이 아님을 간파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고지도, 후원세력도, 돈도 없었고, 무엇보다 내 성격이 정치 생리에 맞지 않았다. 총선 4개월을 앞둔 2011년 12월 초 눈 딱 감고 선거사무실을 폐쇄했다. 내 나이 만55세였다.

그 뒤 찾아온 후폭풍은 생각보다 훨씬 컸고, 전혀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우울증이라는 갑작스런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몸과 마음이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불면의 밤들을 보내고 심지어 공황장애까지 들이닥쳤다. 결국 난 의사를 찾아갔고, 적절한 치료와 운동을 통해 6개월 만에 극복할 수 있었다. 우울증을 이겨내면서 나는 더 단단해졌고, 더 행복해졌다.

 

Q.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한 팁이 있다면?

A. 나의 경우 운동, 긍정적인 사고, 명상이 도움이 됐다. 그리고 본업인 글쓰기를 통해 잡념대신 성취욕을 자극하는 일에 몰두했다. 음악 등 취미활동과 친교를 통해 고립감과 황폐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특히 친교는 나에게 배려와 겸손을 훈련시켰다. 마지막으로 신앙의 힘도 큰 도움이 됐다.

*********

홀로서기 성장통을 겪은 그는 지금 만62세다. 지난 시간 중 가장 찬란했던 시절이 언제냐는 질문에 지금 이 순간이라고 답했다. 그리고 아직 찬란하고 행복한 시절이 더 남아 있다고 했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도 많다고 했다. 꾸준히 글을 쓰면서 사회에 좋은 반향을 일으키고 싶고, 인터넷 미디어를 만들어 마음치유 명상에 대한 콘텐츠 제작도 구상 중이라고 했다.

왁자지껄 손님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면서 한남동의 저녁시간도 달음질 치고 있었다. 주전자 속 술도 잦아들 무렵 그가 나에게 물었다. 인생살이에 가장 중요한 덕목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나는 배려라고 답했고, 그 역시 공감했다.

“배려와 겸손은 함께 간다. 한때 교만했던 나는 홀로서기를 통해 겸손을 배우고, 배려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어려운 시절을 겪고 나니 힘들게 사는 분들에 대해 말 한마디라도 조심했고, 작은 일이라도 손을 보태고 싶어졌다. 나의 작은 관심이 상대방에게 힘이 되고 결국 나에게 되돌아온다는 지혜를 체득하게 됐다. 배려와 겸손은 내 인생을 잘 이끌어줄 이륜마차이다”라면서.

때는 가을을 넘어 겨울 문턱에 다다랐지만 그와의 저녁 술자리는 사월이었다. 남산 산책로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제비꽃의 은은한 향기로 가득한 봄날이었다. 그의 마음이 ‘겸양, 겸손, 가인’의 꽃말을 지닌 제비꽃 꽃술과 닮아 있다고 생각하면서 첫 순례를 마쳤다. 가을 밤하늘이 온통 짙은 보랏빛이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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