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기의 밑줄긋기 11] 박항서 “고개 숙이지 마라. 우리는 베트남 축구 전설이다”

박명기 기자
  • 입력 2018.12.03 11:14
  • 수정 2019.03.26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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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숙이지 마라.

우리는 최선을 다했고, 준우승했지만 너희는 충분히 자격이 있다.

우리는 베트남 축구 전설이다.

- 박항서 베트남 축구대표 감독

베트남의 ‘국민영웅’으로 떠오른 박항서 감독 / 사진=KBS 뉴스 캡처
베트남의 ‘국민영웅’으로 떠오른 박항서 감독 / 사진=KBS 뉴스 캡처

중국 게임사 ‘로코조이’가 생각난다. 2015년 11월, 취재차 베이징을 찾았다. 당시 뜨고 있는 게임 ‘MT탱커’로 유명한 로코조이를 비롯한 ‘도탑전기’의 룽투게임즈도 둘러봤다.

당시만 해도 한국 게임이 중국에 비해 한참 앞서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중국이 모바일게임에서 새 강자로 치고 올라오는 중이었다. 두 회사에는 수백 명이 넘는 고학력 개발자들이 모여들었다. 앞 다퉈 한국 게임사들의 장점을 딴 새 문화를 도입했다.

현장에서 중국 게임사를 속속 들여다보면서 몇 가지 생각이 급습했다. “어, 실력을 갖춘 추적자가 소리소문없이 턱밑까지 쫒아왔구나.” 추격이 머지않다는 느낌은 몇 년 안에 ‘한국을 추월하는’ 현실이 되었다.

두 회사와 가까운 왕징 SOHO센터에 있는 한국 게임사 게임빌의 김동균 중국지사장(현 게임빌 본부장)도 만났다. 그는 한국 게임사 엔씨소프트의 온라인게임 ‘리니지2’ 서비스를 위해 상하이로 건너와 약 5년 7개월을 근무한 바 있는 ‘중국통’이었다.

그와 대화를 하다 인상적인 단어를 듣게 되었다. 쉽게 잊히지 않았다. 바로 ‘입향수속(入鄕隨俗)’이었다. 중국어로는 ‘루샹쑤이쑤(ru-xiang-sui-su)’로 읽는다. ‘어느 마을에 가면 그 마을 풍속을 따르라’는 뜻이다. 중국 시장 진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지화’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니까 ‘루샹쑤이쑤’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중국 버전이었다.

베이징 IT특구 왕징 SOHO센터 / 사진=박명기
베이징 IT특구 왕징 SOHO센터 / 사진=박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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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에서 핫한 키워드 중 하나가 베트남이다. 그 중심에는 1월 아시아축구대회(23세 이하) 결승 진출, 8월 열린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4위로 베트남 축구 역사상 최고 성적을 세운 박항서 감독이 있다.

베트남 국민들은 1990년 말 ‘첫사랑’ ‘겨울연가’ ‘모래시계’ ‘대장금’ 등 한국 드라마에서 시작해, 화장품, 한식 그리고 K-POP 등 ‘한류’에 매료되었다. 여기에 박항서 감독이 가세했다.

박 감독은 아시아축구대회에서 준우승한 이후 ‘베트남 국민영웅’이 되었다. 그는 대회 이후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개 숙이지 마라. 우리는 최선을 다했고, 준우승했지만 너희는 충분히 자격이 있다. 우리는 베트남 축구 전설이다.”

현재 그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 ‘월드컵 4강 신화’를 쓴 히딩크로 비유해 ‘쌀딩크(베트남 주산물 쌀과 히딩크 감독 합성어)’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베트남 3급 노동훈장을 받았고, 호칭도 ‘선생님’ ‘오빠’로 바뀌었다. 사인볼은 10억 원에 팔리기도 했다.

박항서 감독은 ‘파파 리더십’으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너를 믿고 있다” “잘해낼 수 있다”고 선수들을 보듬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베트남 국민은 단결심, 자존심, 영리함, 불굴의 투지라는 4가지 장점이 있다. 여기에다 내가 발견한 ‘목표의식’으로 베트남 정신을 완성했다”고 말했다.

야구도 농구도 없는 베트남에서는 축구가 국민 스포츠이자 국기다. 20년간 매년 감독을 교체한 베트남 축구에서 그는 단 반년 만에 ‘기적’을 일궈냈다. 그리고 62세로 환갑을 넘긴 그는 선수 발을 직접 마사지해주는 ‘파파 리더십’으로 베트남을 감동시켰다.

그의 덕분에 한국의 인기도 덩달아 치솟았다. 인터넷에서는 “박항서의 나라에서 왔다”는 것만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온 경험담이 넘친다. 그는 단순히 감독이 아니라 누구도 못해낸 민간 외교관이 되었다.

박항서의 선수 격려 장면 ““고개 숙이지 마라.” / 사진=KBS 뉴스 캡처
박항서의 선수 격려 장면 ““고개 숙이지 마라.” / 사진=KBS 뉴스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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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신남방경제실 선임연구위원은 “한 나라가 1인당 GNP 3000달러(약 336만 6000원)가 넘어서면 사회에 대한 불만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고 말한다. 이어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에 소위 이 ‘위험한 시기’가 시작되는 즈음, 축구로 사회통합에 큰 기여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베트남이 한국과 수교를 한 것은 1992년, 이제 베트남은 중국-미국에 이어 한국 제3교역국이다. 인구 9300만 명, 평균 연령 29.9세, 매년 5% 경제성장률, 2020년 전체 인구 40%가 중산층이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롱베이가 배경으로 펼쳐진 영화 ‘인도차이나’는 베트남과 프랑스가 아픈 과거를 씻어내고 마음을 여는 이야기다. 프랑스인 주인공 카트린 드뇌브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고 믿는 것, 남자와 여자, 산과 들, 인간과 신, 인도차이나와 프랑스다.”

한국도 베트남과 서로 총부리를 겨눈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이제 ‘마음을 열고’ 정치-경제-문화 등 각 분야에서 급속히 친해지고 있다. 특히 경제 분야에 있어 한국은 오랫동안 큰 기여를 해왔다. 더욱이 ‘박항서 매직’ 덕분에 한국 제품은 ‘홈쇼핑’에서 완판 행진이다.

현재 베트남에 진출한 외국 기업은 2만 8000개, 그 중 한국 기업이 6000개다(산업통상부의 2017년 자료). 한국 기업에 고용된 인원만 100만 명에 육박한다.

한국은 베트남 투자 1위국이기도 하다. 1995년 대우가 10억 달러(약 1조 1220억 원), 최근 삼성전자와 LG는 50억 달러(약 5조 6100억 원)를 투자했다. 삼성-LG는 전체 베트남 수출의 25%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지만 ‘현지화’에 꼭 유념해야 할 것도 있다. 권율 연구위원은 “베트남 사람들은 평등의식이 강하다. 언젠가 한번 베트남의 장관 차를 탄 적이 있다. 그런데 장관이 차에서 내려서 수위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입사 동기라고 소개해줬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어려운 일이었다”고 소개했다.

베트남은 유교 문화로 인해 체면과 인간관계를 중시한다. 유별나게 자존심이 강하다. 특히 공개된 자리에서 폭언이나 폭행은 모욕감을 느낀다. 차별적인 언어와 행동도 금물이다. 박항서 감독도 선수들이 고칠 것이 있으면 전체 앞에서 망신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책 세계를 읽다 ‘베트남’ 표지 / 사진=박명기
책 세계를 읽다 ‘베트남’ 표지 / 사진=박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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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는 ‘차문화’로 유명한 중국에 141개 도시에서 3300여 개의 매장을 갖고 있다. 19년간 ‘입향수속 전략’을 공들인 결과다. 최근 상하이에 축구장 3분의 1 크기만 한 세계 최대 매장을 열었다. 이는 중국 기질을 잘 파악하고 마음을 얻어내는 탁월한 전략이다.

‘루샹쑤이쑤’, 글로벌 시장에 진출할 때 잊으면 안 될 말이다. 베트남은 프랑스-미국-중국 등 ‘강대국과의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강하다. 이것을 건드리면 절대 금물이라고 한다. 베트남 전쟁을 담당한 맥나마라 장관은 회고록에 패전과 관련해 이렇게 썼다.

“적과 아군 모두에 대한 우리의 오판에서, 그 지역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와 정치, 그리고 그곳 지도자들의 성격과 습관에 대한 우리의 심각한 무지가 드러났다.” -로버트 맥나마라 베트남전 당시 미국 국방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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