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주의 신중년 요즘세상 31] 연탄(2)

오은주 기자
  • 입력 2019.12.09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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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심리학과 졸업 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늪' '저녁 산행' 추천완료 등단소설집 [달의 이빨] [하루 이야기] [잠든 정원으로부터] 출간2011년 한국소설작가상 수상현재, 한국문화콘텐츠 21 운영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195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심리학과 졸업
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늪'
'저녁 산행' 추천완료 등단
소설집 [달의 이빨]
[하루 이야기]
[잠든 정원으로부터] 출간
2011년 한국소설작가상 수상
현재, 한국문화콘텐츠21 운영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윤자씨네 집에 86세의 시어머니가 오셨다. 겨울이 되자 추운 시골집에 계시는 것보다 따뜻한 아파트가 지내기 낫다며 아들, 즉 윤자씨의 남편이 모시고 왔다. 60살이 넘자 윤자씨도 이젠 그 불편하던 시어머니가 임의롭고, 그냥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서 노환으로 몸이 불편한 여인, 그래서 돌봐주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자동차 부품 제조업을 하면서 제법 사업을 잘 꾸려가는 남편 덕에 윤자씨는 돈걱정을 크게 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 요즘이 좋았다. 큰딸이 결혼을 해서 마침 빈 방도 있는 터라 시어머니가 한겨울 동안 와 계신다고 해도 그리 불편할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어제 도착한 시어머니가 자꾸 윤자씨 눈치를 보더니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애미야, 내가 너한테 사과할 일이 있어. 이렇게 추운 겨울이 되고 아랫목이 필요없는 따뜻한 아파트에 와보니까 새삼 생각이 난단다. 전에도 생각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얘기를 못하고 지나왔어.”

윤자씨는 새삼 사과라는 어려운 말까지 써가며 시어머니가 어렵사리 운을 떼야 할 무슨 큰일이 있었나 싶었다.

“너랑 애비랑 사업 한 번 부도나고 시골집에 와 있은 적 있잖니?”

그랬었다. 벌써 20여년 전 추운 겨울이었다. 보따리를 싸들고 초라한 시골집에 도착했을 때 그 허허로운 심정은 잎새가 다 떨어져나간 겨울나무 가지처럼 스산했다.

“그때 네가 우리집 초겨울 배추밭 다 정리해서 걷어 들여서 김장도 했었지. 아무리 부모님 집이라도 군식구로 있는 게 미안하다고 맨날 밭일에다 집안일까지 했었지.

이맘때쯤 네가 마당에서 김장을 하고 꽁꽁 언 몸으로 저녁에 방에 들어 왔었잖니. 

그때 애비는 부도난 공장 다시 일으켜본다고 서울서 동분서주하다가 낙심한 표정으로 들어오더구나.

우리집이라고 방마다 넉넉히 연탄을 땔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던지라 나도 모르게 애비를 아랫목에 앉혀서 밥을 먹으라고 했어.”

윤자씨도 아, 그날 저녁! 하며 기억이 떠올랐다. 백포기가 넘는 배추를 드럼통에다 절이고 씻고 속을 버무려 넣고 나니 냉기가 몸의 마디마디마다 파고들었다. 남편이 온 것은 알았지만 김장 마무리일로 저녁밥은 시어머니에게 맡긴 터였다. 연탄을 때서 뜨거운 아랫목에 들어가 한숨 자고 나면 몸이 풀릴 것 같아 얼른 방안으로 들어갔는데 아랫목을 차지한 남편과 시어머니는 꿈뻑거리며 쳐다보기만 할 뿐 꿈쩍을 안 하는 게 아닌가! 물론 비집고 들어가면 한 몸 녹일 수야 있겠지만 연탄 구들이라 아랫목만 겨우 따뜻했지 바로 옆도 냉기가 돌아 몸을 녹일 수가 없었다.

“그때 네가 막 울면서 말했지. 어머니, 추운 데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은 저예요.”

그랬었다. 미련스럽게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밥을 먹고 있는 남편이나 아들밖에 몰랐던 시어머니가 밉기도 하고, 이건 아니다 싶어 윤자씨는 소리를 질렀다.

“연탄 한 장 더 때서 온방을 따뜻하게 하면 될 것을 맨날 아낀다고 궁상맞게 살았는지 모르겠어. 미안하다. 그때는 왜 그리 속 좁은 시애미였는지…… 애미야, 난 요즘 세상이 좋다. 이렇게 온 집안이 따뜻한 요즘 세상이 좋아.”

윤자씨는 시어머니가 요즘 세상을 좋아하는 건지, 요즘 아파트를 좋아하는 건지 모르지만 이 겨울 밤새 연탄 갈 걱정 없이 따뜻하게 잘 지내다 가시라고 웃으며 말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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