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 라이프⑩] 커피 카페

김경 기자
  • 입력 2019.12.09 13:26
  • 수정 2019.12.09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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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김경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
[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깊은 밤입니다. 커튼을 길게 내린 하루가 문마저 닫으려는 이 시간, 벌써 잠자리에 든 건 아니신지요. 저는 아직 말똥말똥합니다. 저는 요즘 잠자리를 회피하는 데에, 아니 잠자리에 반항하는 데에 부쩍 재미가 붙었습니다. 엊그제 둥근 보름달을 눈에 담은 후유증인 것도 같은데, 모를 일입니다. 꽉 찬 달과 마주하면서 왜 저는 뜬금없이 텅 빈 제 가슴을 보았을까요. 그때처럼 고적감이 밀물처럼 밀려듭니다.

아무래도 오늘밤, 선배를 붙들고 소소한 얘기라도 조잘거려야 할까 봅니다. 해가 노니는 낮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커피부터 대령해놓고 눈을 마주쳤겠지요. 물론 커피는 각자 취향을 좇아서. 커피를 떠올리다 보니 문득 초대장이 생각납니다. 모처럼 선배에게 건네줄 초대장을 제가 며칠 전부터 보관하고 있거든요. 커피마니아인 선배를 위한 나름 특별한 선물입니다. 언젠가 선배가 유난히 진지한 표정으로 들려준 말이 새삼 기억나네요.

인간이나 사물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신실하려면 겉과 속이 똑같아야 해.

바로 이 초대장이 그에 합당하다고 은근슬쩍 자부해 봅니다.

선배, 그냥 지금 초대장을 펼쳐보는 건 어떤가요? 제 마음대로 하라구요? 제가 하는 짓이 늘 이렇습니다. 선배의 넉넉한 마음씀씀이가 꼭 저의 자유분방함으로 연결된다니까요. 초대장을 펼칩니다. 타이틀은 감색 고딕체로 쓰인 ‘참 좋은 커피 카페’이고, 그 아래에 자주색 문장이 나옵니다. ‘멋스러운 분위기, 최고의 맛, 편안한 마음’입니다. 평범한 낱말들에 왠지 정감이 가지 않습니까?

우리,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보지요. 묘미가 괜찮은데요? 지금은 오후 2시, 본격적으로 커피 향을 흡입할 수 있는 맞춤 시간입니다. 지난번 광화문 카페에서 선배가 커피 이야기를 마구 쏟아냈지요. 전국을 통틀어 스페셜티 커피가 나오는 곳이 50여 군데라고 했던가요? 미국 스페셜티 커피협회 평가에서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을 얻어야 스페셜티 커피로 등록된다면서요. 우리는 그 명소들을 상상하면서 마음이 들뜨다 못해 정작 커피가 식은 줄도 몰랐지요. 오늘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현실감이 넘치는 제 초대장을 들고 사뿐사뿐 발을 옮기지요. 스페셜티 커피가 살아 숨 쉬는 대망의 카페를 향해 가시지요.

와우, 선배와 저는 동시에 환호성을 지릅니다. 카페 외관에서부터 기가 팍 죽습니다. 아니 출렁이는 파도처럼 심장이 요동을 합니다. 예스러운 한옥과 주변 경관이라니. 우선 시원스레 툭 터진 공간, 아기자기한 돌들과 화초들의 조화, 그리고 붉게 타는 당단풍과 아기단풍의 화려한 비상. 작년 이맘때, 선배가 멋스럽게 목에 두른 옅은 커피색 스카프가 떠오릅니다. 이 계절을 상징하는 스카프이기 전에, 선배만을 위해 탄생한 스카프라고 제가 추켜세웠지요? 어쩜, 이 카페의 이미지에 딱 부합하는 스카프네요. 어쨌든 커피 카페치곤 낯선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이제 우리는 육중한 나무문을 밀고 카페에 발을 담급니다. 헌데 선배, 뭐가 잘못됐을까요? 행여 어느 전시장에 들어온 건 아닌가요? 눈이 부십니다. 벽면이 온통 수채화 천지라서…… 은은하고 고아한 파스텔 톤의 풍경화와 정물화들……. 흘낏 본 선배의 얼굴에 화사한 봄볕 같은 웃음기가 번져납니다. 선배도 나 못지않게 전시회 나들이를 최고의 외출로 꼽는다면서요? 가슴이 두근두근, 예상보다 더 깊고 우아한 커피 맛이 기대됩니다.

선배, 그만 그림에서 벗어나지요. 일단 자리에 앉아 살짝 볶는 약배전으로, 과일처럼 새콤달콤한 커피 맛을 실컷 즐기자구요. 이 카페는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코스타리카 등 주로 중남미의 농장들과 다이렉트로 트레이드를 한다는군요. 더불어 클린컵을 강조하고, 수준급 품질의 빵도 준비되어 있답니다. 이곳 최고의 커피는 엘살바도르 킬리만자로 농장의 'SL28' 품종입니다. 저는 몰라도 아마 선배는 ‘SL28' 커피에서 분명히 포도와 흡사한 맛과 향을 느낄 겁니다. 선배의 미각은 자타공인 최상 1등급이니까요.

이제 잠자기는 글렀다구요? 잠을 놓치긴 했으나 의외로 이 시간이 꿀잠보다 더 달콤할 것 같은데……. 한 장소에서 같은 생각에 빠진 경험이 우리, 한두 번이 아니잖아요? 약간 지루하다구요? 그래요. 일단 이야기 방향을 틀어보겠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부드러운 거품 위에 점점이 흩뿌려진 계피 가루. 계피 가루는 카푸치노의 꽃이었다.’ 제 소설 속의 문장입니다. 커피의 종류가 얼마나 각양각색인지요. 선배가 알고 있듯 저는 늘 카푸치노만 입에 달고 살지요. 선배는 아메리카노와 카페라테 쪽을 선호하구요. 당연히 내 소설의 인물들은 무조건 카푸치노를 주문하고, 선배 소설의 인물들은 주로 카페라테를 선택하고, 맞지요?

선배를 만나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저만치 아련하게 잠든 이십 대를 한번 깨워봅니다. 70년대의 찻집 메뉴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간단명료했지요. 커피도 그저 ‘커피’라는 단일 품목이었어요. 지금처럼 국민 음료도 아니고, 단지 서양차로써 전통차들 틈바구니에서 전통차에 대적하려는 품세였지요. 또한 우유나 오렌지주스보다는 한 차원 높은 위상으로 자리매김 되어 특히 청춘남녀들에게 인기였지요. 하지만 저는 습관적으로 커피를 외면했어요. 아니 기피했지요.

일찍이 절집 생활을 한 선친은 이른 새벽마다 어머니와 마주앉아 녹차를 우려내면서 하루를 열었습니다. 우리 형제들도 간간이 찻잔을 받아들고 별 생각 없이 입 안을 헹구곤 했어요.

요즘은 다들 커피니 뭐니 하지만, 우리 차가 좋은 것이다. 특히 녹차는 머리를 맑게 해주니, 마음을 가다듬고 음미해 봐라.

그리운 선친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네요. 녹차의 맛과 향은 매번 무덤덤하고 밍근했으나 왠지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은 들었지요. 종지만한 앙증맞은 녹차 잔은 또 얼마나 예쁘던지, 빈 잔을 한참동안 손에서 놓지 않기도 했어요. 아, 가끔 커피가 선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이면 두 언니들이 유리컵에 자잘한 얼음알갱이가 반짝이는 냉커피를 후루룩거리며 땀을 훔치곤 했지요. 참 생경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제가 커피에 발목을 꽉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요로 결석을 앓은 뒤, 의사의 조언 때문입니다. 재발 방지 차원으로, 잊지 말고 하루에 2잔씩, 커피가 약입니다. 결석이 유발하는 끔찍한 통증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요. 저의 커피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어느새 시계바늘이 자정을 훌쩍 넘기고 새벽 한 시로 접어드네요. 정말 소소한 얘기가 길어졌습니다.

선배, 불현듯 한 생각이 뇌리를 스칩니다. 제가 끄집어 낸 초대장 말입니다. 그 세부내용을 살짝 바꿔야겠습니다. 아니 초대장을 선배에게 보내지 않겠습니다. 이제 막,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카페를 발견했지 뭡니까. 자화자찬일지라도 소개하겠습니다. 한 점 꾸밈없이 무구한, 그저 마음으로 운영하는 카페입니다. 아, 음악은 있군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멘델스존……. 그리고 진한 커피 향이 밴 우리의 소중한 인연과 사랑이 깔려 있습니다. 재료는 커피콩, 우유, 계피가루, 설탕뿐입니다.

선배, 정식으로 초대합니다. 커피 제조는 초대 받은 선배의 재량에 달려 있습니다. 참, 카페의 특성도 공개하겠습니다. 문은 여닫는 손잡이가 없는, 아니 ‘문’이라는 실체가 없는 개방적인 문입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마음만 내키면 자유롭게 오십시오.

아랍권에 이런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손님이 오지 않는 집은 천사도 오지 않는다. 선배의 발걸음에 천사를 꿈꾸어도 괜찮겠지요? 우리 집 주소를 카톡에 올리겠습니다.

슬슬 눈꺼풀이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편히 주무십시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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