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 라이프⑪] 영원한 잠에 든 관세음

김경 기자
  • 입력 2019.12.27 20:10
  • 수정 2020.01.02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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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김경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 [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영월 창령사터의 오백나한이 서울 나들이를 왔다. 오래 전 폐사된 절터에서 발굴됐기에 역사적 종교적 배경은 뚜렷하지 않지만, 그 존재감은 뭇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이미 지난해 춘천 국립박물관 특별전에서 대단한 호응을 보였다.

나한은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불교의 성자로, 성과 속의 경계에 머물면서 우리와 함께 하는 인간이다. 즉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위대한 성자의 모습을 지닌 인간이 나한이다. <증일아함경>에서는 부처 입멸 뒤에 부처의 말씀을 경전으로 편찬하기 위해 모인, 가섭을 비롯한 500명의 제자들을 오백나한이라고 일컬었다. 이것이 오백나한의 출발점이다.

나는 저만치 보이는 전시장을 향해 잰걸음을 놀린다. 전시장 입구에서 나한상 사진 한 점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미소를 띤 넉넉한 표정이 일품이다. 햇빛 아래, 잔잔한 물결이 반짝이는 드넓은 바다가 연상된다.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그 모습에 왠지 친근감이 든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자주 스치고 만났던 다정한 이웃의 모습이다. 더없는 순박함에서 포근함이 우러난다. 한 가닥의 미소가 나한상을 대변해 주고 있다. 사진을 뒤로 하고 전시실로 발을 옮긴다.

뜻밖에도 난데없는 어둠이 시야를 차단한다. 나한상 서른두 점이 전시된 방의 초입에서 나는 잠시 머뭇거린다. 눈을 깜박이면서 더듬더듬 안으로 들어가니, 동이 터오듯 서서히 시야가 트이기 시작한다. 캄캄한 사방 벽면 쪽에서 은은한 조명이 흘러나온다. 어둠의 장막이 살포시 걷혀나고 나한상들이 하나씩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나한상 이외에는 그 어떤 물상도 없고 개미소리만 한 음향 한 점도 들리지 않는다. 깊은 산사에라도 들어선 것인가. 고요하다 못해 적막감이 감돈다. 나는 그 분위기에 젖은 채 가만가만 나한상 앞으로 다가간다. 아뿔사, 그만 자리를 이동하는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치고 만다. 상대방과 나는 서로 어색한 미소를 주고받는다. 그러고 보니 실내는 관람객들로 꽉 차 있다. 장삼 차림의 승려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분주히 사진 촬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슬며시 휴대폰을 꺼낸다.

나한상 한 점 한 점에 주목한다. 얼핏 보면 모두가 같아 보이는데, 실제로는 제각각 다른 풍모와 표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전형적인 불상이나 보살상과는 다른, 세속화된 이미지의 바탕이 금세 느껴진다. 다듬지 않은, 한낱 투박한 돌덩어리이기에 더없이 소박하고 친근한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나한상 안에 담긴, 여과되지 않은 갖가지 표정들이 압권이다. 누구나 일상에서 지을 수 있는 미소, 사색, 고뇌, 쓸쓸함 등의 표정. 일부러 더하거나 덜어내지 않은 순수 그 자체다. 어디 그뿐인가. 외양도 전혀 인위적인 꾸밈이 없어 지극히 자연스럽고 또 서민적이다. 아무렇게나 머리 위까지 가사를 뒤집어쓰기도 하고 두건도 쓰고 있다. 자세도 자유자재로 전혀 구속감이나 긴장감이 엿보이지 않는다. 해탈에 이른 나한들이 이렇듯 우리와 같이 속세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 덕에 우리 관람객들은 더할 나위 없는 행운아가 되었다. 구도인의 삶을 바로 곁에서 스스럼없이 지켜볼 수 있다니, 그 얼마나 행복한가.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이라는 제목에 자꾸 시선이 간다. 제목 아래 즐비하게 늘어선 나한들의 표정 역시 가지각색이지만, 느낌은 비슷하다.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감정인 희로애락이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거리낌 없이 스스로의 마음을 그대로 선사하고 있다고나 할까. 나는 나한들이 내뿜는 희로애락을 표정을 따라가면서 생각에 잠긴다. 과연 나는 내 마음을, 내 감정을 아무런 사심 없이 진솔하게 타인과 나누어가질 수 있을까. 저처럼 순순하게 선보일 수 있는가.

 

사진= 김경 기자
사진= 김경 기자

나는 가사를 뒤집어 쓴 나한상 앞에서 나도 모르게 발을 모으고 선다. 눈과 귀, 입술, 아니 얼굴 전체에서 무엇이라고 형용하기 힘든 미소가 풍겨난다. 장미처럼 화사하지는 않지만, 뭉글뭉글 피어나는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는 것 같다. 아니다. 겨우내 얼어붙은 대지 위에 따스하고 보드라운 봄볕이 펼쳐진 것 같다. 시나브로 온몸에 온기가 차오른다. 나는 그만 가슴이 뜨거워진다. 아, 어머니…. 어머니의 사십구재를 치른 지 오늘이 보름째다.

선친은 일찍이 어머니를 관세음보살이라고 했다. 직접 말씀하지는 않았으나 ‘잠자는 관세음’이라는 수필을 통해 당신의 마음을 전했다.

1남 6녀를 위해서 아니 늙어가는 날 위해서 고난을 벌꿀 물처럼 달게 마시는, 나의 자식들의 고난을 덜어주는 그녀가 어찌 관세음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염주를 돌리면서 관세음보살을 외우면서 몇 걸음 서성거려 본다. 동쪽 벽에 걸려 있는 관세음보살상과 누워서 곤히 잠든 아내의 얼굴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되어간다. 나는 남순동자란 말인가.

나는 선친의 마음이 진실임을 안다. 내 기억 속의 어머니, 어머니의 트레이드마크는 한결같이 유순하고 푸근한 눈매였다. 내 유년기에는 물론 결혼 전이나 후에도 마찬가지다. 평생 온화한 표정을 저버리지 않았던 어머니는 그 고운 미소로 자식들을 가르치고 타인을 배려했다. 소리 없는 미소가 어머니의 무한한 힘이었다. 왜 찡그리거나 냉정한 표정도 없었을까만, 그런 편의 기억은 도무지 그려지지가 않는다. 기억의 편애일는지도 모르겠으나 어머니의 평생은 오로지 미소로 일관되어왔다. 치매를 앓는 중에도 어찌 그 미소만은 잊지 않고 꼭꼭 내보이는지 놀라웠다. 또한 미소와 함께 평소에 즐겨하던 말도 입버릇처럼 구사하곤 했다. 잘했다, 고맙다, 덕분이다, 좋다, 예쁘다, 반갑다, 맛있다 등등. 어머니는 늘 칭도하고 완언하는 말을 좋아했다. 어머니의 트레이드마크인 미소와 말은 치매도 어쩌지 못한 부분이었다.

사진=김경 기자
사진=김경 기자

누구나 꿈을 꾸는 것처럼 나도 꿈을 가졌다. 언제나 하뭇하고 평탄한 길을 걷기를 바랐다. 하지만 삶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반드시 힘든 길을 지나야만 꽃길을 맞이할 수 있다는 듯 울퉁불퉁했다. 절망과 분노, 슬픔과 괴로움…. 삶이 버거울 때마다 나는 언제나 어머니의 미소를 떠올렸다. 어머니의 미소만 만나면 어느새 내 마음은 훈훈해졌다. 어머니의 미소는 모든 역경을 물리치고 녹여주는 신비한 요술 방망이었다. 나는 알고 있다. 비록 어머니는 가셨지만, 그 미소가 영원히 내 삶을 지켜 주는 버팀목이라는 것을.

나한상과 작별하고 전시실을 나온다. 문득 아들 녀석이 생각난다. 과연 나는 녀석에게 어떤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려나. 슬며시 어머니에 대한 내 생각과 나에 대한 녀석의 생각이 같을 것이라는 꿈을 꾸어본다. 가당치도 않은 욕심이다. 나한의 미소가 어머니의 미소와 덤으로 내 욕심까지 보여주었다. 그만 얼굴이 화끈거린다.

 

사진=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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