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식의 인생 바라보기⑮] 소판돈(蘇判豚)씨의 동전탐색 분투기

윤창식칼럼리스트
  • 입력 2020.01.20 14:02
  • 수정 2020.01.20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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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식<br>- 수필가<br>- 초당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br>​​​​​​​-<br>
▴윤창식
- 수필가
- 초당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
- 문학과환경학회 회장 역임

소판돈씨(67세)는 77년도 한정판으로 발행된 10원짜리 동전이 100만원을 호가한다는 뉴스를 접한 후, 도무지 마음이 잡히지 않고 꽁무니에 성냥불이라도 붙은 망아지처럼 허둥댔다.

그날도 동사무소 주민센터 노인스포츠댄스 무료강습회에서 사귄 연상의 홍싸리(洪舍利) 여사와의 약속도 까맣게 잊어먹고 동전을 찾느라고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소판돈씨는 본래 여린 심성을 타고나 시골에 살 때도 달구새끼(병아리) 한 마리 제 손으로 잡지 못한 위인이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그는 돈의 망령에 홀려도 단단히 홀려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나와서 구들장 방구석에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나뒹굴던 돼지저금통 배때기부터 냅다 가르는 것이었다. 무지막지한 단칼로 통돼지가 맥없이 스러지자 푸르스름하게 곰팡이가 서린 엽전들이 중생대 삼엽충 내장처럼 방바닥에 널브러졌다.

평생을 요 모양 요 꼴로 살아왔다만, 누구한테 못할 짓 한 번 안하고 여기까지 왔으니 조상님도 부처님도 예수님도 사람이라면 이 가련한 중늙은이를 내치지는 않으리라. 스스로 다짐하는 판돈씨의 효성과 합장과 기도가 참으로 절절하였다.

소판돈씨는, 가슴이 너무 떨려 합격자 명단을 가까이서 확인하지 못하고 먼발치서 자기 이름을 가늠해보는 수험생처럼, 방바닥에 쏟아진 동전 앞에 바로 눈길을 주지 못한 채 숨을 깊게 한 번 들이마시며 호기스럽게 외쳤다.

"77은 뼁끼칠이다. 작껏!"

전혀 앞뒤가 맞지도 않은 말을 거침없이 내뱉은 것은 순전히 100만원이라는 숫자가 그의 뇌세포를 혼란에 빠트린 결과였을 것이다.

소판돈씨는 도시로 나와 나무도장 파는 일로 목구멍 풀칠을 했다 만은, 그놈의 컴퓨터가 웬수지, 어느새 자필 싸인이 인감도장으로 둔갑했으니 별 도리가 있겠는가.

그래도 궁즉통(窮卽通)이라 하지 않던가. 다시 한 번 소판돈씨는 스스로 다짐을 하며 구렁이알처럼 소중하기 짝이 없는 쇠붙이동전에게 60년 넘게 묵은 손길을 내밀며 주문(呪文)을 걸기 시작한다.

"그동안 지가요, 당신을 업수이여긴 것은 결코 아니었으니 무심타 타박하지 마시고요, 제발 마음을 넓게 여시고 제 눈앞에 투-쎄븐 77이 현현하는 기적을 보여주시라요."

소판돈씨는 순간순간 당골래(단골 점쟁이)도 되고 보살도 되고 신부님도 되는 멀티 페르소나(multi persona)의 연기자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소판돈씨는 마흔 개 남짓 10원짜리 동전들을, 마치 심산유곡에서 불로초라도 찾는 심정으로 지극정성을 다해 어루만지고 몇 번이고 다시 캐어보느라 한나절이 훌쩍 지나가는 줄도 몰랐다. 이제 해는 서산으로 뉘엿거리고 그놈의 77이 어디로 내뺐는지 절망의 나락이 가물거리는 순간, 구원의 숫자 7이 두 개 포개어져 꼬리를 살짝 말아 올린 한쌍의 꽃배암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판돈씨의 퀭한 망막에 맺히는 것이었다.

"와~~ 77 봤다~~~."

산삼 캐는 심마니의 울림보다 몇 배는 더 우렁찬 '돈마니'의 외침이 최고조의 청각 데시벨로 방안에 울려 퍼졌다.

며칠 후 소판돈씨는 프랑스제 샤넬 손수건에 귀금속이라도 보관하듯, 불면 꺼질세라 동전단지를 가슴에 꼭 껴안고 집을 나섰다. 어렵사리 판로를 통해 알게 된 동전수집가를 간첩 접선하듯 만나러 간 것이다.

"자 그럼 물건부터 봅시다."

"아따 성질도 징하게 급하요잉."

"그 정도 물건은 그다지 귀한 건 아니니까요, 빨리 거래를 끝냅시다."

"뭔 말씀을 그리 섭하게 하시요. 나한테는 참말로 옹골진 동전이라니께요."

"그래요. 물건부터 주시면 바로 100만원 현찰로 드립니다."

동전수집상은 100만원과 함께 한 손에는 큼지막한 돋보기렌즈를 들고 있었다. 이게 무슨 불길한 예감이었을까? 그 돋보기는 소판돈씨의 가슴을 순간 덜컹거리게 했다.

"아니, 이건 72년도 동전 아니에요? 사람을 놀리십니까?"

동전수집상은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그럴리가요? 내 눈에는 분명히 77이었는디?"

"이 양반 가관이시네. 숫자도 몰라요? 마음 같아선 사기죄로 경찰 불러야 겠지만,
그냥 오늘 허비한 경비로다가 7만원만 내놓으시오."

소판돈씨는 벌금조로 7만원과 다방 커피 값까지 합계 77,000원을 내다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사무소 근처에서 노인스포츠댄스 동호회 그 할마시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판돈씨! 워디를 댕겨 오시요? 손잡아 줄 사람이 없어서 허전했구먼요."

소판돈씨는 아무 대꾸 없이 시무룩하게 발밑을 내려다보았고 그때 허기진 늦겨울 찬바람이 한바탕 헛헛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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