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 라이프⑫] 그립다, 겨울

김경 기자
  • 입력 2020.01.29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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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김경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
[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이 계절이 겨울인가? 계절을 망각할 정도로 매일 매일이 포근한데, 오늘 오후는 유난히 더 햇살이 다사롭다. 나는 얇은 패딩 차림을 하고 용마산 데크길로 향한다.

사가정공원에서부터 망우산에 이르는 데크길은 우리 동네의 명소다. 작년 3월 개장한 이래 사랑하는 산책로 1호로 내 가슴속에 등재되었다. 일단 이 길은 울퉁불퉁하고 가파른 등산로에 비해 친절한 지그재그 형태가 재미있고, 발바닥에 올라오는 판판한 나무의 감촉도 좋다. 카펫처럼 보드랍지 않는데도 왠지 카펫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그뿐인가. 더불어 휠체어 바퀴도 마음껏 굴러가고, 귀여운 강아지들도 꼬리를 살랑대며 부지런히 발을 놀린다.

목덜미에 축축한 기운이 올라온다. 무심코 정신없이 걷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목에까지 올라온 지퍼를 끌어내리고 천천히 속도를 늦춰본다.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왜 나는 매번 이 테크길에만 들어서면 걸음이 빨라지는지 모르겠다. 아예 습관이 되어버렸다. 마치 출발선에 섰다가 냅다 달리는 100미터 선수라도 되는 양, 앞사람을 제치면서까지 서둘러 걷는다. 산책이 아니라 숫제 운동이다. 문득 뭔가가 슬그머니 내다보인다. 내 자신이, 내 안에 잠재한 한 조각의 욕심이 눈앞에 오락가락한다. 나도 모르게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서 주위를 휘둘러본다. 다행이다. 내 마음보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것 같다. 걸음마다 마음의 때가 한 풀씩 떨어져나가는 느낌으로 서서히 걷기 시작한다.

반듯하게 서 있는 잣나무들이 왠지 당당해 보인다. 헐벗은 나무들 사이에 잣나무의 초록이파리만 돋보이는 건 아니다. 참나무들이 손끝만 스쳐도 금세 바스러질 듯한 갈색 이파리들을 여태 줄기에 매달고 있다. 나는 제자리에 서서 팔을 뻗어본다. 그런데 웬걸? 의외로 이파리들이 단단히 붙어 있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함부로 이파리를 건드릴 수가 없다. 이파리의 생명력이라니. 아니 생명이 있는 모든 삼라만상에게 잠재한 에너지랄까, 굳건한 의지랄까. 나는 슬며시 이파리에서 손을 떼고 다시 보폭을 만들어간다.

오늘따라 데크길이 한적하다. 서너 차례 좌우로 꺾어가며 오르니 평평한 길이 나온다. 안녕하세요? 맞은편에서 오던 일행 중의 소녀가 깜찍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아홉 살쯤 됨직한, 볼이 발그스레하고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소녀는 노란 털모자를 썼다. 안녕! 나도 유쾌한 목소리로 화답한다. 소녀의 예쁜 뒷모습까지 눈에 담으며 돌아서는데, 큰 둥치의 나무들 사이에서 자잘한 노란색이 아른거린다. 소녀의 노란 모자의 여운일까? 내 눈의 착시인가? 아니다. 꽃, 꽃이다. 노란 개나리가 피었다. 얼핏 봐도 열 송이는 넘어 보인다. 한겨울에 개나리라니. 가슴이 두근두근, 놀라움은 이내 반가움과 정겨움으로 번져난다. 한참을 기웃기웃 바라보다 못해 괜히 코까지 벌름거린다. 상큼한 봄의 향취가 물씬 풍겨난다. 나는 은근히 기대에 못 이겨 반대편 숲으로 고개를 돌린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노란색이 저만치에 점점이 흩뿌려져 있다. 아, 나는 한순간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만다. 그래, 이것은 반역이다. 반란이다.

나 어릴 적 겨울에는 온 세상이 환했다. 하얀 겨울은 가슴이 탁 트이도록 청량하고 말끔했다. 동요나 동시의 한 대목처럼 하얀 솜이 펄펄 날렸다. 손이 꽁꽁 발이 꽁꽁, 쌩쌩 불던 찬바람에 털목도리 틈새로 삐죽 나온 코끝이 얼어붙어도 좋았다. 뽀드득 뽀드득, 발소리가 상쾌하게 귀를 두드리면 어느새 어깨에 날개가 달렸다. 나는 소리 없이 날갯짓을 하며 가뿐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가 사뿐히 내려왔다. 눈밭을 뒹굴다 보면 내가 눈사람인지 눈사람이 나인지 알 수 없었다.

실로 계절이 하수상하다. 한겨울 내내 눈이 보이지 않는다. 겨울답지 않은 겨울을 보내고 있다. 잿빛 하늘, 앙상한 나뭇가지, 텅 빈 화단…… 그럴 듯한 까칠한 겨울 풍광이지만, 진짜 겨울과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지난 가을철이 훨씬 더 을씨년스럽고 으스스했다. 강풍은 나뭇잎을 매몰차게 떨어뜨리고 거리에 선 나는 목을 움츠리고 벌벌 떨었다. 다가올 한파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이 후들거렸다. 그런데 겨울이 와도 겨울이 요원하다. 달력은 겨울인데도 겨울이 아직 오지 않았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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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아프다. 지구가 앓아누웠다.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인 지구의 온난화가 바로 그 증거다. 기후의 변화가 심각하게 대두된 게 벌써 언제부터였던가. 새삼 유엔 보고서가 머리를 친다. 무엇보다도 가축 사육이 지구 온난화의 최대 원인 중의 하나라고 설파했다. 가축이 내뿜는 메탄과 이산화탄소가 전 세계 차량의 배출량보다 그 비중이 높다는 것이다. 10년에서 15년 정도만 채식을 해도 안정적인 평균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는 해결책도 제시했다.

환경 분야의 베스트셀러 <침묵의 봄>을 저술한 나오미 클라인이 떠오른다. 그녀는 저서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에서 기후 문제는 탄소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있다고 주장했다. 기후 변화가 지도자들로부터 총력 대응이 필요한 위기로 대접 받은 일이 없다며 시민들의 대중 운동 필요성을 강조했다. 여성 운동, 흑인 민권 등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자 지도층들에서 그것을 위기로 받아들였듯, 기후의 위기도 마찬가지라는 거였다. 정치권은 마지못해서라도 이에 필요한 자원을 찾을 테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위협이 된다면 자유시장 원칙을 조정해서라도 기민한 대응에 나설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2016년 비영리단체들이 선정한 ‘기후 악당 4개국’에 우리나라가 포함되어 있다. 나머지 세 나라는 호주, 뉴질랜드 사우디아라비아다. 이 네 나라는 그 어느 나라보다도 특별한 각오와 노력이 필요하다. 최근에 이슈가 된 호주의 대형 산불은 사실 2019년 9월부터 시작되었다. 붉게 물든 호주, 그 원인은 명백히 기후 변화였다. 기록적인 고온과 가뭄이 산불의 주범이었다. 그 주범의 주범은 물론 인간이다.

‘우리 집이 불타고 있어요.’ 스웨덴의 17세 소녀 그레타 툰베리의 절절한 외침이 오늘따라 더 귀에 쟁쟁하다. 지구가 불타고 있다. 불타는 지구를 과연 누가 구해줄 것인가.

나는 데크길 끝까지 이르지 못하고 돌아선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거북이걸음을 하다 보니 시간이 꽤 지체되었다. 저만치 개나리가 또 눈에 띈다. 귀여운 노란 병아리가 연상되는 데도 왠지 개나리가 슬퍼 보인다. 열대과일인 바나나, 파파야, 레드향 귤 등의 우리나라 재배도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내가 너무 옴니암니 따진다 해도 할 수 없다.

함박눈이 밤새 내리고, 살을 에는 듯한 북풍이 몰아치는 겨울이 그립다. 영하의 기온이 두려워 현관문 안에서 주춤거리는 꿈을 꿔본다. 동장군 겨울이 가고 진눈깨비도 한바탕 내리고 나면 노란 봄이 현관문을 두드릴 터다. 개나리가 한껏 만발하고 산수유가 수줍게 꽃망울을 터뜨리는 봄, 봄이다. 나는 나만의 미소를 머금으며 또 다른 꿈을 꾼다. 꿈은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이루어지는 데에 그 묘미가 숨어있다. 나는 이제 그 묘미마저 꿈꾼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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