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주의 신중년 요즘세상 36] 마이 네임 이즈 “경순 김”
[오은주의 신중년 요즘세상 36] 마이 네임 이즈 “경순 김”
  • 오은주 기자
  • 승인 2020.02.1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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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심리학과 졸업 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늪' '저녁 산행' 추천완료 등단소설집  [달의 이빨] [하루 이야기] [잠든 정원으로부터] 출간2011년 한국소설작가상 수상현재, 한국문화콘텐츠 21 운영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늪'
'저녁 산행' 추천완료 등단
소설집 [달의 이빨]
[하루 이야기]
[잠든 정원으로부터] 출간
2011년 한국소설작가상수상
2019년 조연현문학상 수상
한국문화콘텐츠21 운영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경순씨는 아침상을 치우자마자 영어 학습지를 들고 냉큼 식탁에 앉았다. 벌써 9시라 선생님이 올 시간이 2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경순씨는 어젯밤에 외우다가 그만 잠들어버려 다 외우지 못한 단어들을 밑줄을 쳐가며 외우기 시작했다. 지난 시간에는 식품과 음식 단어들을 배웠고, 오늘은 거리의 간판에 흔히 쓰이는 단어들을 배울 차례였다.

경순씨는 석 달 전부터 1주일에 한 차례씩 방문해서 영어를 가르치는 성인 대상 영어학습지 공부를 시작했다. 경순씨의 오랜 부끄러움이자 숨겨둔 열망인 영어습득의 기회를 마련해준 건 결혼해서 근처에 살고 있는 딸이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남녘땅 오지마을에서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와 부산의 방직공장에서 10대를 온통 보낸 경순씨는 영어를 배우지 못했다. 다행히 우체국 공무원인 남편과 결혼해서 밥걱정은 하지 않고 살아가는 요즘의 나날, 중년이랄까 노년초입의 생활이 편안하고 좋았다. 퇴직한 남편에게 다달이 연금이 나오고, 경순씨도 50대 후반까지 대형마트에서 정규직 사원으로 일을 한 터라 경제적으로 쪼들리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젊은 시절부터 혼신을 다해 이룩해온 퇴직 후의 생활이라 무료함이 덮치기까지는 놀아볼 작정이었다.

지인들과 같이 등산도 가고, 수영도 하고, 노래도 부르러 다니는 요즈막의 생활이 너무 힘들거나 바쁘지 않고 딱 적당한 재미와 긴장감을 주어서 좋았다.

그래서 등산팀 지인들과 올해 가을쯤 생전 처음 미국여행을 가기로 했다. 거기에서 경순씨의 오랜 병이 도졌다. 온통 영어투성이인 서울 거리의 간판 앞에서 경순씨는 지금까지 문맹이었다! ABC도 모르는 게 부끄러워서 남몰래 알파벳을 혼자 외우기는 했지만 단어는 전혀 몰랐다. 그런데 미국은 무슨 재미로 간단 말인가? 또 영어로 대답해야 하는 출입국관리소에서는 어쩐단 말인가? 아직 미국행 비행기표를 끊은 것도 아니고, 패키지여행 신청을 한 것도 아니건만 숨겨뒀던 오랜 지병이 도져서 울렁증이 다 생겼다. 경순씨의 고민을 들은 딸이 즉시 처방을 내려주었다.

“아, 엄마 너무 잘 됐어요. 오래 전부터 엄마가 영어단어 투성이인 간판이나 카페에서 너무 불편해 하는 것 알고 있었어요. 이 기회에 영어공부 시작하면 좋겠어요.”

“내 나이에, 나 같은 사람도 할 수 있을까?”

경순씨는 문화센터나 구청 등에서 열리는 영어회화 강의는 너무 까막눈이고 나이가 많아 등록하기가 망설여졌다.

“요즘 엄마같이 배움의 기회를 잃은 어르신들을 위해서 애들 공부하는 것처럼 방문해서 가르쳐주는 성인영어 학습지가 있어요.”

머뭇거리는 경순씨의 의욕을 불러일으켜준 딸이 신청을 하고 당장 그 다음 주부터 영어선생님이 학습지를 들고 집으로 방문을 왔다. ABC 쓰는 것부터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젊은 여선생님 덕분에 경순씨는 부끄러움을 잊고 공부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기초회화라면서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 법을 배웠다. 자신의 이름을 남 앞에서 영어로 소개할 때는 “마이 네임 이즈 경순 김”이라고 이름과 성의 순서를 바꾸어서 말해야 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마이 네임 이즈 경순 김, 마이 네임 이즈, 경순 김…”

이렇게 말을 해볼수록 경순씨는 자신이 또 다른 땅에 발을 내디딘 듯 신선하고 뿌듯했다. 딸이 6살 때 한글을 익히고 난 뒤, 손을 잡고 동네를 걸을 때 “엄마 저거 세탁소라고 읽는 거야? 저기는 미용실이라고 쓰여 있네?” 하면서 신기해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경순씨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번화가로 나가서 전에는 관심 없이 지나치던 간판들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카페, 베이커리, 이탈리언 레스토랑… 영어로 된 간판이 많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경순 김’에게 길거리 영어간판 완전정복은 시간문제였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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