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시인 조경선 “지렁이 나타나니 새가 오듯 자연은 더불어 사는 것”

권선애기자
  • 입력 2020.02.22 08:58
  • 수정 2021.06.08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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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현산방의 삶

'각자장인 조경선시인의 인생 이모작 스토리'

(눈 내리는 '칠현산방', 사진=권선애기자)
(눈 내리는 '칠현산방', 사진=권선애기자)

 전체적인 산방 분위기를 보니 인생 이모작을 확실하게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인생 이모작이 자못 기대됩니다. 인생의 이모작은 그 시기가 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인생 이모작을 하기 위해 시골로 내려온 건 아닌데 주변에서 인생 이모작을 일찍 준비했다는 소릴 가끔 듣기도 하네요. 어떻게 하다 보니 잘 맞아떨어져 그렇게 한 것인데 말입니다. 많은 분들은 인생 이모작을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거기에 맞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늦은 나이에 새로 시작하는 생활이 실패하면 안된다는 두려움 때문일까요? 그런데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계획을 세워 그 계획에 맞춰 내려왔다면 아마 금방 보따리 싸고 다시 도시로 돌아갔을 거예요. 내가 나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무엇이 있을까 생각했을 때 더 늦기 전에 이곳이면 되겠다 생각하고 무작정 내려왔어요. 남보다 조금 먼저 집을 짓게 되고 도시에서 못 느끼는 흙과의 삶에 대해 새로운 보람도 느끼게 되고 나무의 소중함도 알게 된 곳이기도 하죠. 이곳은요.

 인생 이모작에 임하면서 어떤 준비와 각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모작을 준비하고 내려가지는 않았어요. 작은 회사를 운영하다가 어느 순간 누구나 그럴 때가 있지만 저도 회의 반 타의 반 떠밀려서 내려 간 것도 있고 그래서 철저하게 준비를 못했어요. 철저하게 준비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한데 그 당시에 여윳돈도 없었고 집을 지을 때도 가장 저렴한 방법으로 어떻게 지을까를 고민했고 그게 준비라면 준비겠지만 일단은 제가 원하던 마당을 크게 하고 천천히 흙집과 나무집을 소박하게 지었어요. 남들은 한두 달이면 뚝딱 짓는 집을 저는 몇 년에 걸쳐 혼자서 짓다보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금전적인 여유가 없어 자료 얻어가며 혼자 지었어요. 아내한테 부담주지 않고 짓자는 나와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부족한 금액은 일터에 나가 돈도 벌고 짬 날 때마다 살던 집에서 왔다 갔다 하며 짓게 되었어요. 그때부터 제가 의도하지 않은 이모작 인생이 시작된 것 같아요. 지나고 보니 이게 준비라면 준비였구나 했지만 계획하고 땅을 몇 평사서 어떻게 농사를 짓고 어떻게 건물을 지을까 이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죠. 집에 관한 제 철학은 집이 사람을 이기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소박하게 작게 지었거든요. 최대한 자연과 밀접하게 흙으로도 짓도 나무로도 짓고 얼기설기 보시다시피 이제는 오래 되어 나무지붕도 군데군데 날아가고 다시 손 볼 때가 됐어요.

따로 내려와 집을 짓고 혼자 사는 걸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요?

 아이들이 다 성장하기 전에 내려오다 보니 경제적으로 흡족하게 하고 내려오진 못했어요. 아내가 많이 고생을 했죠. 집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 혼자는 할 수 없는 일이었죠. 지금은 남편의, 아빠의 인생을 인정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걸 찬성은 하지만 그 당시에는 많이 섭섭했을 것 같아요. 갑자기 결정한 일인데도 저를 설득한 적도 없고 반대도 크게 하지 않았고 지나고 보니 물 흘러가듯이 흘러간 것 같은데 아내와 아이들한테 섭섭함을 준거 같아 내내 미안하죠. 한 부분을 완성하려면 한 부분이 부족한 건 당연한 이치 아니겠어요.

 처음 선택하는 길은 모험일수 밖에 없겠는데, 새롭게 도전하는 삶의 자세와 인생설계는 어떻게 하는 게 바람직한가요?

 글쎄요. 다른 분들은 인생 이모작을 위해서 채소를 가꾸고 동물을 키우고 본인이 선택한 다른 직업을 통한 공부를 하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내려왔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게 뭘까 고민했을 때 나무를 다루니까 나무 많은 곳으로 가자, 그러면 나무와 놀게 되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게 맞아떨어진 거죠. 주변의 소재를 이용해서 목각을 만들고 대패질을 하고 스스로 못질을 하고 그렇게 해서 집도 짓고 조그마한 작품도 만들고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도 계속 그렇게 살고 있지만요.

 인생 이모작은 본인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중요하겠네요?

 그렇죠. 이곳은 할일이 너무 많아요. 시골 생활이 그렇지만 돌아서면 일이 생겨요.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자러 들어가는 게 산속의 삶이니까 움직이는 대로 온종일 할 일이 있어요. 그렇게 살아가는 지금의 이 삶이 참 좋습니다.

선생님을 처음 뵐 때 겉모습에서 날카로움과 자신감이 나타나는데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충실해서 그 느낌이 배어 나온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아요. 인상이 날카롭게 보여서 그렇지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되겠어요. 그건 기자님이 그렇게 보신 거고 그런 건 있죠. 혼자 일하고 생활하는 일상이다 보니 독한 마음을 먹지 않으면 깊은 산 속에 살수가 없어요. 제가 인상이 날카롭게 보이긴 하지만 속은 참 부드러워요 속을 뒤집어서 보여 줄 수도 없고……(웃음) 나무로 만드는 걸 즐기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으면 맞아떨어짐이 어긋나거든요. 여유롭게 유유자적하게 살려고 왔는데 치밀하게 무엇을 다루는 건 도시에서나 시골이나 똑같아요. 그 성격이 어디 가겠어요. 사실은 저도 게을러요. 기계를 다루다보면 세밀하지 않으면 다쳐요. 그래서 술 먹는 것도 자제하고 모든 생활을 단순하게 줄여서 지내는 경우가 많죠.

(칠현산방 전경, 사진=조경선기자)
(칠현산방 전경, 사진=권선애기자)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산 속인 이곳이 안성 칠현산방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정착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특별한 계기는 없었어요. 학교 후배가 그 당시에 실내건축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옛날 집을 보수해달라는 제안을 받고 일도 할 겸 놀러 왔다가 다 정리해주고 이 주변에서 식사를 하고 둘러보는데, 오시면서 봤겠지만 금광저수지 주변 풍경이 아주 좋았어요. 아! 여기에 터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지금 제가 사는 터가 됐어요.

이곳에서 주로 무엇을 하고 지내고 생활은 어떻게 하시나요?

 낮에는 나무하고 놀아요. 저녁에는 몇 가지하는 일이 있으니 매일 매일 정리하고 일찍 자죠. 산에서 생활은 늘 이런 일이 반복되죠. 배운 게 나무일이니까 주변에서 나무일을 해달라는 일이라거나 쉽게 말하면 목수일이죠. 그 일을 하기도 하고 그렇게 간간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생활에는 만족하시나요?

 도시의 생활보다는 만족해요. 그게 이모작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모작이라는 말 자체가 좀 그렇긴 한데 이제 인생 후반기에 접어들었다고 하면 좀 이르다 싶겠지만 이곳에서 40대 50대를 훌쩍 지내고 어언 60대를 맞이한 것 같아요. 남들이 보면 일찍 내려와서 가족들과 아기자기하게 지내는 시간은 짧았지만 나름대로 여기에서 얻은 게 많아요. 나무만 다루는 목각장이였는데 우연한 기회에 생각지 않은 시를 접하게 되어 시도 쓰게 되었고 얻은 게 참 많아요.

 선생님의 약력을 살펴보니 얼마 전에 김만중문학상 신인상에 『목력』이라는 시집으로 신인상을 받으셨는데 먼저 축하드리고요.
시는 언제부터 쓰게 되셨고, 시는 일상에서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금광저수지 주변에 유명하신 장석주 선생님께서 살고 계셨는데 아주 우연한 기회에 뵙게 되었어요. 시는 40대 초반부터 그분한테서 몇 년간 공부를 했죠. 그게 시를 쓰게 된 동기예요. 저는 시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는데 그 분의 문학에 관련된 말씀을 듣고 그 분 집에서 책도 빌려보고 자연스럽게 가깝게 지내면서 관심이 없던 시에 가까워졌죠. 나중에 신춘문예에 등단도 하게 되어서 지금껏 쓰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아주 우연히 어떤 분과 극적으로 재회하여 제 시집을 드렸는데 그 분께서 제 시집을 읽고 김만중문학상에 응모해보면 어떠냐는 제의를 해 와, 그 분의 추천으로 응모하여 좋은 결과를 얻었지요.

그 정보를 알고 내보라고 하신 그분한테 많이 감사해야겠네요?

 그분은 중학교 은사님이세요. 당시 국어와 영어를 가르치셨는데 대학을 갓 졸업하시고 첫 발령지로 시골 마을 제가 다니는 중학교로 부임을 하셨어요. 굉장히 미인이셨죠. 첫눈에 반할 만큼요. 하하 그래서 늘 또렷하게 기억이 났어요. 그분을 40년만에 극적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어요. 제가 시집 한권을 드렸더니 기꺼이 추천을 해주셔서 운 좋게 당선이 됐죠. 지금도 종종 찾아뵙는데 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그럼 선생님과 40년 만에 만나게 된 것도 결국엔 시네요. 시를 접하지 못했다면 은사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몰랐겠네요?

 계절마다 받아보는 계간지에서 우연히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게 되어 그 계간지 출판사로 연락을 하게 됐고 그렇게 극적으로 반가운 만남이 됐죠. 은사님께서도 아주 오래 전에 중앙지 신춘문예 소설로 등단 하셔서 활동을 하고 계시거든요. 은사님과 제가 우연하게도 문학이라는 같은 길을 가게 된 셈이 되었죠.

시로 등단한 나이가 50대인데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나요?

 지금 사는 집이 어느 정도 완성해 갈 무렵 장석주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시를 쓰게 된 계기가 늦기는 했죠. 나이로 계산한다면요. 산속은 어둠이 빨리 찾아와 텔레비전도 없고 별다른 놀잇감이 없는 이곳은 완전히 적막강산이죠. 장석주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시집을 읽고 시를 쓰게 된 동기가 되었고 그로인해 좋은 일이 많이 있었던 거 같아요. 시가 없었다면 다른 일을 잡았겠지만 자칫 지루한 이곳에서 시를 몰랐다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막막하기도 했을 것 같고요. 낮에는 나무를 다루고 저녁에는 틈틈이 시간을 내서 시를 쓰면서 살아가죠.

(각자장인 조경선시인 작품, 사진=조경선기자
(각자장인 조경선시인 작품, 사진=권선애기자)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각자장으로도 유명하신데 나무를 다루면서 배우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각자장은 나무에 글자를 새긴다는 뜻이에요 역사도 깊고 팔만대장경에 나오는 문자를 새기는 사람을 각자장이라고 하는데 글씨를 새기는 장인이죠. 곳곳에 이런 일을 하는 분이 많아요. 요즘 추세가 글자의 인쇄화로 우선 쉬운 것만 찾게 되잖아요. 칼로 글자를 새기는 일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들기도 해서 좋아하는 분들만 하죠. 전통을 이어간다고 생각하면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고 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무를 새기면서 나 자신의 내면을 다듬고 새기듯 내적인 영향을 끼치니 이 일을 계속 하고 있어요. 장인이라고 하기엔 많이 부족하고요. 글 새김이 그저 좋아서 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일상에서 빠져나와 자발적 고립을 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왜 혼자 긴 시간을 살고 계시는지요.

 자발적 고립이라는 말이 애매한데 눈 오면 이곳은 나가기도 쉽지 않고 수도권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지만 산 높이도 있고 깊은 산이라 말 그대로 고립되고 말죠. 첨에 일 년 이년은 힘들었죠. 사람들과 어울리며 회사생활하고 개인사업 할 때와는 다르지만 초반기에는 많이 외롭고 쓸쓸했어요. 지금은 그게 익숙해서 사람들이 많이 오면 외로워요. 혼자 있을 때는 잘 몰라요. 내 할 일하고 때 되면 일하고 자고 하니까요. 이렇게 생활하는 게 자발적 고립이라고 한다면 저는 자발적 고립을 즐기면서 사는 셈이죠.

그럼 이곳에 터를 잡은 게 탁월한 선택이었나요?

 첨에는 몰랐죠. 십여 년 흘러서 친구들이나 학교 동창들 오면 남들보다 십년은 앞서 간다는 말을 들을 때는 잘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죠. 그만큼 손해 본 것도 많지만요.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앞서 간다는 건 용기가 필요해요.

앞으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일단은 제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있다는 것과 보통사람은 굉장히 선택하기가 힘든데 처음엔 손가락질도 받고 그랬어요. 예를 들자면 교육문제도 그렇고 가장이다보니 어깨가 무거웠죠. 가족들이 조금씩 양보를 해줬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는 아주 좋았던 거 같아요. 지금은 제가 맘 놓고 살아가는 터전이 있으니까 걱정은 없죠.

이모작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그건 제가 할 말이 아니고요. 불편함을 이겨내지 못하면 도시생활에서 벗어난 생활이 굉장히 외로울 거예요. 외롭고 힘들고 먹는 것도 직접 해결해야 하니까요. 그럴 때마다 산에 올라가서 운동하고 땔감 준비하면서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기도 하고 그게 버텨냈던 힘인 것 같아요. 살아가면서 모험은 한번쯤은 필요해요. 필요한데 그때그때 이겨내지 못하면 힘들죠. 도시에 있으면 육체적인 노동은 별로 없잖아요. 텃밭을 가꾸는 일도 몸으로 직접 부딪쳐보며 해볼 만하다 생각하고 도전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인터뷰를 하는 내내 자연을 많이 사랑하는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요즘에는 자연을 망가뜨리고 순리를 역행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서 온난화로 지구가 아프잖아요. 조경선 선생님처럼만 살면 우리 지구가 아파하지 않고 건강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과찬의 말씀이고 그런 건 있죠. 첨에는 새가 많이 날아와 새소리가 너무 시끄럽고 잘 때나 아침 해뜨기 전 지붕에 올라가서 벌레 잡아먹는 소리에 잠을 깨고 동물 울음소리가 듣기 좋은 소리만은 아니잖아요. 십여 년이 지나다 보니 그 소리도 이제는 반갑게 들려요. 산에 정적이 흐르면 소리가 먼저 제 몸을 깨워요. 원래는 제가 있는 이곳이 그들의 자리였어요. 제가 침범 한 거죠. 모퉁이에 음식 남겨놓으면 고라니도 먹고 새들도 쪼아 먹고 그렇게 같이 살아가는 거예요. 나무도 그렇고 새도 그렇고 산도 그렇고 마당도 그렇고요. 도시 사람들 지렁이 보면 깜짝 놀라잖아요. 숨 쉴라고 나와서 마당에서 돌아다닐 때 그 당시에는 몰랐죠. 지렁이가 나타나니 새가 온다는 것을요. 제가 자연을 보호한 게 서로 보호하며 같이 사는 거죠. 그러다보니 그 소리도 듣기 좋고 우리 집 근처로 내려오는 게 반가워요 친구처럼요.

자연과 사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시인 맞네요. 이 땅에도 앞으론 자연을 사랑하는 시인들이 더욱 많이 배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요. 제 시의 대부분은 자연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많이 써요. 한문의 詩자도 사실은 풀어보면 흙이 있는 마을에서 말을 하는 게 시 인데, 저는 이제 편하게 쓰고 싶은 거 맘대로 쓰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산속의 생활은 하나도 버릴게 없어요. 기자님 보기에 자연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비춰졌다니 다행입니다. 이곳에 크나큰 업적을 쌓기 위해 내려 온 것도 아니고 잘못해서 도망 온 곳도 아니기 때문에 막연하게 시작해서 지금 여기까지 왔네요. 한 모퉁이 그늘이 있다면 햇볕도 옆에 함께 있듯이 그렇게 양쪽이 다 좋아지는 것 같아요. 기자님도 앞으로 시 많이 읽으셨음 좋겠습니다.

말씀대로 저도 이제 시도 많이 읽고 자연에 보다 관심을 갖는 그런 친자연적 생활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조경선시인, 2016 매일신문 시조 등단, 천강문학상, 김만중 문학상 수상, 시집 ‘목력’, 사진=권선애기자)
(조경선시인, 2016 매일신문 시조 등단, 천강문학상, 김만중 문학상 수상, 시집 ‘목력’, 사진=권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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