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 라이프⑬] 더디 오는 봄

김경 기자
  • 입력 2020.03.02 14:22
  • 수정 2020.03.04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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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김경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
[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겨울이 흐지부지 가고 있다. 제대로 맹위 한 번 떨치지 못하고 어깨만 실없이 들썩이다가 슬며시 꼬리를 내려버렸다. 그러고 보니 입춘이 지나고 우수가 낼모레니 겨울은 이미 가고 봄이 왔다고 해야 옳겠다. 하지만 체감 온도는 겨울도 봄도 아닌 어중간한 느낌이다. 문득 씁쓸한 기운이 온몸에 번진다. 조석지변도 유분수라더니, 지금 내 정신세계가 요동을 치고 있다. 엊그제는 온난화 기온에 쌍심지를 키며 덤벼들다가 오늘은 어서 빨리 따뜻한, 아니 뜨거운 봄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한다. ‘신종코로나19’ 탓이다.

일단 꽁꽁 얼어붙는 겨울 사랑은 과감하게 접는다. 하루아침에 온 지구촌을 강타한 이 불행한 사태를 벗어나는 일이 급선무다. 백신이나 치료약이 전무한 상황에서 과학계와 전문가들의 말에 귀를 바짝 기울인다. 바이러스의 4월 소멸설. 섭씨 25도 이상일 때에 전파력이 약화되는, 날씨와 상관관계가 있다는, 그들의 말을 믿는다. 이보다 더 희망적인 말이 어디 또 있는가. 완연한 봄과 기온 상승은 한 몸이다.

아침부터 뿌연 대기는 오후가 되어도 걷힐 기미가 없다. 우울한 기분에 날씨마저 한 술 더 뜬다. 시장이라도 한 바퀴 돌아볼까. 찬거리 준비가 아니더라도 나는 가끔 산책 삼아 동네의 재래시장에 들르곤 한다. 이런저런 먹을거리도 매력적이지만, 오가는 낯선 얼굴들이 뿜어내는 다정함을 나는 즐긴다.

마스크를 쓰고 시장으로 향한다. 아케이드로 구성되고 캐노피 설치로 외관부터가 깔끔하고 정갈한 시장은 우리 동네의 명소다. 나는 아케이드로 들어서기 전에 습관적으로 좌판부터 기웃거린다.

“어머, 이거 냉이 아니에요?”

나는 나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이며 냉이바구니 앞으로 성큼 다가간다. 푸르른 이파리 아래 하얀 뿌리가 제법 튼실하다. 좌판에는 봄나물로 이미 봄이 한창이다.

“어서 와요, 달래도 있다우.”

“아, 달래……. 어, 이건 씀바귀네요. 그렇죠?”

“맞수. 달래는 온실 거지만, 이놈 씀바귀와 냉이는 진짜 노지에서 캔 거라우.”

좌판할머니의 한 마디에 나는 냉큼 아득한 봄날로 내달려 멸치국물에 끓인 냉이 된장국을 훌훌 들이마신다. 상큼한 냉이향이 입 안에 퍼진다. 역시 냉이다. 채식을 즐겼던 선친은 봄 타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봄 냉이가 으뜸이라고 했다. 아지랑이 피어오른 봄날, 언 땅을 헤집고 당당하게 고개를 내민 냉이의 푸릇푸릇한 싹이 눈앞에 가물거린다. 다음은 씀바귀와 인사를 나눠야지. 씀바귀 무침을 욕심껏 한 젓가락 집어 올린다. 그만 볼이 툭 불거진다. 새콤달콤한 맛도 입맛을 자극하지만, 그 고유의 쌉쌀한 맛이 일품이다. 이보다 더 입맛을 돋워주는 나물이 무엇이련가.

“봄나물만 챙기지 말고 이 콩나물도 가져가슈. 떨이라 많이 담았다우.”

인심이 넉넉해 늘 덤이 더 많은 할머니의 좌판, 이 맛에 나는 좌판부터 기웃거리게 되는지 모른다. 시장 가방은 달래, 냉이, 씀바귀, 머위, 취, 콩나물 들로 불룩해졌다. 채소 좌판 외에도 아케이드 안에 자리 잡지 못한 상인들이 또 있다. 리어카를 좌판대로 사용하는 영감님은 매일매일 상품이 다르다. 표고버섯, 풋고추, 고구마, 감자 등등 그날그날 손에 닿는 대로 상품을 가져오는 모양새다. 오늘은 안 보이나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는 중년 여인도 있다. 직접 만든 손 두부와 청국장과 시루콩나물을 선보이는데, 앙증맞은 시루 속에 화초처럼 핀 콩나물은 그야말로 작품이다. 그뿐인가. 깨알 같은 까만 점이 박힌, 재료가 검은콩인 흑두부는 손에 닿기만 해도 영양분이 줄줄 흐를 듯하다.

나는 양손에 들린 무게감에 만족하며 시장을 나온다. 집 안에서와는 달리 마음이 한껏 푸근해졌다. 어느 틈에 다사로운 봄 햇살이라도 스며들었는지 가슴이 더워진다. 실로 동네 재래시장이 주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린 시절부터 나는 유난히 시장을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가 장바구니만 챙겨들면 나는 부랴부랴 장바구니보다 더 앞서 대문 밖으로 나갔다. 대형마트나 냉장고가 없던 시대라서 밥 먹듯 시장에 드나들던 때였다. 소도시인 내 고향에는 이름이 붙은 시장이 세 군데였다. 집을 옮겨 다녔기에, 초등학교 때는 중앙시장, 고등학교 때는 웃시장, 대학 시절에는 아래 시장에 다녔다. 어린 내 눈에도 어머니의 시장보기는 좀 남달라 보였다. 늘 좌판을 먼저 둘러보고 나서야 버젓이 점포를 차린 단골 가게에 들르곤 했다. 좌판에 없는 것들만 점포에서 구입하는 식이었다. 좌판에서도 어머니 나름의 순서가 있었다.

“엄마, 저 쪽 오이가 더 싱싱하잖아? 와, 여기 바지락이 참 크고 예쁘다.”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면서도 내 말은 못 들은 척, 아기를 안고 있는 아기엄마 좌판에서 이것저것을 골랐다.

“아이고, 그래도 애기가 순하게 잠들었네. 오이도 싱싱하고, 가지 빛깔도 참 곱네요.”

저만치 어깨가 굽은 할머니도 당연히 어머니의 시야에 파고들었다.

“아유, 밭에서 막 뽑았나 봐요. 오늘저녁엔 할머니의 쪽파로 파말이를 해야겠어요.”

내 눈과 어머니의 눈은 달랐다. 아무리 풀이 죽은 채소라도 어머니의 눈에만 들면 꼿꼿이 살아나곤 했다. 나는 당연히 의구심을 질문하고, 어머니는 분명히 답을 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사춘기를 보내고 나서야 어렴풋이나마 어머니의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젊은 나이에 부끄럽기도 할 텐데, 어린애를 안고 나와 장사를 하겠냐. 제일 먼저 젊은 아기엄마 것을 사주고 그 다음엔 연로한 할머니 것을 사야 한다. 상품은 다 비슷비슷한 거다. 나는 어머니가 건넨 말을 깊이 명심했다. 유년 시절에 학습한 어머니의 장보기였다.

이전에 살던 동네는 아파트촌이라 시장이 없었다. 항상 일주일에 한두 번씩 대형마트만 드나들었다. 참 멋없고 싱거운 장보기였다. 포장된 상품이 대부분인데다 오가는 사람들도 대다수가 하나같이 무표정했다. 재래시장이 건재한 이 동네에서 나는 새로운 삶을 체득하고 있다. 비로소 사람 사는 세상의 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랄까. 무엇보다도 어머니 따라서 시장을 누비던 추억 시간을 펼칠 수 있음이 가장 큰 기쁨이다. 요즘에는 좌판에 나선 아기엄마라곤 찾아볼 수 없으니, 자연히 할머니가 0순위다. 다음은 중년 여인, 어쩔 수 없이 영감님이 꼴찌다.

현관에 들어선다. 왠지 장보던 때와는 달리 답답하다. 장바구니를 싱크대 위에 풀어 놓고 냉이를 한 줌 들어 코끝에 대어본다. 알싸한 흙냄새와 상큼한 냉이 냄새라니. 더없이 환상적인 봄의 향취다. 봄의 향취는 순식간에 실내의 답답함을 휘휘 날려버린다. 내친김에 베란다로 나가 문을 열어젖히고 심호흡을 한다. 멀리 산자락에 부윰하니 봄기운이 돌면서 멈칫멈칫 다가오는 연둣빛 치마가 보인다. 한 걸음 더 빨리, 아니 열 걸음 백 걸음 더 빨리! 나는 목청껏 소리를 질러본다. 정말  봄이 오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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