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안식처④] 서울 도심여행···젊음의 성지, 대학로에서 조선 최고의 국립대학 성균관까지 2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4.03 15:02
  • 수정 2022.07.12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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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50+센터, 시니어들과 떠난 여행

<현대시 박물관> 詩정신은 인류변화에 보이지 않는 원동력

(천년수도승 시비 앞, 촬영=윤재훈 기자)
(현대시 박물관 천년수도승 시비 앞, 촬영=윤재훈 기자)

한성 백제시대부터 2,000여년의 수도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울은, 한 블록만 안으로 접어들면 정겨운 골목길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많다. 그런 길을 따라 <현대시 박물관>을 찾았다. 길 입구 쪽에도 비슷한 이름의 박물관이 작은 슬라브집 이층에 있다. 이곳은 개인이 살던 조그만 옛집을 개조해 만들었는데, 입구에는 여자영씨가 쓴 <천 년 수도승>이란 시비가 있다.

…내게는 아무 것도 두려움 없어
육상에서 아무런 힘과 권력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찍 못하고
아무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꽝…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담(膽) 크고 순정한 소년배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너라, 소년배, 입 맞춰 주마
철.....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꽝…,
-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1908년 창간된 잡지 <소년>의 권두시다. 위의 시는 시조에서 자유시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과도기적 성격을 띤 최초의 신체시라고 부르는 작품이다. 19살에 썼다고 하니, 가히 뛰어난 시풍이긴 한데, 3.1운동 독립선언서에 서명까지 한 그가 이광수처럼 친일로 돌아선 것이 민족사의 비극이기도 하다.

특히 시 전반부의 흐르는 내용은 이 시대 당리당략과 사리사욕(私利私慾)에 정신이 팔린 정치인들에게 가열찬 일침을 주는 듯도 하다. 또한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는 멸망으로 치닫은,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몰아오는 일제에 대한 마음의 발로였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1908월 11월 1일 위의 시가 발표된 이후 꼭 100년이 되는 2008년 11월 1일 이곳은 문을 열었다. 그동안 특정한 시인의 이름이나 지역을 지명으로 하는 문학관은 수십여 개가 존재하지만 시(詩)만을 전문으로 하는 박물관은 처음이다. 안에는 많은 시인들의 사진을 비롯하여 육필원고와 휘호들, 희귀본을 포함한 15,000여 권의 시집을 보유하고 있다.

김재홍 관장은 전 <시와 시학> 주간이자 경희대 국문과 교수를 지냈다. 90년대에 매년 진행되었던 여름해변시인학교에서 송수권, 오세영, 문정희, 유안진, 허영자 시인 등과 각 대학 교수님들을 뵈었던 추억이 새록새록 하다. 이 안에 있는 것들은 6,25 전쟁통에 사라지거나 고물로 팔려나가던 것들을 하나하나 모아온 것이라 한다.

“모든 상상력의 근원인 시의 핵심은 무에서 존재를 이끌어 내는 창조정신이다.

문화의 혼은 시라 할 수 있다. 인간의 혼은 문화다.

따라서 시가 없이 인간 사회는 이뤄지지 않는다.

물론 시는 상업적인 면이 거의 배제되어 있어 현실적으로 필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인간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근본인 창조적인 힘, 변화하는 힘이 바로 시정신이다. 

시정신은 인류변화에 보이지 않는 원동력이 된다.”

“문화재하면 머릿속에 뭐가 떠오르는가.

일반적으로 석굴암, 다보탑, 숭례문 등 유형적인 문화재만 생각하게 된다.

이런 문화재의 보전 목소리는 크지만 문학, 특히 시(詩)에 대해선 교과서에서만 읊조릴 뿐이다.

오히려 이런 정신적 유산은 더욱 빛나는, 평생 사라지지 않고 오래 남은 문화유산이다.”

김재홍 관장의 시론이 가슴에 와 뜨겁게 닿는다. 형태가 보이는 유형의 문화재만 찾아다니는 여행자들에게 큰 지향점인 동시에, 울려오는 바가 크다.

34년간 어렵게 이어 온 <책방 풀무질>

(서점 도움 주신 분 이름, 촬영=윤재훈 기자)
(서점 도움 주신 분 이름, 촬영=윤재훈 기자)

이제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대학인 <성균관>을 찾아간다. 길은 여전히 골목을 한참 돌아나가더니 맞은편에 <책방 풀무질>이 보인다. 풀무질이란 이름은 성균관 대학교 학보 이름이며, 1985년에 개업하여 34년 동안 어렵게 견뎌오고 있는 성대 앞 유일한 사회과학서점이다. 그 입구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

“사상의 불을 지피는 책방 풀무질, 2019년 폐업 위기에 처했던 책방 풀무질이 여러분의 도움으로 되살아났습니다. 꺼져가는 인문학의 불씨에 바람을 넣어준 921명의 이름을 한 분 한 분 새겨봅니다.”

‘풀무질’이란 무엇인가. 그 옛날 우리가 불을 지필 때 바람을 넣어 주던 물건 아닌가. 그 불질이 사람을 먹여 살리고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렇게 이 작은 지하서점은 다행히 문을 닫은 위기를 넘기고, 지금은 막 30대로 접어든 젊은 주인이 운영하고 있다. 참 귀한 서점이 앞으로 쭉 이어나가기를 기도해본다.

조선의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 대학교>

(성균관 대학 입구에서, 촬영=윤재훈 기자)
(성균관 대학 입구에서, 촬영=윤재훈 기자)

성균관 대학 입구로 들어선다. 먼저 자그마한 비각과 하마비가 마치 사찰의 일주문처럼 우리들에게 이 도심 속 온갖 번뇌의 속진(俗塵)을 내려놓아야만 들어올 수 있다고 하는 것 같다.

비각 안에는 1742년 영조(18년)가 집권한 이래 붕당(朋黨)정치의 폐해를 해소하고자, 자신이 펼친 탕평책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 있다. 이는 조선의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 유생들에게 붕당(朋黨)정치의 폐해를 경계하도록 세웠다.

(촬영=윤재훈 기자)
(촬영=윤재훈 기자)

비문의 원문은 <예기>에 나오는 내용으로,

“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음이 군자의 마음이요,
아첨하고 신의가 없음은 소인의 삿된 마음이다”

이는 조선이 건국한 이래 양반의 수는 계속 늘어났지만, 벼슬에 오를 수 있는 관직의 수는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폐단이라고 한다.

이런 현상을 간파한 영조는 집권 후 당쟁을 해소할 것을 천명하고 각 정파의 온건론자를 중용하며 각 정파의 인물을 균형 있게 등용했다. 그리고 이런 노력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자 집권 17년차에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할 때 이 비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영조도 노론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는 근본적인 약점 때문에 태종 이방원처럼 적극적으로 당파를 제압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소론에 가까운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게 만드는 비운을 맞는다.

그 옆으로는 온종일 햇빛 받으며 세월 속에 삭아가고 있는 비석이 하나 있다. 바로 하마비(下馬碑)이다. 이 비는 1413년 태종 13년에 예조에 건의하여 나무로 표석을 세웠다고 한다.

(하마비(下馬碑), 촬영=윤재훈 기자)
(하마비(下馬碑), 촬영=윤재훈 기자)

“대소 관리로서 이곳을 지나는 자는 모두 말에서 내리라”

그리고 내리는 지점도 품계에 따라 각기 달리 표시되어 있어 조선이 철저한 신분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1품 이하는 궐문으로부터 10보, 3품 이하는 20보, 7품 이하는 30보 이상에서 내려야 했다.

우리가 문화유산을 찾아가는 참뜻은
유형의 문화재에서 무형의 가치를 새기는데 있다고 한다면,
성균관에 절절이 배여 있는 조선시대 선비정신에 주목해야 한다.
-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성현들의 넋이 드나드는 신문(神門) <대성전 외삼문>

(대성전의 정문인 외삼문, 촬영=윤재훈 기자)
(대성전의 정문인 외삼문, 촬영=윤재훈 기자)

이제 본격적으로 안으로 들어갈 차례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건너편을 바라보니 커다란 대문이 보인다. 이 문은 바로 대성전의 정문인 외삼문이지만 굳게 닫혀 있었다. 이곳은 성현들의 넋이 드나드는 신문(神門)이라 석전제(釋奠祭) 때만 열린다. 일행들이 아쉬운지 문틈으로 살며시 안을 들여다본다.

벽사(辟邪)의 의미인 붉고 커다란 대문은 보통의 한옥의 문과 달리 약간 뒤틀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이것이 문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혼(魂)들이 드나들기 쉽게 일부러 비틀어 놓은 것이며, 제례공간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종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성균관(명륜당)>의 입구로 들어섰다. ‘성균’은 주나라 왕실의 제도를 담은 『주례(周禮)』의 「대사악」편에서 나오는 용어로 “음을 고르게 조율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성(成)이란, 그 행동이 어그러짐을 바로잡고,
균(均)은, 지나치고 모자라는 것을 고르게 한다‘

라고 하니 중용의 뜻과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그 시대에도 교육은 국가재건에 밑거름이라는 철저한 인식이 있었던 듯싶다.

건축 답사를 할 때 정문은 건물의 얼굴이자 위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무조건 정문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곳에서는 성균관의 전채를 조망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조선 왕조의 지식인들이 모여서 나라의 천 년 사직을 걱정했던,

조선의 정신이 머물러 있던 곳’,

우리는 잠시 옷깃을 여미고 마음을 살폈다.

강학(講學)공간인 성균관 <명륜당>

(강학(講學)공간인 ‘성균관 명륜당’, 촬영=윤재훈 기자)
(강학(講學)공간인 ‘성균관 명륜당’, 촬영=윤재훈 기자)

이곳은 크게 강학(講學)공간인 ‘성균관(成均館 명륜당明倫堂 주지번의 글씨’과 좌우로 동재(東齋)·서재(西齋)가 있으며, 아래쪽으로는 향사(享祀) 제사 공간인 ‘문묘(文廟, 대성전大成殿, 한석봉 글씨)’와 좌우로 동무(東廡)·서무(西廡)가 양대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두 공간은 명백하게 구분되어 조선왕조 국가 이데올로기의 상징적 공간이 되고 있다.

500년 된 천연기념물 제 59호 <명륜당 은행나무>

(명륜당 은행나무, 촬영=윤재훈 기자)
(명륜당 은행나무, 촬영=윤재훈 기자)

명륜당 마당에는 가을이면 이 뜨락을 황금빛으로 장식하는 거대한 은행나무 4그루가 우리를 압도했다.
그 중 명륜당 앞 수령 500년 된 나무 한 그루가 천연기념물 제 59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11월 첫째 일요일이나 둘째 일요일쯤에 은행나무의 황금빛이 절정이다.

우리나라에는 3개의 대표적인 은행나무가 있는데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와 부여 주암리 은행나무,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이다. 대부분 수령이 1천년을 헤아리므로 볕 좋은 가을날, 이 황금빛 은행나무를 찾아나서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

유생들의 기숙사 <동재>

(기숙사 동재의 툇마루, 촬영=윤재훈 기자)
(기숙사 동재의 툇마루, 촬영=윤재훈 기자)

명륜당은 보물 제141 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해마다 봄·가을에 열리는 석전제(釋奠祭)는 중요무형문화재 85호이다. 우리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당부에 따라 우선 우측의 향문(香門)을 통해 뒤뜰로 나가 유생들의 기숙사인 길다란 동재의 툇마루에 앉아, 잠시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이 되어 보았다.

청년 유생들의 음식을 담당했던 <진사식당>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진사식당’ 엿본다, 촬영=윤재훈 기자)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진사식당’ 엿본다, 촬영=윤재훈 기자)

굴풋한 점심시간, 배고픈 청년 유생들의 음식을 담당했던 진사식당에서는 맛있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마당 안은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로 왁자한 듯하다.

반질반질한 마루의 나무결을 한 번 문질러 본다. 사라진 오백년 조선의 역사가 그 안에 숨쉬고 있다. 기숙사의 문은 모두 뒤뜰로 나있어 명륜당 뜨락은 언제나 조용했을 것 같다.

주자의 글씨를 집자한 <명륜당 현판>

(명륜당 현판, 촬영=윤재훈 기자)
(명륜당 현판, 촬영=윤재훈 기자)

우리는 향대청, 육일각, 존경각을 지나 다시 명륜당 마당으로 나왔다. 천 원짜리 지폐 앞면에 퇴계 초상과 함께 나오는 명륜당, 유생들이 강론을 듣던 커다란 대청마루는 서까래와 보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연등천정인데 각종 현판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다.

안쪽 명륜당이라 적힌 검정색 현판은 주자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그 위에 커다란 현판은 정조 대왕이 성균관에 은술잔을 하사하면서 지은 시에 붙인 서문인 「태학 은배 시서」인데, 학생들을 격려하는 임금의 마음이 절절히 들어있다.

나라에서는 성균관 유생들을 귀하게 여겨 역대 임금들이 수시로 거동해, 왕이 행차하며 열리는 과거인 알성시가 행해졌는데, 그중 몇 구절을 보면,

태학이란 어진 선비들이 있는 곳이고 선비는 나라의 원기(元氣)다..”
“모든 선비는 학문에 힘쓰고 품행을 깨끗이 해,
세상에 나오면 왕조의 존경 대상이 되고,
들어앉아서 유림의 표상과 기준이 된다.”

이 시대 지식인들에게도 통용될 따끔한 일침이 될 듯하다.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학교란 어진 선생들이 있는 곳이고 선생는 나라의 원기(元氣)다..”
“모든 선생는 학문에 힘쓰고 품행을 깨끗이 해,
세상에 나오면 국민의 존경 대상이 되고,
들어앉아서 학생들의 표상과 기준이 된다.”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귀한 말씀에, 스스로 발걸음이 멈춰졌다. 정조대왕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마치 100리 길을 가는 사람이 항상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듯이 하라
그리하면 자만하고 싶어도 자만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계속해야 할 것이 학업이고 무궁무진한 것이 덕이다.”

유생들의 조금이라고 해이해지려는 마음에 채찍을 가하는 왕의 마음이 엿보이는 듯하다. 또한 이렇게 파괴와 복구를 거듭한 성균관의 내력에 대해 특별히 기록된 자료가 없었는데, 다행스럽게 무명자(無名子)란 분이 지은 220여수의 시 「반중잡영」이 남아 성균관의 생활상이 낱낱이 밝혀주고 있다. 그래서 유홍준 전 청장은 무명자는 이름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아주 유명자(有名子)가 되었다며 애정을 표시했다.

그는 20년 동안 성균관에서 재수하며 약 5년간을 성균관에서 생활한 것으로 추정되며. 성균관과 반촌의 모든 것을 생생하게 전한다. 아마도 그는 말년에 들어 젊은 날의 추억과 모교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이 시를 써내려 간 것 같은데, 애석하게 시를 쓴 시점이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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