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 라이프⑭] 당신과 나 사이

김경 기자
  • 입력 2020.04.06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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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김경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
[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남다른 춘삼월, 춘삼월이 저만치 거리를 두고 떠나간다. 이번에 특별히 고안한 지침대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묵묵히 떠난다. 사람과 사람과의 사회적 거리두기는 자연과 사람과의 거리두기로까지 확대되었다. 나도 일찌감치 기품 서린 산수유는 물론, 고아한 향기까지 품은 매화와도 악수를 포기했다. 참 맥이 빠지고 서러운 나날이다.

집 안의 짧은 동선을 따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성이는데, 문득 의심의 기운이 뻗친다. 누군가에게 눈딱총을 놓듯 눈에 힘이 들어간다. 도대체 이 상황이 뭡니까? 정말 실제 상황 맞아요? 행여 가상의 세계에서 괜히 허우적대고 있는 거 아니에요? 목 안에 잠겨 있던 소리가 소나기 내리듯 쏟아진다. 한참을 기다려도 답은 없다. 나는 피식, 헛웃음을 날린다. 대책 없는 망상이었다. 아니다. 어디까지나 내 나름의 상상이다.

‘신종코로나19’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왔으나, 실은 우리 인간이 불러일으킨 재난이다. 결국 팬데믹으로 비화하면서 평화로운 일상은 모래성이 되고, 검은 장막을 둘러친 낯선 일상이 계속되고 있다. 답답하고 우울하다 못해 혼란스럽고 두렵다. 이 비현실적인 현실에서 하루라도 빨리 탈출해야 하는데, 무슨 방도가 없는가? 아, 특효약…… 특효약이 없는가? 그래, 도깨비방망이. 나는 비장의 무기를 찾아 눈을 희번덕거린다. 특효약 나와라 뚝딱!

특효약은커녕 점점 더 머리가 지끈거린다. 오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끔찍한 스페인 독감이 머릿속에서 활보한다. 기다렸다는 듯, 카뮈의 <페스트>와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도 머릿속을 비집고 파고든다. 소설과 현실의 벽이 와르르 무너진다 싶더니, 소설과 현실의 일치점이 또렷이 보인다. 나는 그만 몸이 옥죄인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두 손을 모은다. 이 절실한 상황에 좌절은 금물이다. 이번 달, 아니면 다음달, 또 그 다음달…… 언젠가는 반드시 바이러스가 백기를 들 것이다.

나는 거실 바닥에 쪼그리고 앉는다. 하릴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집 안을 맴도는 것도 지겹다. 일상화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당신과 나 사이가 좀 멀어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물리적인 거리 유지일 뿐, 마음까지 멀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마음의 거리는 예전보다 훨씬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마음의 거리…… 문득 ‘내 마음의 거리’에 생각이 간다. ‘내 자신의 거리두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나와 내 안의 내밀한 나. 그동안 까맣게 모르쇠로 일관해온 내 모습이 시나브로 윤곽을 드러낸다. 내밀한 나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초조하고 불안한 나는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허둥거리고 조바심이 난다. 웃음보다는 이맛살을 찌푸리는 게 자연스럽다. 그뿐인가. 자나 깨나 갈급증으로 목이 탄다. 늘 불안정하고 부정적인 쪽으로만 치닫는다. 허기에 찬 나는 무엇인가를 꾸역꾸역 채우려는 데만 급급하다. 나는 내 안의 나와 먼 거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에 잠긴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어두운 그림자가 꿈틀거린다. 차츰차츰 그림자가 형체를 드러낸다. 그것은 끈질기게 달라붙은 욕심의 뿌리, 덕지덕지 달라붙은 욕망의 찌꺼기다. 내밀한 나와 거리가 멀어지면서 나는 내가 아닌 나로 변해있었다. 내 자신의 거리두기는 사회적인 거리두기와는 다르다. 거리두기는 거리 좁히기다. 나는 나와 내 안의 나를 밀착시키고 싶다. 이제 내밀한 나를 찾아야 한다.

지금처럼 개나리꽃이 만발한 봄이었다. 밭둑이었을까, 논둑이었을까. 아니 듬성듬성 선 나무 아래 풀밭이었다.

내기할까? 바구니에 먼저 가득 채운 사람이 이기는 거야.

친구와 나는 마주보며 활짝 웃었다. 손에 쥔 작은칼이 살짝 흙을 건드리면 뿌리에서부터 알씬알씬 쑥 향기가 올라왔다. 하얀 털이 보송보송한 어린순은 손으로 만지기도 아까웠다.

야, 이것 좀 봐. 진짜 예쁘지?

해가 이우면서 하늘 한 편이 주홍빛으로 물들어갔다. 쑥 바구니를 옆구리에 끼고 어깨동무를 했다. 내 유년의 성장기는 햇살이 부드럽게 반짝이는 봄날에 영글어졌다. 아, 또 다른 봄날이 있다. 쑥 바구니의 추억을 잉태한,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이삿날이다. 물론 모든 추억의 배경은 지명만 떠올려도 가슴이 뭉클한, 내 고향 순천이다.

시내 중심지에 살다가 4킬로미터쯤 떨어진 교외, 선친이 근무하던 학교 안의 관사로 옮기게 되었다. 이삿짐 트럭이 먼저 출발하고,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택시를 탔다. 나는 택시에 앉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아스라이 동네가 멀어질수록 친구들의 모습이 더 또렷하게 눈에 달라붙었다. 다음날부터 그들을 볼 수 없다는 비애감에 절망했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에 뒤 차창이 어루러기졌다. 내 생애의 첫 경험인 애별리고(愛別離苦)였다. 그때는 몰랐다. 새 친구와 쑥 바구니를 끼고 희희낙락 나풀댈 줄을.

순수한 한때였다. 깊은 산사의 계곡물처럼 청량한 시절이었다. 순수의 시대는 언제 어디서나 마음을 다독여주고 용기와 희망을 부여한다. 그렇다. 내밀한 나는 추억 속에 잠재해 있었다. 추억은 삶의 보고라는 말이 실감난다. 추억은 삶에 찌든 내 욕망의 때를 순식간에 벗겨주는 것 같다. 추억과 해후하면서 때늦은 삶의 기대감이 솟구친다.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얻은 힌트로 모처럼 내 안의 나와 거리 좁히기에 성공했는가. 참, 내일은 집에서 또 무엇을 할까.

아침에 영화감별사인 한동원의 글을 조간신문에서 읽었다. ‘이 시국에 적절한, 30년 집돌이 생활의 노하우’라는 타이틀이 시선을 끌었다. 그는 <모리의 정원>과 <남극의 쉐프>, 두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모리의 정원>은 그림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실존 일본화가 구마가이 모리카즈가 아내와 함께 30년 동안 살았던 집의 정원 이야기다. 모리 부부와 정원에 사는 도마뱀, 딱정벌레, 나비, 송사리, 수국 같은 평범한 벌레나 식물, 작은 연못 같은 평범한 장소가 영화의 주인공이다. 지극히 평범한 집에서 30년 동안 유유자적한 자택 격리가 요즘 우리 국민들에게 어느 정도 위무를 주지 싶다고 한다. 이 소박한 정원조차도 마당 한 뼘 없는 아파트인들에게는 위화감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추천한 영화가 <남극의 쉐프>다. 이 영화는 격리의 극한이 엿보이는, 좁고 갑갑한 남극기지 실내에서 진행된다. 1년 동안 문 밖 출입이 억제된 여덟 사람이 지루함과 외로움과 고립감에서 저항하며 꽃피워낸 이야기다. 무엇보다도 식욕을 도발하는 음식 클로즈업이 자주 나온다. 친절한 그는 두 편의 영화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집중하지 않고, 배경음악처럼 틀어놓고 느긋하게 볼 수 있는 영화이다, 라고.

내일의 계획은 그가 추천한 한 편의 영화보기다. 보지도 않은 영화의 장면들이 슬슬 머릿속에 나타난다. 혹여 내가 실제와 허구의 경계선을 뛰어 넘었을까. 게다가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걸로 보면, 위안까지 받았는가. 슬쩍 입 꼬리가 올라가는데 돌연 낯선, 아니 낯익은 장면이 눈을 가린다. 119 구급차가 날카로운 굉음을 지르며 전속력으로 내달린다. 뜻밖에도 보이지 않던 내 마음자리의 한 틈이 보인다. 진땀이 난다. 어리석기가 하늘을 찌른다더니, 여태 나는 사치를 부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나 ‘집 안 머물기’가 무슨 대수인가. 음압병실, 자가 격리 중인 사람, 의료진들의 고통과 고충에 비하면 이런 일상은 누워서 떡 먹기인 것을.

나는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서 속살거린다. 심히 부끄럽지만, 그래도 나는 내 자신을 좀 알긴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여력은 사회적 거리두기의 실천뿐이라는 것을요. 그 지침을 철저히 준수하면서 간간이 추억을 되새기고, 영화도 보고……. 집에서 꼭꼭 잘 지내려면 꽤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인데, 아닌가요?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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