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를 눈앞에 둔 황창석(黃昌石) 노인은 정년규정도 없는 조그만 인쇄소를 그만두고 하루 쉬고 하루 노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이는 고추장에 밥을 비벼먹다 말고 불현듯 고추장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거그 우창고추장 회사 맞지요?
예.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신가요?
큰 회사가 그러시면 안 되지라잉!
고객님, 저희 제품에 무슨 하자라도 있나요?
아니 고것이 아니고, 방금도 우창고추장에 비벼 묵으니께 밥맛이 참말로 좋습디다.
아 그래요. 그 말씀 하시려고 전화까지 주셨습니까? 저희 제품을 애용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감사하고 말고는 뭐 그렇고, 꼭 알고 싶은 것이 하나 있소.
무슨 말씀이신지?
우창고추장 상호는 대체 누가 지었소?
그건 왜 물으시나요?
그야 물어볼만 하니께 물어보는 거 아니요?
꼭 그것을 아셔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있다마다요. 이래 봬도 내가 평생을 식자공으로 뼈가 굵은 사람이요.
식자재라구요? (전화 받는 직원은 식자공植字工이라는 낱말이 무척 낯선 모양이다.)
아니, 이 사람 식자공도 모르남? 지금도 서울 을지로 인쇄골목에 가면 옛 식자공들 천지요. 젊은 양반, 팔만대장경 알어요?
왜 갑자기 팔만대장경 말씀을 하시나(요)? (직원은 스멀스멀 짜증이 올라온다.)
우리는 비록 기름때 묻혀가면서도 글자 하나하나에 온힘을 다 바쳐 인쇄를 하곤 했지. 팔만대장경을 찍는 기분으로 활자를 만지면저 겁나게 자부심을 갖고 일을 했거든.
죄송합니다만, 고객님과 잡담이나 할 시간은 없으니 이만 끊겠습니다.
잡담이라니! 한 가지만 더 묻겠소. 우창고추장 창업주가 누구요?
대체 저희 회사 사장님을 아셔야 할 이유가 뭡니까?
당연히 이유가 있지. 우창고추장이라는 상호에 우리 아버님 성함과 내 이름 중에서 각각 한 글자씩 들어가 있단 말이지. 집 우(宇)에 창성할 창(昌) 우창고추창. 날로 번창하는 회사가 되라고 그렇게 회사이름을 지은 것 아니요?
그게 어때서요?
이 사람 참. 지적재산권도 모르시나?
지적재산권? (이제 직원도 반말투다.)
남의 이름을 갖다 쓰면 쓴다고 말씀을 하셔야지.
글자가 무슨 주인이 따로 있다고 그러시나?
777사건도 몰라요?
그건 또 뭔 소리입니까?
우리나라 쓰리세븐 777손톱깎이 회사가 미국의 보잉 쓰리세븐 항공기 제작사와 소송이 붙었었잖여. 777이 서로 자기 것이라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상호 간에 수억원의 소송비가 들어가고 결국 양측에서 조금씩 양보하여 777 숫자 디자인을 약간씩 바꾸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니께.
수억원의 소송비 어쩌고 하는 말에 직원은 조금은 겁이나는 듯 말을 얼버무리더니 전화통화 내용을 사장께 그대로 전달하겠다고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며칠 후 황창석 어르신에게 우창고추장 회사로부터 택배가 하나 도착했다. 선물용 고추장 세트에는 사장 명의의 메모가 함께 들어있었다.
"글자 하나도 사랑하시는 고객님의 세심한 마음처럼 저희 우창고추장에도 혼과 정성을 그득 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