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안식처⑤】서울 도심여행-젊음의 성지, 대학로에서 조선 최고의 국립대학 성균관까지3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4.24 11:56
  • 수정 2020.04.24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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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50+센터, 시니어들과 떠난 여행

한국 유학의 산실이며 사적 제 143호 ‘문묘(文廟, 대성전大成殿)’

(성균관 뜨락, 뒤로 천연기념물인 은행나무와 명륜당이 보인다. 사진=윤재훈 기자)
(성균관 뜨락, 뒤로 천연기념물인 은행나무와 명륜당이 보인다. 사진=윤재훈 기자)

“정승 10명이 죽은 대제학 1명에 미치지 못하고,
대제학 10명이 문묘 배향 학자 1명에 미치지 못한다.”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성균관(成均館, 명륜당明倫堂, 주지번의 글씨)’에 이어 한국 유학의 산실이며 사적 제 143호로 지정된 ‘문묘(文廟, 대성전大成殿, 한석봉 글씨)’ 앞에 섰다. ‘대성(大聖)이 아니라 대성(大成)이다.’ 성인이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룬 존재’라는 인식이다. 그 시절 유학자로서 문묘에 공자와 함께 배향된다는 것은 본인은 물론 가문 최대의 영광이었다. 종묘의 공신각에 배향 되는 것과 같다. 마치 명예의 전당에 들어서는 듯 할 것이다.

(대성전의 모습. 사진=윤재훈 기자)
(대성전의 모습. 사진=윤재훈 기자)

마당 좌우에 있는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는 중국 94현과 동국 18현의 위패를 나누어 모셨으나, 1949년 유림대회의 결정으로 동국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으로 올리고, 중국 위패는 땅에 묻어 안치되었다. 그 후로 동무와 서무는 비어있는데 이는 ‘민족주의의 반영으로 보거나, 향사(享祀제사)를 간소화’하기 위해 한 곳에 모신 것으로 생각된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를 정위(正位)로 해, 첫째 줄에 4대 성인(안자, 증자, 자사, 맹자), 둘째 줄에는 공문(孔門) 10철(공자의 10대 제자), 송조 6현(송나라 때 성리학을 완성한 주희 등), 셋째 줄에는 동국18현(신라, 고려, 조선조의 명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는 1949년 전국유림대회의 결의에 따라 결정됐으나 심각한 논의와 엄청난 찬반론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으며, 많은 문중들 반발을 사고 있다. 아마도 논의와 결정과정은 조선시대 유학사 내지 정치사를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여기에 모셔진 사람들을 보면 신라시대에는 설총, 최치원이 있으며 고려는 안향, 정몽주, 조선 전기는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성혼, 이이가 있다. 그러나 이이는 한때 승려 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출향, 재배향이 되고 있으며, 조선 후기는 조헌,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 박세채 등이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 졌으니 그 시절의 인물들이 가장 많다.

(서무(西廡)의 모습. 사진=윤재훈 기자)
(서무(西廡)의 모습. 사진=윤재훈 기자)

그러나 이런 문중들의 이해관계는 국민적 합의를 얻지 못해 일반인의 상식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뜻있는 사람들은 갈수록 성균관을 들어온 것을 수치로 여긴다면 안타까워하고 있다.

마당에는 몇 그루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대성전 월대 앞에는 측백나무 두 그루 있는데, 오른쪽 나무는 줄기가 5개로 뻗어 올라가고, 전사청 대문 앞에 잣나무는 세 줄기로 자라 마치 삼강오륜에 빗댄 것 같다고 한다.

사원의 배치도 보면 가람(伽藍) 배치와도 닮은 점이 있는데, 부처님을 모신 사찰에 해당되는 것은 문묘이며, 대웅전은 대성전, 보살들을 모신 관음전과 지장전은 성현들을 모신 동무, 서무가 해당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유교는 종교가 아니다. 이를 도식화해보면,

불교-사찰-대웅전-관음전, 지장전(보살들을 모심)

유교-문묘-대성전-동무, 서무(성현들을 모심)

조선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성균관이 건축된 속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1392년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개경의 수창궁에서 조선왕조의 문을 연 이성계는, 불과 3년 뒤인 1395년 한양으로 천도하여 종묘와 사직, 궁궐(경복궁) 등을 차례로 짓는다.

그리고 수도를 천도한지 불과 2년 만인 1397년 2월 도평의사사에 명해 성균관 터를 선정하게 하고, 다음 달에 바로 공사를 시작하여 1398년 7월에 준공한다. 총규모는 크고 작은 칸수들을 합쳐 96칸 이었다. 그러나 지은 지 불과 1년 반 만인 1400년 정종 2년에 불타버려 쓸쓸하게 터만 남아 있다가, 1407년 태종 7년에 재건하였다.

조선의 왕들도 성균관에 많은 신경들을 썼으며 특히 태종은 땅과 노비를 지급하고 친히 문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왕세자의 입학을 명령하니, 그 후 이것이 전통이 되었다. 여러 왕을 거치는 동안 경기도 연해의 섬, 전라남도 해안의 어장과 많은 땅까지 부속되었다.

유생들은 이곳에서 숙식은 물론 공부에 필요한 종이, 붓, 먹까지 전부 국가에서 제공받는 국가 장학생이었다. 그들은 그런 특별한 혜택 속에서 어려운 민중들을 위해 얼마나 지식인의 책무는 다했을까, 궁금해진다.

 

성균관 유생(儒生)이 되기 위해서는

(대성전 뜨락, 동무와 서무가 보인다. 사진=윤재훈 기자)
(대성전 뜨락, 동무와 서무가 보인다. 사진=윤재훈 기자)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소과에서는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가 있었고, 진짜 과거시험인 문과와 무과는 대과(大科)라고 불렀다. 대과(大科)의 문과, 무과에 모두 합격하면 홍화씨 등으로 붉게 염색한 종이로 된 홍패 합격증을 받았으며, 소과인 생원, 진사시험 합격자에게는 흰 종이로 쓴 문서인 백패(白牌)를 주었다.

그러나 합격하고도 실제로 생원이나 진사로 성균관에 입학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갈수록 운영이 부실해지고 원칙대로 운영되지 않아 300일간의 정규과정을 마치지 않아도 문과에 응시하거나, 유력가문의 자제들은 생원이나 진사가 아니어도 바로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예외적인 길이 처음부터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들을 유학(幼學)이라 불렀는데 조선 초기에는 이런 ‘유학 급제자’들의 비율이 15% 미만 이였으나 영·정조 대에 이르러 70%대에 가까웠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는 소과 응시자가 고령자가 많아져 7, 80대의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성균관은 교학(敎學)이 분리되지 않아 유학이면서 동시에 유교(儒敎)였다. 오늘날의 국회처럼(?) 치외법권 지역이어서 죄인이 숨어도 포졸들이 들어가지 못했다. 입학하면 균역이 면제되었기 때문에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생원, 진사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라에서는 학생들에게 장래의 동량(棟梁)으로 예우를 다해주었다. 그리고 국가의 난제가 생기면 유소(儒疏유학생 상소)할 수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 권당(捲堂단식투쟁)을 하고 그래도 관철되지 않으며 공관(空館동맹휴업)을 하였다. 오늘날의 대학과 비슷했다.

그러나 유생들의 상소행렬은 민폐(民弊)의 표본이었다. 그들이 출발할 때면 먼저 재직과 성균관의 무뢰배들이 무리지어 가면서 시장 상인들의 물건들을 빼앗거나 몽둥이를 휘두르면 난동을 부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시장 사람들은 상소를 올린다고 하면 아예 가게 문을 닫은 뒤 숨어 버렸다. 또한 아무리 대신이라 하더라도 상소를 올리는 유생들 대오 앞에서 감히 말을 탈 수가 없었다. 청춘들은 이렇게 국가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지만, 끓어오르는 혈기 속에 일어나는 돌발적인 행동이나 비행, 시험부정 등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명륜당 마당에 서있는 천연기념물 제 59호 은행나무. 사진=윤재훈 기자)
(명륜당 마당에 서있는 천연기념물 제 59호 은행나무. 사진=윤재훈 기자)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만 우선적으로 입학기회를 주었으며, 그 외 선발시험인 승보나 음서를 통해 뽑았다. 정원 200명이었으나 유동적이었다. 선생님 및 직원은 40여명이었으며 노비들이 많을 때는 500여명이나 되었으며, 대부분 밖에서 사는 외거노비였다.

성균관은 연산군 때 한차례 고난를 당했지만 중종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다시 복원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잿더미가 되는 수난을 또 겪는다. 1601년 선조 34년에 대성전이 먼저 중건되었고 선조 39년에 명륜당까지 재건되었다. 인조대왕 때 나머지 전각들을 차례로 개수되면서 완전히 정상을 되찾았다.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교육기관들

조선의 학제는 초등교육은 사설교육기관인 <서당>에서, 중등교육은 전국의 모든 군과 현에 설치된 관립(官立)교육기관인 <향교>와, 서울에서는 학당으로 불리던 국립교육기관인 <사학(四學)>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16세기부터 발달한 <서원(書院)>은 성균관과 유사한 수준의 교육을 담당하였지만 그곳은 어디까지나 사립교육기관이었다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교육기관들을 살펴보면, 관리임용제의 시초로는 788년 신라 원성왕 4년에 창설된 <독서삼품과> 들 수 있으며, 고구려 때는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태학(太學)>이 있었다.

과거제도가 처음으로 채택된 것은 958년 고려 4대 왕인 광종 9년 후주인으로서 고려에 귀화한 한림학사 쌍기의 건의로 의해 시행되었다. 고려의 최고 교육기관으로는 개경에 세워진 국자감이 있다가 충렬왕 24년(1298년) 성균감으로 바뀌었다.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성균관으로 개명했다가 1356년 공민왕 5년 국자감으로 환원되었으며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복귀되었다.

조선왕조가 끝나가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강학기관으로서 성균관의 기능은 끝났고, 문묘의 제향만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봄가을 변함없이 석전제(釋奠祭)가 열리고 있다. 석(釋)은 베풀다, 차려놓다의 뜻이며, 전(奠)은 추(酋)와 대(大)의 합성어이다.

추를 가만히 보면 술항아리에 덮개를 덮어놓은 형상이고, 대는 물건을 얹는 받침대를 상징해 ‘제주(祭酒)항아리’를 대에 올려놓는다는 뜻으로, 제사 지낸다는 의미이다. 세계문화유산인 <문묘제례악>과 <종묘제례악>은 그 분위기가 비슷하나 악기편성이나 노래 가사인 악장 등이 전혀 다르다.

(동재(東齋) 기숙사. 사진=윤재훈 기자)
(동재(東齋) 기숙사. 사진=윤재훈 기자)

세계는 바야흐로 관광의 시대

세계의 관광지에서 중국인들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2014년쯤부터나 그 양상이 완전히 바뀐 듯하다. 세계 어느 여행지를 가나 중국어가 들려왔다. 아니 단체로 몰려다니는 여행객들을 보면 대부분 중국인 이였다.

세계 제일이라는 스스로 자화자찬하는 고속철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면 그 느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덜컹거리는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담배를 피우며 기차 바닥에 가래침을 뱉고, 악을 쓰듯이 대화를 하던 그런 풍경들도 이제는 사라진 듯하다. 기차 바닥에 가래침을 뱉던 모습은 정말 적응이 안되어었다. 물건을 사면 잔돈을 집어 던지던 모습도 볼 수 없다.

바야흐로 공산주의 보다는 자유주의의 물결 속에 국민들이 체화 되어가는 느낌이다. 특히나 중국에 여대생들은 너무나 친절해 감동을 받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랜 여행 속에서 그들을 보면서 중국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었다. 세계는 갈수록 관광을 국가의 최우선 사업으로 밀고 나가는 나라들이 많아지면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춘절을 맞아 만학의 봉우리로 둘러싸인 중국 구이린(桂林)의 고도에서 용춤을 추고 있다. 사진=윤재훈 기자)
(춘절을 맞아 만학의 봉우리로 둘러싸인 중국 구이린(桂林)의 고도에서 용춤을 추고 있다. 사진=윤재훈 기자)

태국 같은 나라는 국민 총수입에서 관광의 비중이 가장 크다고 한다. 가끔 돌림병이나 국가들의 역학관계에 따라서 약간씩 주춤할 때가 있지만 이는 앞으로 더욱 가속될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수십 억 중국인들을 잡아둘 역사적 유물들이 아주 많다. 특히나 우리가 오랫동안 사대(事大) 해온 터라, 보존 상태도 다른 것들의 비해 좋은 상태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점도 많아,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도 않다..

위정자들에 따라 약간 명암이 있기는 하지만, 중국인들이 가장 큰 위인으로 모시는 공자를 가장 상전에 모신 성균관도 있다. 또한 중국인들이 최고의 토착신으로 섬기는 관우장을 모신 보물 제 142호로 지정된 <동관왕묘>까지 있다. 관우하면 바로 연상되는 소설이 있다. 바로 <삼국지>이다.

우리들의 어린 날 삼국지는 너나 할 것 없이 최고의 고전이었다. 유비, 관우, 장비가 봉숭아꽃 아래에서 도원결의(桃園結義)한 유래에서는 얼마나 우리 어린 가슴들을 열망으로 들끓게 했던가. 서로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 한 구절 알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다.

어느 여름날이었던가, 명절날 큰집에서 할아버지가 머리맡에서 해주시던 삼국지 이야기를 듣다 잠들던 때가 생각난다.

세상에는 세 가지 유형의 장수가 있는데, 그중에서 장비 같은 용장(勇將)이 가장 대단하다. 그런데 그 보다 더 뛰어난 장수는 지장(智將)이라고, 힘과 지혜를 겸비해야 한다. 그런데 그 보다 더 뛰어난 장수는 덕장(德將)이라고 하셨다. 키도 가장 작고 몸도 왜소한 유비 밑으로 벼락같은 관우와 장비가 왜 그 휘하로 들어왔을까? 희대의 지략가 제갈공명까지?

옛날 우리네 시골마을을 가며 어느 곳이나 동구 밖에 당산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 그늘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 역시 이와 마찬가지리라.

장판교의 한 구절도 기억이 난다. “내 이놈 조조야”하고 내쏟은 ??소리에 조조군의 선두에 서있던 장수들이 속을 개우며 말에서 떨어졌다고. 마치 사자의 울음소리에 산천초목이 떨고 작은 짐승들이 창자를 내쏟고 쓰러진다고 하듯이.

우리나라 전역에 관우와 공자님의 흔적들은 많다. 문화유산인 동시에 중국인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커다란 관광자원이 아닐 수 없다. 하루빨리 더욱 다양한 스토리텔링으로 묶여 관광책자에 실리고 더 널리 홍보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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