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의 지구를 걷다③】페르시아 제국의 기원 '파사르가대'를 가다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5.07 11:46
  • 수정 2023.09.18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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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질 수 있으며 노예제를 금지하고,
궁궐을 짓는 모든 일꾼들에게는 급여를 지급해야 한다.”

 

위대한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

(키루스 대왕의 후예들. 사진=윤재훈 기자)
(키루스 대왕의 후예들, 촬영=윤재훈 기자)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페르시아 제국의 첫 번째 수도이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 <파사르가대>, 키루스 2세가 그 기초를 닦았으며 기원전 546년이나 아니면 그 이후로 추정되는 고대 도시. <페르시아>라는 세계사의 거대한 이름은 시라즈가 있는 <파르스>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국가라는 의미이다

1935년 팔레비 왕조가 이란으로 국호를 바꾸기 전까지 옛 이름이 우리에게는 훨씬 익숙하다. '열려라 참께‘, 알리바바의 주문이 금방이라도 들여올 듯하고, 신밧드가 양탄자를 타고 하늘로 올라갈 듯하다. 그 화려했던 과거를 되뇌이면 다시 한 번 번성할 그 날을 기다리며, 페르시아인들은 그 이름을 오랫동안 간직해 왔을까.

그 역사적 이름을 뒤로하고 팔레비 왕조는 자신들의 새로운 도약의 의지를 담아, ‘아리안 민족의 후예’라는 뜻으로 이란으로 바꿨다. 그리고 미국과 가까이 지내며 너무 급진적인 서구화,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부정부패를 일삼다 민심을 잃었다.

또한 너무 세속적으로 치닫다 보니 이슬람계 보수파 성직자들로부터 불만까지 터져 나왔다. 급기야 1979년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이란·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왕조는 붕괴되고 신정제를 확립한다. 그리고 시아파가 정치를 하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들어서고 미국과의 관계가 급속하게 냉각된다.

(페르시아 가장 전성기인 다리우스 1세 때 건축을 시작하여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완성한 페르세폴리스. 사진=윤재훈 기자)
(페르시아 가장 전성기인 다리우스 1세 때 건축을 시작하여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완성한 페르세폴리스, 촬영=윤재훈 기자)

역사를 따라가 보면 페르시아라는 이름은 이란 북서부에 있었던 고대국가 <메디아>에서 출발한다. 구약성서 다니엘서에는 <메대>로 불린다.

<키루스 대왕>에 의해 페르시아 제국과 병합되기 전까지 이란의 첫 번째 국가를 형성한 셈이다. 기원전 550년에 <아케메네스 왕조>가 나타났으며, 그 ‘기원전’에 벌써 민주주의 이룬 듯한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인 ‘키루스 원통’이 1879년에 발견된다. ,

“모든 시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질 수 있으며 노예제를 금지하고,
궁궐을 짓는 모든 일꾼들에게는 급여를 지급해야 한다.”

놀라운 안목이 아닐 수 없다. 그 시절에 이렇게 ‘선진적이고 합리적이며 온화한 성군이 나타날 수 있었다니.’

대왕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병합하며, 다리우스 1세 때는 최고의 광활한 국토를 가지게 되는데, 인더스강에서 유럽에까지 이른다. 중국을 제외한 그 당시 알려진 대부분의 문명세계를 차지한 셈이다.

이후 다리우스 1세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 때 그리스와 격돌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테네의 <마라톤 전투>와 스파르타 300명이 나라를 지켜낸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은 아케메네스 제국과의 전쟁을 말하는 것이다.

이후 세계사에 걸출한 전쟁 영웅으로 미화되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 대왕이 기원전 330년 다리우스 3세를 무찌르고 아케메니아 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이어받는다.
그렇게 쉽게 큰 땅을 복속할 수 있었던 대왕은 상당히 영리하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던 듯하다. 스스로 자신을 페르시아의 계승자라고 일컬으며 다리우스 3세의 장엄한 장례식을 해주고, 그의 딸 스타데이라와 결혼했다.

226년에는 사산 왕조가 나타나며 유럽과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게 된다. 그렇게 427년 동안이나 영위하던 왕조는 651년 야즈데게르드 3세가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암살을 당하면서, 그의 아들과 많은 유민들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것으로 이슬람 이전의 이란 역사는 사라지고 조로아스터교도 쇠퇴했으면 지금은 야즈드나 봄베이 등에서만 간신히 그 명맥이 이어져간다. 650년에 나타난 <이슬람 제국>은 그때까지 있었던 가장 큰 나라를 만들게 되는데, 지금의 스페인 땅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인도의 인더스 강까지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한다.

그러나 북동쪽에 있던 셀주크 투르크족에 침입하여 이슬람 제국이 흔들리게 된다. 1037년에는 셀주크 제국이 탄생 되지만, 1194년 마지막 술탄이 죽으면서 25년간 공백기가 된다, 그 후 1219년부터 259년간이나 그 땅에서 지속되는 <몽골제국 점령시대>로 들어간다.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정복의 싸움이며 전쟁의 광기로 점철된다. 한 대(代)만 지나가도 서로 뺏고 뺏기는 그 땅에 대한 욕심들은, 왜 그리 끊이지 않았을까, 단지 정복야욕만 가득 찬 한 사람을 위해서,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했는지.

"하늘을 날아가는 새들이나 떠가는 구름,
철조망 사이를 지나가도 걸리지 않은 바람을 바라본 정복자는 없을 듯하다."

(촌로들만 사는 이란의 옛마을 '아비안느', 촬영=윤재훈 기자)
(촌로들만 사는 이란의 옛마을 '아비안느', 촬영=윤재훈 기자)

이후 등장한 사파비 왕조(1507~1722)는 시아파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가장 큰 시아파의 나라를 만들었으며 오늘날 이란이 시아파로 이어지게 한다. 이후 수많은 왕조들의 분열기을 거쳐 1925년 팔레비가 왕조를 건국한다.

 

조로아스터Zoroaster(짜라투스트라)교의 발상지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에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민다라. 사진=윤재훈 기자)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에 있는 조로아스터교의 민다라, 촬영=윤재훈 기자)

이란은 고대 종교이자 인류 최초의 종교라고 알려진 짜라투스트라교의 발상지다. 기원전 5세기경 고대 그리스어로는 조로아스터이지만 페르시아어로는 짜라투스트라다. 중국에서는 불을 숭상한다고 하여 배화교(拜火敎)로도 알려진 가장 오래된 일신교(一神敎)이기도 하다.

조로아스터는 세계를 창조한 <아후라 마즈다>의 예언자를 자처하며 진리를 전파했는데, 그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가 하면 권력에 투옥되기도 했다. 이들 공동체 중 유명한 것이 파르시(Parsi, Parsee)다. 파르시는 ‘페르시아 사람들’, 혹은 ‘그들이 쓰는 언어’, 즉 페르시안(Persian)을 의미한다. 그러고 보니 페르시아라는 거대 제국이 탄생한 시라즈의 파르스 지역과 이름이 닮았다.

페르시아 제국의 강력한 사상적 기반이나 통치 이데올로기 등은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 그 교리는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하다. ‘바른 생각(正思), 바른 말(正言), 바른 행동(正行)’ 이니 바로 우리가 수천 년 배워왔던 유교의 전통이지 않는가. 그러니 그 뒤에 태어난 세계의 종교들은 모두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티벳의 조장(鳥葬)이나 기독교, 불교의 선사상 등도 가만 살펴보면 비슷한 점들이 많다.

 

그리고 대담하게 ‘신은 죽었다’를 외치면 영겁회귀로 순환되는 삶은 이야기 하며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외치던 니체도, 70~80년대 세계의 록음악을 풍미했던 영국의 유명한 밴드인 <퀸Queen>의 대표주자 <프레디 머큐리>의 아버지와 가족도, 이 종교에 심취한 파르시 공동체 일원이었다.

니체 여동생의 지지 아래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내세워 다른 민족들은 하위인간으로 보고 만행을 저지른 히틀러도 마찬가지다. 나찌의 표상과 불교의 만(卍), 십자가도 다 짜라스트라교의 지, 수, 화, 풍(地水火風)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에게도 지수화풍(四大)은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려 너무나 익숙하지 않는가.

제국의 가장 번성기인 다리우스 대왕 때는 국교로 지정되었다. 그렇게 모든 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화려했던 종교가, 지금은 왜 완전히 쇠퇴하여 소수의 사람들만 믿고 있는지 참 의문스럽기만 하다

 

<파사르가대>를 가다

(시라즈 외곽의 파사르가대, 키루스 대왕의 석곽무덤. 사진=윤재훈 기자)
(시라즈 외곽의 파사르가대, 키루스 대왕의 석곽무덤, 촬영=윤재훈 기자)

해발 1,900미터의 넓은 벌판 입구에 들어서자 2500여 년 동안 홀로 덩그러니 솟아있는 석묘 하나가 보인다. 주위에는 아무 것도 없이 독야청청(獨也靑靑)이다. 무덤은 6층으로 기단 상층부에 직사각형 모양의 적실이 있는데 길이는 3,17m, 폭은 2,11m, 높이도 2,11m로 길고 좁은 입구가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폐허로 만들고 이곳을 방문하여 부하들에게 무덤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고 한다. 안에는 황금 테이블과 잔, 황금 침대, 관이 있고 온갖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하니, 그 안에서도 황금에 휩싸여 영원한 영화를 누리고 싶었나 보다.
안내문에는 키루스 대왕의 시신은 황금관 안에 있으며, 그 옆에는 무기와 유품들이 같이 매장되어 있다.

“나는 아케메니아 키루스 대왕이다.”

라는 글자가 석각으로 새겨져 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들의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의 무덤으로 믿어 그렇게 전해진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테니,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는 대중 가사 한 소절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백골마저 다 풍화되어 탈골 됐을 시간, 수천 년 지축을 누르고 있었을 돌기단, 그의 후손들도 다 떠나가 버린 광활한 벌판 위에 홀로 누워있는 대왕의 자취는 쓸쓸하기만 하다

 

위대한 정복자, 키루스(Cyrus) 대왕

(페르세폴리스에 부조들. 사진=윤재훈)
(페르세폴리스에 부조들, 촬영=윤재훈)

대왕은 이곳이 고향으로 이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불리며 이란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리디아, 바빌로니아 등 주변국들을 잇달아 점령했으며, 다양한 왕조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통치했다고 한다.
바빌로니아를 점령한 후에도 칙령을 내려 끌려온 유대인들을 풀어주었다. 나아가 예루살렘성이 재건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으며, 자신의 군인들에게 점령지의 주민들을 약탈하거나 위협하는 행동을 금지 시켰다.
역사상 키루스대왕처럼 여러 민족으로부터 칭송을 받은 왕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찬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적군이었던 그리스에서도 오랫동안 위대한 군주로 추앙 받았다. 그리스 역사가 크세노폰(Xenophon)은 ‘비길 자가 없는 가장 위대한 세계 정복자’라고 했다.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도 최고의 역사서 <역사>에서

‘페르시아인들이 말하기를 다리우스는 상인이고 캄비세스는 장인인 반면,
키루스는 아버지라고 한다.
다리우스는 늘 어떤 결과나 이익을 중시 여겼고, 캄비세스는 거칠고 가혹했지만
키루스는 자상하게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고 기록하고 있다. 유대인들조차 그를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자’, ‘하느님의 목자’ 등으로 칭송했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알렉산더 대왕도 키루스 대왕을 위대하게 여겨 그의 무덤인 <파사르가대>만은 파괴하지 않았다.

(폐허가된 사라반세라이. 사진=윤재훈)
(폐허가된 사라반세라이, 촬영=윤재훈)

그런 그도 이슬람 교도들이 이란을 침입했을 때 아랍인들은 이 무덤이 이교도들에게 바친 것이라 하여 파괴하려고 했다. 그러나 무덤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슬기를 발휘하여 키루스 무덤이 아니라 솔로몬왕의 어머니 집이라고 하여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복군주는 다시 기원전 530년 경 대제국의 꿈을 안고 동방원정을 떠나다 꿈에 그리던 폴리스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길 위에서 세상을 마감했다. 그리고 <다리우스 1세>가 새로이 페르세폴리스로 수도를 정하기 전까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로 영화를 누렸다.

 

잔해만 남은 유적들

(무너진 영화가 덧없다. 사진=윤재훈)
(무너진 영화가 덧없다, 촬영=윤재훈)

이제는 그림자마저 한정 없이 길게 늘어지는 시간, 서둘러 멀리 보이는 사라반 세라이를 향해 걷는다. 다 허물어진 대상들의 집터에는 잡초마저 보이지 않은 건조한 땅이다. 벌판을 가로질러 가끔씩 여행자를 태운 수레처럼 생긴 차가 향수를 자극한다. 좌우로 멀리 기둥만 남은 잔해들이 보이는 걸 보니 저기도 무너진 터인 모양이다.

“인간의 넘치는 욕망는 나를 태우고 남까지 태운다.”

고요한 벌판을 홀로 걷는다. 푸석푸석한 흙먼지가 올라온다. 키 작은 풀들만 말라있고 물기 없는 땅은, 이방인을 더욱 낯설게 만든다. 다시 한 번 사철이 뚜렷하고 계곡이 깊어 물이 풍부한 고국이 생각난다. 일 년이 훨씬 넘은 여행길이 고향으로 마음을 가게하나 보다.
황량한 고대 도시, 빛바랜 안내판과 기둥 십여 개만 서 있다. 마침 청소를 한다는 대학생 몇 명마저 없었다면 빈 들판에 홀로 서 있을 뻔 했다. 다시 잠시 걸어가니 <Royal garden>이라고 써진 팻말이 나온다. 길게 뻗은 기단과 수로의 흔적이 없었다면 그냥 빈 들판이다. 그 흔적들로 먼 옛날에 이곳에 큰 성들이 있었구나 하고 가늠만 할 뿐이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스톤 타워, 촬영=윤재훈 기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스톤 타워, 촬영=윤재훈 기자)

멀리 위태로이 다리 아치처럼 보이는 돌기둥이 하나 서있다. 그 뒤로는 쇠파이프들을 받쳐두었는데, 바람이라도 한 번 불면 금방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다. 그 앞에는 <스톤 타워(Stone tower)>라고 써 있다.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서있는 돌기둥 둘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매우 불안하다.

(다리우스왕에 의해 태조 키루스왕의 꿈을 이룩한 페르세폴리스. 사진=윤재훈)
(다리우스왕에 의해 태조 키루스왕의 꿈을 이룩한 페르세폴리스, 촬영=윤재훈)

이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탈레 타크트(Tall-e Takht)>가 있다. 기원전 6세기에 지어진 이 요새는 자연 언덕의 한쪽 면에 지어진 거대한 미완성 플랫폼이다. 기원전 530년 사이러스 대왕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가 떠난 이후로 버려진 땅이 되었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닮았으며 궁전과 사원들이 있는 거대한 요새처럼 생겼다. 그리고 이 꿈은 후에 실제로 페르세폴리스에서 키루스의 후계자에 의해 실현을 보게 된다.

(기둥들만 쓸쓸한 관객 궁전Audience Palace. 사진=윤재훈)
(기둥들만 쓸쓸한 관객 궁전Audience Palace, 촬영=윤재훈)

멀리 오른쪽 편으로 돌기둥 몇 개와 무너진 잔해가 보인다. <관객 궁전(Audience Palace)>이다. 8개의 큰 방이 있었으며 테라스를 지지하는 기둥은 모두 검은 색 돌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북서쪽 문은 인간의 발과 독수리의 이미지 담고 있으며 16개의 기둥이 있는 테라스와 연결된다. 북동쪽 문은 총 48개의 기둥이 있는 가장 큰 테라스와 연결되며, 입구의 반대편인 남동쪽 문에는 인간, 물고기, 황소의 이미지가 있다.

여기서 쭉 가면 다리가 나오고 이 성터의 매인 게이트(Gate Way Palace)가 나온다. 이제 날도 저물고 어제 발까지 삐어 돌아갈 길이 막막한데, 멀리서 비포장 된 사잇길을 터덜거리며 오토바이 한 대가 온다. 관리인이라고 하는데, 고맙게도 문 앞까지 태워다 준다. 몇 번을 인사 하고 어둠 속에 쌓여가는 키루스 대왕을 바라본다.

‘빈 들판 위에 제국의 영화가 아스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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