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안식처⑦】 서울 도심여행_ 박물관 투어2 중앙박물관·전쟁박물관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5.19 11:30
  • 수정 2020.05.2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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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심여행_박물관 투어2 중앙박물관·전쟁박물관

영등포 50+센터, 시니어들과 떠난 여행

 

“눈 속에서 백 척 높이 우뚝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바람결에 긴 휫바람 소리 듣는다네.”

(자하 신위의 묵죽도. 사진=윤재훈 기자)
(자하 신위의 묵죽도. 촬영=윤재훈 기자)

 

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한글박물관과 중앙박물관 역사관을 본 우리는 이제 상설전시관 쪽으로 발을 옮기니 <자하 신위 탄생(1769) 250주년 기념 서화전, 자주빛 노을에 물들다 전>의 플랭카드가 보인다. 우리 화단에서 가장 뜨거운 화가 중의 한 사람이며, 김정희(1786), 강세황(1713)과 더불어 시, 서, 화에 모두 능해 조선시대 삼절에 속했던 <신위>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 세 가지 모두 최고 수준으로 성취한 인물은, 신위를 빼고 달리 찾기가 어렵다고 한다.
특히나 대나무를 잘 그렸으며 그가 남긴 ‘묵죽도’, ‘경수당전고’ 등 25건 85점 유품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그는 고전문학의 마지막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다. 줄기가 가늘고 시원하게 여백를 남겨두는 대나무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3부자가 합작한 <시령도>라는 작품도 있다.
강세황에게 묵죽을 배웠으며, 탄은 이정(1554), 수운 유덕장(1675) 등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묵죽(墨竹)화가로도 유명하며, 당시 권세가들도 그의 그림을 얻기 위해 찾아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림보다도 가슴 속에 대나무를 완성하는 것이 먼저다.”


그는 ‘흉중성죽(胸中成竹)’의 예술론을 폈는데, ‘예술에 앞서 먼저 인격을 닦아야 한다’는 깊은 내면을 담고 있다.

(소치 허련(허유)이 만년에 그린 '노송도'. 사진=윤재훈 기자)
(소치 허련(허유)이 만년에 그린 '노송도'. 촬영=윤재훈 기자)

그 옆으로는 <손세기, 손창근 기증 명품 서화, 안복(眼福)를 나누다 전>이 있다. 아버지 손세기와 아들 손창근은 대를 이어 수집한 문화재 202건 304점을 기증한 것을 기념하여 열리는 3번째 특별전이다.
이번 전시는 19세기 서화 수요층의 확장과 새로운 미감(美感)에 부응하며 김정희 및 직업 화가들이 개성적인 작품을 제작했던 양상들을 조명한다. 전시된 작품 중 절반 이상이 최초로 공개하는 작품들이다. 앞서 전시된 두 차례의 기증전(2018. 11. 23. ~ 2019. 3. 24./2019. 3. 26. ~ 7. 7.)에서는 정선鄭敾(1676~1759), 김정희金正喜(1786~1856)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서화가들의 명품을 선보였다


전시장 전면에는 초의선사의 소개로 김정희의 제자가 된 소치 허련(허유)이 만년에 그린 <노송도>가 큼지막하게 위용을 자랑한다. 열 폭에 종이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를 꽉 채웠는데, 둥치의 껍질과 구불거리는 가지 표현 등에서 노년기에 완숙하고 거침없는 노치의 표현이 묻어나오는 듯하다.
김정희는 상당히 까탈스러운 성품이었다고 하는데 스승이 제주도에서 9년간 유배생활을 할 때 3번이나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스승을 모시며 그림에 매진을 했다고 한다. 하여 그는 스승으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소치 허련만한 화가가 없다.”라는 칭찬까지 받았다.
또한 시골의 한미(寒微)한 출신으로 신분상승의 욕구와 중앙문화계에서 인정받기를 갈망한 소치는, 그 명사들과의 교유 내력을 자서전 『몽연록-소치실록』과 『속연록-소치실록』에 자세히 남겼다.
추사를 따라 궁궐을 드나들며 <헌종>이 준 붓과 벼루로 그림을 그렸으며, 흥선대원군을 비롯하여 당대 최고의 세도가 안동 김씨 문중의 좌장 김흥근, 민영익 등과도 교류를 나눴다.

“눈 속에서 백 척 높이 우뚝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바람결에 긴 휫바람 소리 듣는다네.”
-노치(老癡)(허련이 만년에 사용한 호)

그 이외에도 여항(閭巷)문인이자 서화가인 정학교(1832), 묵란도를 많이 그린 명성황후의 외척인 민영익(1860), 기행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장승업(1843), 서화와 금석학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키며 서화비평가이자 개화사상가로 활동한 오세창(1864)과 안중식(1861) 등의 작품이 눈여겨 볼만하다. 19세기에 활동했던 서화가들의 개성적 면모와 상호간의 영향관계도 살펴볼 수 있으며, 2층 영상실에서는 앞서 보여주었던 두 차례 기증전의 대표적인 서화 작품들을 보여주는 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베트남의 청동기문화를 대표하는 '청동북'. 촬영=윤재훈 기자)
(베트남의 청동기문화를 대표하는 '청동북'. 촬영=윤재훈 기자)

이번에는 한류열풍이 뜨겁게 몰아치며 우리 국민들이 두 번째로 많이 여행가는 나라, 많은 이민자와 유학생들이 오고가는 <베트남 국립역사박물관 소장품展>을 찾았다. 특히나 축구 감독 박항서의 영향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교류가 활성화 되고, 서로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는 나라 중의 하나다.

또한 베트남은 동남아의 국가 중 유일하게 우리와 같은 대승불교권이다. 전시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베트남 구석기 시대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시물을 놓여 있어 베트남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향유할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다.
특히 눈여겨 볼 것은 베트남의 청동기문화를 대표하는 <청동북>으로 베트남 사람들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상징물로 여겨진다. ‘처음 악기의 일종으로 개발되었으나 점차 지배자의 권력의 상징물이 되고 종교행사의 의례용이 되었다가, 무덤의 부장품을 거쳐 화폐로까지 이용기능이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br>(지그시 눈을 감고 묵상 중인 구원원초의 아미타 부처. 촬영=윤재훈 기자)<br><br> (지그시 눈을 감고 묵상 중인 구원원초의 아미타 부처. 촬영=윤재훈 기자)

(지그시 눈을 감고 묵상 중인 구원원초의 아미타 부처. 촬영=윤재훈 기자)

아미타 불상은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베트남 국립박물관의 허락을 받아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존처리를 했다고 하니, 문화 민족으로서 자긍심이 높아진다.

(높은 철기문명으로 강력한 군대를 유지했던 나라, ‘가야’. 촬영=윤재훈 기자)
(높은 철기문명으로 강력한 군대를 유지했던 나라, ‘가야’. 촬영=윤재훈 기자)

이번에는 기획전시관을 찾았다. 우리나라 남쪽 바닷가에서 장장 500년 이상 그 왕조를 유지했던 ‘공존과 화합’을 추구했던 나라 ‘가야’다. 가야금의 완벽한 하모니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나라. 철을 자유자재로 다루어 칼과 갑옷을 만들어 높은 철기문명의 수준를 자랑하며 강력한 군대를 유지했던 나라, <가야본성, 칼(劍)과 현(絃) 전>이다.

가야는 <전기 가야연맹>과 <후기 가야연맹>을 유지하며 발전을 거듭해 갔다. 전기 가야연맹시기에는 이 지역의 맹주로서 삼한 중 하나인 한반도 중남부 현재 김해시 위치하며, 490년이나 번성했던 변한의 금관가야(본가야, 구야국42~532)을 중심으로, 변한의 12개 소국들이 결집하며 성립되었다. 당시에 마한의 백제국이 백제로, 변한의 구야국이 가야로 진한이 사로국이 신라로 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1, 2세기에는 신라와 5차례 전투를 벌여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으며, 4세기 말 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한다. 그러나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종발성(400년, 부산 인근 추정) 공격으로 금관가야 중심의 전기가야연맹체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5·6세기 경 대가야(42~562년.520년 유지)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체재로 바뀐다.

그러나 4세기 이전 국제시장에서까지 번영을 누린 가락국(구야국)이 왜 강자의 패권으로 가야를 통합하지 않았는지 지금도 많은 학자들에게 의문사항으로 남는다. 국보 275호 기마인물형 뿔잔 등 2,600여점 작품들이 전시 되어 있다.

(핀란드 디자인 10,000년 전. 사진=윤재훈 기자)
(핀란드 디자인 10,000년 전. 촬영=윤재훈 기자)

특별전시관에서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박물관 개관 이래 최초로 열린다는 북유럽 전시회, [인간, 물질 그리고 변형 - 핀란드 디자인 10,000년 전]이다. 핀란드 디자인의 오랜 세월을 볼 수 있으며, 일상에 녹아든 도구에서 내일의 디자인 모형을 발견해 낼 수 있는 뜻깊은 기회이다. ‘물질에서 도구로, 도구에서 디자인으로’, 마치 핀란드 디자인의 원형을 찾아가는 여정 같다.

(사진=윤재훈 기자)
(촬영=윤재훈 기자)

특히 건축가 알바 알토의 <사보이 꽃병>, 피스카스 사의 <오랜지색 가위>, 마리에코사의 <요카보이카 셔츠> 등, 자연과 기술의 발전이 그대로 반영된 핀란드의 보편성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삼각지역_옛집 할머니 국수집

(‘옛집국수’ 가는 길. 사진=윤재훈 기자)
(‘옛집국수’ 가는 길. 촬영=윤재훈 기자)

배가 고파지면 구경거리도 점점 눈에서 멀어진다. 한참을 걸었더니 일행들도 슬슬 배가 고파오는 모양이다. 지난번에 사전답사를 와서 특별히 눈여겨 보아둔 집이 있는데, <옛집 할머니 국수집>이다. 몇 사람도 그 장소를 들어본 적이 있다고 한다. 이곳은 ‘아는 사람들에게는 유명한 집’이다.

박물관에서 <옛집 국수>로 가는 길에는 간간히 5, 60년 대 향수가 생각나는 그런 골목 풍경들이 펼쳐져, 아득한 옛 추억 속으로 잠기게 해준다.

(허름한 옛집 국수집. 사진=윤재훈 기자)
(허름한 옛집 국수집. 촬영=윤재훈 기자)

삼각지역 바로 근처에 있어 자그마한 길 초입에 들어서니 한 아주머니가 이 길이 대구탕으로 유명한 골목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대구탕집 간판이 붙은 식당이 서너 개 보인다. 어느 집에선가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듯하다.

(1967년에 불려진 배호의 출세작, ‘돌아가는 삼각지’)
(1967년에 불려진 배호의 출세작, ‘돌아가는 삼각지’)

이 노래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유독 서울의 지명을 소재로 많이 사용한 그의 노래들은 장르는 트로트지만 세련된 재즈 스타일 창법으로 불러, 촌스럽게만 느껴지던 국내 지명을 마치 파리의 세느강처럼 근사한 장소로 둔갑시키는 마술을 발휘했다.
또한 1963년에 만들어진 이 노래의 가사는 마치 1967년에 만들어질 삼각지 입체교차로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처럼 적중되어 세인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작곡가 <배상태 씨>는 노량진에서 전차를 타고 충무로로 가던 중 삼각지에서 한 사내가 비를 맞고 걸어가는 쓸쓸한 모습을 보고 만들었다. 그러나 이 노래를 부를 가수를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당대의 인기가수였던 남일해는 연습만 하다 말았고, 금호동도 구닥다리라고 거절했으며, 유망 신인가수였던 남진도 여의치 않았다.
작곡가는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청량리 인근에 살던 무명가수 배호의 허름한 전셋집을 찾아간 모양이다. 그러나 배호도 신장염 투병으로 건강이 나빠 거동조차 힘들어 처음에는 이 노래를 사양했다. 하지만 쓸쓸한 분위기의 가사가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아 가래를 뱉어가면 병상에서 노래의 녹음을 강행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이 노래는 1967년 세상에 빛을 보았고. 발매 후 20주간 차트 1위를 차지하는 최고의 히트를 기록하여 무명가수였던 배호를 일약 최고의 스타로 만들었다. 이후 ‘누가 울어’, ‘안개낀 장충단 공원’, ‘파도’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스타가수로서 입지를 굳혔다.

삼각지 로타리에 궂은 비는 오는데
잃어버린 그 사람을 아쉬워하며
비에 젖어 한숨짓던 외로운 사나이가
남몰래 찾아왔다가 돌아서는 삼각지

-배호, <울고 가는 삼각지>

10여분 걸어 좁은 골목으로 접어드니 공터가 나오고 빙 둘러 허름한 식당들이 몰려있다. 대부분의 집들은 한가한데, 그중에서도 유난히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집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옛집 국수>다.

(이제 한 그릇에 4,000으로 올랐다. 사진=윤재훈 기자)
(이제 한 그릇에 4,000으로 올랐다. 촬영=윤재훈 기자)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국수 한 그릇에 김치뿐이지만 그 역사가 무려 45년이나 되었다는 집, 매스컴에 몇 번 주목을 받았다는 곳. 처음 이 자리에 어머니가 탁자 4개로 시작 했다고 따님이 말한다. 지금은 아주머니 한 분을 데리고 운영하며 간간히 어머니가 나오시기도 하는 모양이다.

젊은 날 남편은 돌아가시고 아이들 셋 데리고 먹고 살기가 막막하여 시작하였다고 한다.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돈을 받지 않고 주다보니 그것에 감명에 받은 사람들이 많아지고, 누군가 외국에서 성공하여 할머니를 찾기 위해 SBS 방송국에 연락을 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주방 모습. 사진=윤재훈 기자)
(주방 모습. 촬영=윤재훈 기자)

문을 연 이래 대를 이어 이 자리에서 연탄불로 진하게 멸치 국물을 우려내고 있다고, 따님이 말한다. 어머니는 10년 넘게 국수 값을 2천원에 묶어놓고, 면은 무한 리필로 주었다고 한다. 벽면을 보니 지금은 그래도 4000원으로 올랐나 보다. 처음에는 한 칸으로 하다가 지금은 4개 칸을 합해서 하고 있다고 하니, 그 당시에는 얼마나 좁았을까 짐작이 간다. 여행은 낮술이 별미인데, 술은 팔지 않는다.

(삼각지역 뒷골목을 보니 배호가 생각난다. 사진=윤재훈 기자)
(삼각지역 뒷골목을 보니 배호가 생각난다. 촬영=윤재훈 기자)

서울의 한복판 삼각지역에서도 한 블럭만 들어가면 이런 골목길 풍경들이 펼쳐진다는 것에 정말 놀랍다.

 

전쟁기념관_유사 이래 우리 민족사의 슬픔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 곳

(전쟁기념관. 사진=윤재훈 기자)
(전쟁기념관. 사진=윤재훈 기자)

이제 <전쟁기념관>를 찾아간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그곳으로 가는 길은 뒷편 산길로 넘어가면 금방인데, 해방 후부터 70여년이 넘도록 미국부대 철조망이 가로막혀 있어 갈 수가 없다. 우리 국토 안의 외세를 느낄 수 있는 생생한 현장이다. 내 나라 땅도 맘대로 갈 수가 없으니 약소민족의 서러움이 뼛 속 깊이 저려온다. 지금은 새로운 평택기지로 이전 중이다.

아직도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 대한민국, 흰 옷의 아픔과 슬픔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 곳. 입구에서 들어서자 맨 먼저 보이는 것이 서로를 애절하게 안고 있는 <형제의 상>이다.

(전쟁기념관, ‘형제의 상’ 앞에서. 촬영=윤재훈 기자)
(전쟁기념관, ‘형제의 상’. 촬영=윤재훈 기자)

6,25 전쟁 당시 남측의 장교였던 형과 북측의 병사였던 동생이 전쟁터에서 운명적으로 만나 서로 얼싸안고 있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극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분단민족만이 느낄 수 있는 커다란 슬픔의 덩어리다. 문득 1983년부터 4개월 반여 KBS에서 진행되었던 <남북이산찾기>가 생각난다. 북에 있는 혈육을 애타게 찾던 가족들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울컥하다.

…내일일까 모레일까기다린 것이
눈물 맺힌 30년 세월
고향 잃은 이 신세를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가요
우리 남매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못다한 정 나누는데
어머니 아버지그 어디에 계십니까
목 메이게 불러봅니다
-잃어버린  30년

그런데 이 땅은 아직도 통일이 요원한 것 같다. 정파 간의 이데올로기를 교묘하게 조장하여 통일을 가로막고 있는 세력과, 청산되지 않은 친일 세력을 척결하는 것이 보다 큰 과제일 것이다.

아래 부분의 가운데가 동그랗게 깨진 채 상을 받치며 고분을 형상해 놓은 돔 모양이다. 그 찢어진 돔이 위로 갈수록 하나로 아물어지는 모습은 남북통일에 대한 소망이며, 전국에서 수집한 화강석 조각으로 쌓아 민족의 통합과 통일을 염원하고 있는 모습에 숙연함이 밀려온다.

멀리서 낯선 소리가 들리며 왁자지껄하게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들어온다. 오랫동안 세계여행을 하면서 나는 몇 달에 걸쳐 중국대륙을 동서로 횡단하고 서부 위그루지역을 남북으로 종단했다. 환영하는 의미로 그들에게 다가가 “니쉬 중구어 런 마?”하고 말을 거니 약간 경계하는 듯하더니 이내 환하게 웃는다. 2014년 정도가 지나면서부터 세계의 여행길에서 보이지 않던 중국 관광객들이, 몰려다니기 시작한다.

(전쟁기념관, ‘형제의 상’ 앞에서. 사진=윤재훈 기자)
(전쟁기념관, ‘형제의 상’ 앞에서. 촬영=윤재훈 기자)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쟁무기 박물관이라 한다. 콘크리트로 쌓아놓은 하얀빛의 거대한 전면 광장은 햇빛에 반짝이며 커다란 분청사기접시라도 엎어놓은 듯하다. 그 앞으로는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를 지원해 주었던 나라들과 육·해·공군의 깃발이 무리지어 펄럭이고 있다. 가끔씩 외국인 관광객들이 보인다.

원래 이 자리에는 대한민국 제 7보병사단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 처음 창설된 위치이며, 바로 옆에는 국방부가 있고 근처에는 그것보다 훨씬 거대한 땅에 미군기지가 있다.

(감격적인 서울 수복. 촬영=윤재훈 기자)
(감격적인 서울 수복. 촬영=윤재훈 기자)

"타국(他國)의 이익을 생각해 주는 나라는 없다."

이 깃발을 다시 올리기 위해 동족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가? 외세의 협잡에 의해 분단이 고착화 되고 민족은 얼마나 반목(反目)하며 피눈물을 흘렸는가?

1층에는 일제 시대 과정까지 볼 수 있으며, 2층에는 6,25 전쟁 관련 자료들, 3층에는 유엔군 참전과 전쟁 관련 기념품, 해외파병, 국군 발전사 등을 볼 수 있다. <3D영화관>이 무료로 운영되고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보고가도 좋을 것 같다.

뒤쪽 광장으로 나가면 전투기, 탱크, 대포. 함정을 비롯한 수많은 야전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어 아이들과 즐기기에 좋다. 또한 박물관 초창기에는 전통혼례 예식장으로 쓰이던 곳이 지금은 어린이 박물관으로 바뀌었으니 특히 자녀들과 함께 온 사람들은 들려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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