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채운의 스카이가든 5] 복고풍으로

권채운 작가
  • 입력 2020.05.22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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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채운2001년 제4회 '창작과비평' 신인소설상 당선      소설집 [겨울 선인장] [바람이 분다]
권채운
2001년 제4회 '창작과비평' 신인소설상 당선
소설집 [겨울 선인장] [바람이 분다]

또 보고 있네? 벌써 몇 번째야? 주말 드라마도 안 보면서 그게 그렇게 재밌나? 물 마시려고 나왔던 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제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이상하다. 왜 자꾸 보게 되는 걸까. 자꾸 보는 나도 그렇지만 채널을 바꿔가면서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방영을 하는 걸 보면 나 같은 시청자가 꽤 많다는 계산이 나온다.

‘응답하라 1988’. 제목 탓에 자꾸 응답하듯이 TV 앞에 앉는지도 모르지만 ‘응답하라 1997’이나 ‘응답하라 1994’에는 내 속의 무언가가 전혀 응답하지 않고 오로지 ‘응답하라 1988’에만 응답한다. 보고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그것이 무엇일까.

지금은 없고 그때에만 있었던 그 무엇이 무엇일까.

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사람이 길고도 긴 봄을 보내고 있다. 윤년이라서가 아니다. 다른 해 같으면 설날 지나고 여행 한 번 나갔다오고, 춘설이 한번 내리고 나면 금세 봄이 지나가 버렸다. 인터넷으로 온 세상이 하나가 되더니 바이러스도 덩달아 온 세상을 국경도 없이 넘나든다. 사스니 메르스니 코로나까지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오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사스 때도 메르스 때도 한바탕 난리를 치렀지만 생긴 꼴값을 하는 코로나만큼은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더 무서운 바이러스가 사통팔달하던 세상의 길을 막아 버렸다.

집에 있으라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절대 가지 말라고, 애들뿐 아니라 정부에서까지 문자로 닦달을 하니 하루 종일 TV에만 붙어 앉았을 수밖에 없다.

지상파채널에서는 쉬지도 않고 코로나19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은 사람도 가엽고,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도 가엽고, 신혼여행 갔다가 도로 쫓겨 온 신혼부부들도 가엽고, 애를 맡길 데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맞벌이 젊은이도 가엽고, 책가방 메고 거실에서 방으로 왔다 갔다 하며 학교 갈 날만 기다리는 아이들도 가엽고, 손님이 뚝 끊어져 생계가 막막한 상인들도 가엽고, 소일할 곳 없어 삼삼오오 양지쪽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늙은이도 가엽다. 아니 우리 모두가 가엽다.

난생 처음 겪는 생난리 통이다. 피난할 곳이라고는 제집뿐이니 TV가 유일한 낙이다. 나이 탓일까. 출생의 비밀과 불륜이 난무하는 막장 드라마는 식상하다 못해 짜증이 일어서 보다말고 채널을 돌려 버린다. 차라리 수십 년 전에 방영했던 ‘전원 일기’가 훨씬 낫다. 레트로니 뉴트로니 하면서 젊은이들도 옛것을 찾아보는 눈치다.

유튜브로 재생된 오랜 전 가수가 멀리 미국 땅에서 레스토랑 서빙으로 살아가는 걸 단번에 소환해서 광고판을 누비는 스타로 재탄생시키는 놀라운 세상이다. 방송에서 소개하는 그 가수의 옛 영상을 보니 패션도 음악도 한참 앞서 있다. 요즘 패션과 비교해도 전혀 놀랍지 않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너무 앞서 갔던 탓에 빛을 내지 못하고 진흙 속에 묻혀버렸던 가수다. 이제라도 세상을 한껏 나는 모습에 절로 박수가 나온다.

‘응답하라 1988’ 속에는 출연자들을 감싸고도는 특유의 정서가 있다. 음식 그릇이 담장을 넘나들면서 이웃은 자연스레 가족보다 더한 우애로 묶여졌다. 함께 울고 웃으며 어려운 일이 닥치면 누구라 할 것 없이 내 일처럼 발 벗고 나서서 돕는다.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는 예전의 따뜻한 삶의 모습이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그 시대로 돌아가서 살라고 하면 살 수 있을까. 자다가 일어나 연탄을 갈아야 하는 것은 별일도 아니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마당에 널브러져 사경을 헤매는 끔찍한 일도 일어났다. 머리를 감으려면 반드시 물을 데워야 했고, 선풍기 하나로 온 가족이 여름을 났다. 오랫동안 부은 적금을 타던 날 잔치를 하고, 반 지하 셋방에서 이사 나오는 날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자꾸 뒤돌아보았다. 제아무리 복고풍이 어쩌니 해도 과연 그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있으려나. 우리는 돌이키기 힘든 편안함에 깊숙이 길들여진 지 너무 오래 되었다.

우리는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많은 변화에 직면했다. 앞으로의 세상은 절대로 지금과 같은 세상으로 이어가면 안 된다는 것을 경험했다. 어쩌면 우리는 지대한 불편함을 감내하더라도 옛 세상으로 유턴할는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몸이 고단하더라도 마음에 훈훈한 정이 넘치던 그 시대로. 그때에는 ‘코로나19’ 같은 공포의 바이러스는 아예 한 발도 내딛지 못하던 순수의 시대였다.

이번에는 ‘전원일기’다. 아릿한 농촌 풍경과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버린 탤런트의 앳된 모습을 보는 맛도 즐겁다. 딸이 또 방에서 나와 뭔가 한 마디를 던지는 것 같은데 귀에 와 닿지를 않는다. 딸이 내 옆에 주저앉는다. 나도 레트로 좀 즐겨볼까?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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