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의 지구를 걷다⑤] 페르시아 제국의 상징, 페르세폴리스를 가다 1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6.05 14:10
  • 수정 2020.06.05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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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시아 제국의 상징_페르세폴리스 1

(나무 한 포기 없는 암산(巖山), 라흐 쿠이마트 기슭에 자리잡은 사라진 제국. 사진=윤재훈 기자)
(나무 한 포기 없는 암산(巖山), 라흐 쿠이마트 기슭에 자리잡은 사라진 제국. 촬영=윤재훈 기자)

스위스 청년과 중국아가씨와 함께 1인당 10유로씩을 내고 택시를 하루 빌렸다. 언뜻 스쳐가는 주유소 팻말에 1L, 1만 리알(80원 정도)이다.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 다음에 드는 생각은 과연 산유국답다는 생각이다. 물처럼 나오는 것일까? 여하튼 물값 보다 싸다.

카스피해 연안 국가들에서는 기름이 물처럼 나온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 바닷가에서 기름이 줄줄 흘러내리던 갯바위들을 보고 소름이 끼쳤던 기억이 난다.

검색을 해보니 한국은 지금(여행 당시) 2299원이다. 거의 30배 가까운 수준이다. 차를 비행기에 실고 이 나라에 와서 운행할거나. 그래도 기사님은 ‘외국인에게는 싸고 현지인에게는 비싸다’고 한다. 하긴 트럼프 대통령의 제재로 얼마나 살기가 힘들까.

(스위스 청년, 중국아가씨와 이란인 기사, 아크로폴리스에서 그가 준비한 차와 크랙커를 먹으며. 사진=윤재훈 기자)
(스위스 청년, 중국아가씨와 이란인 기사, 아크로폴리스에서 그가 준비한 차와 크랙커를 먹으며. 촬영=윤재훈 기자)

택시기사 이름이 <알리>다. 다음에 아들을 나면 <래자>로 하고 그다음 <후세인>으로 하라며 가벼운 농담을 나누었다. 전부 ‘이맘'들의 이름이다. (이맘이란 아랍어로 ‘지도자’,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을 의미, 이란을 이슬람 국가로 만든 호메이니나 그의 후계자인 현 하메네이도 스스로를 ’이맘‘이라 부른다) 미국은 지금 이란을 세계에서 가장 과격한 나라라고 하며 금방이라도 전쟁을 일으킬 것처럼 경제제재를 하고 몰아 부친다. 원유선들이 지나가는 호루뮤즈 해협도 봉쇄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런데 정말로 이란인들은 그렇게 ’급진적‘인가?

무슬림에는 <시아, 순니, 수피파>가 있다. 그중 이란은 대부분 <시아파(Shia)>이며 여러 하위 분파 중 주요 분파로는 ‘12대 이맘파’와 ‘7대 이맘파’가 있다. 지금은 12대 이맘까지 온 셈이다.

그런데 874년에 12대 이맘 ‘메흐디(Mehdi)’가 사라졌다. 이것을 ‘이맘의 은폐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무려 1146년 전이다. 이 오랜 기간 동안 한국의 불자들이 미륵을 기다리는 것처럼 시아파 이슬람들은 지금 매흐디의 재림(再臨)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시아파만의 특징이 있는데, 첫 번째로는 <신의 빛 이론>이다. 즉 ‘신은 매 단계마다 누군가를 선택하여 그에게만 능력을 내리는데, 그에 따르면 유일한 하느님의 상속자는 이슬람 4대 칼리프 ‘알리(Ali) ’이며, 그만이 신의 빛을 받아 선택된 자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전의 1, 2, 3대 칼리프는 알리의 지위를 찬탈했다고 하며, 그 권리마저 인정하지 않는다.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는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으로 AD 601년 9월 15일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서 태어났다. 무함마드의 보호자였던 아부 탈리브의 아들이다. 그는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결혼하였으며 이슬람 초기 4대 칼리파가 되였다. AD 661년 무아위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잘못된 협상을 하여 그에게 충성을 다하던 젊고 급진적인 '카와리자파에 의해, '1월 29일 이라크 쿠파(Grand Mosque of Kufa)에서 암살당한다.

(이슬람 초기 4대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위키메디아 제공)
(이슬람 초기 4대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다음으로는 <정의에 대한 교리>이다. 성직자는 ‘절대로 잘못이 없는 청결한 사람’이어야 하며, 이슬람법의 해석권(결정권)을 갖은 이맘을 보위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타끼야(Taqiya)론>이다. 이것은 ‘믿음을 위한 거짓말은 종교적으로 옳은 행동이라고 자신들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지순례로 유명한 곰(Qom)이나 마샤드(Mashad)에 가면 수많은 모스크와 성직자, 신실한 무슬림들이 평화롭게 모여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포식자들을 피해 사막으로 같다는 낙타, 관광객들을 기다린다. 사진=윤재훈)
(모든 포식자들을 피해 사막으로 같다는 낙타, 관광객들을 기다린다. 촬영=윤재훈)

페르세폴리스가 멀지 않는 모양이다. 길에 낙타를 세워놓고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유발하는 호객꾼이 나오는가 싶더니, 석류와 오렌지, 밀감 등을 파는 노점상들이 줄을 잇는다. 집이 몇 채 서 있는 조그만 가게 앞에 기사가 차를 세우더니 허름한 가게로 들어가 아메리카노를 한 잔씩 사준다. 그의 단골집인 듯 익숙하다.

따뜻한 심성의 그는, ‘현지인이 사면 싸고 여행자가 사면 비싸다’고 하며 웃는다. 관광객들에게는 그래 보았자 이란의 물가인데 하는 마음도 들 것 같은데, 그들은 참으로 힘들 것이다. 마음 씀씀이가 참 고마운 사람이다.

(이란의 대표과일, 주먹만한 석류. 사진=윤재훈)
(이란의 대표과일, 주먹만한 석류. 촬영=윤재훈)

그 옆에는 늙수구레한 노인이 트럭 뒤에 석류를 잔뜩 쌓아놓고 팔고 있다. 이란의 특산물인 석류는 아주 크고 당도가 높으며 무엇보다 아주 싸다. 곳곳에서 즙으로 짜주는데, 핏빛 보다 더 붉은 석류즙은 피로회복에 좋다.

덥고 오토바이 매연이 많았던 테헤란 거리를 걷다가 그 향기와 빛깔, 맛에 취해 연거푸 몇 잔씩 마셨던 기억이 난다. 특히 테헤란 국립 귀금속 박물관 건너편 환전 거리나 테헤란의 가장 중심가 사거리 모퉁이 백화점 근처에 많았다.

(이란인에게 삼성매장 근무는 선망의 대상일까, 마치 우리가 외국계 회사에 가고 싶었던 것처럼. 그들의 눈매에서 자부심이 묻어 나온다. 사진=윤재훈 기자)
(이란인에게 삼성매장 근무는 선망의 대상일까, 마치 우리가 외국계 회사에 가고 싶었던 것처럼. 그들의 눈매에서 자부심이 묻어 나온다. 촬영=윤재훈 기자)

 

(삼성과 LG에서 쇼핑을 마치고 나오는 행복한 이란 부부, 사진=윤재훈 기자)
(삼성과 LG에서 쇼핑을 마치고 나오는 행복한 이란 부부, 촬영=윤재훈 기자)

나는 이 백화점에 가면 잠깐씩 착각을 일으켰다. 1층의 거의 전부를 삼성과 LG가 나누어 쓰고 있었으며, 쏘니를 비롯한 다른 국가 전자매장들은 한 쪽에 조그맣게 놓여있었다. 2층부터는 작은 휴대폰 가게들이 즐비한데, 대부분 매장 앞에는 삼성의 간판이 붙어있어 용산이나 남대문의 어느 전자매장 거리에 온 느낌이었다.

어른 주먹보다 더 큰 석류가 5개에 6만 리알(500원 정도)인데, 너무 익어서 껍질 곳곳이 벌어져 있다. 다시 오렌지를 더 사고 돈을 내려는데 할아버지가 잊어 버렸는지 아까 산 석류값을 다시 내라고 독촉을 한다. 아까 드렸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다행히 기사가 와 말을 하니 알아먹은 눈치다. 혼자 있었으면 참 황당했겠다. 그는 덤으로 '석류와 커피를 함께 먹으면 배가 아프다'는 정보까지 준다.

(이란인들의 체형은 큰지만, 아직 문명이 덜 미친 순박함이 살아있다. 페르세폴리스에서. 사진=윤재훈 기자)
(이란인들의 체형은 큰지만, 아직 문명이 덜 미친 순박함이 살아있다. 페르세폴리스에서. 촬영=윤재훈 기자)

페르시아 문명의 발상지인 ‘쉬러즈(Shiraz)’는 23개의 소도시로 이루어진 <파르스(Fars)> 주의 중심도시이다. 그나마 기후가 좋은 편이어서 1,000년 이상 지역의 교역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1750년에서 1781년까지 31년 동안 유지되었던 <잔드Zand 왕조>와 사파리드 시대에도 잠시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잔드 왕조지구를 이루는 카림컨 요새(Karim Khan Fortress), 바킬 바자르(Vakil Bazaar), 바킬 목욕탕(Vakil Bath), 바킬 모스크(Vakil Mosque)는 당시의 흔적들을 잘 간직하고 있다.
특히나 ‘시와 와인, 꽃의 도시’로 유명하며 많은 정원과 과수원들이 있는 ‘정원의 도시’로도 유명하다.현재는 석유 정유와 이란의 전자 산업의 중심지로 이란의 전자투자의 53%가 쉬라즈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다른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목민들이 많으며 계절에 따라 기후 차이가 큰 파르스 지방을 따라 남과 북으로 이동하며, 여름과 겨울을 지낸다. 파르스 지역 대부분의 사람들은 페르시아어를 사용하지만 6개의 씨족으로 구성되어 파르스 지역 유목민 중 가장 큰 집단인 <까쉬꺼이족(Ghashghaees)>은 유목민의 정신을 그대로 유지하며 터키어로 대화하고, 아랍 유목민들은 아랍어로 대화를 한다.
이런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지역과 시골마을들은 카페트Farsh, 길림Kilim, 갸베Gabbehr 같은 직물을 짜는 수공업이 발달되어 있다. 특히나 파르스 지역은 자연과 역사적인 유적 등 페르시아 문명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꼭 스쳐가는 곳이다.

(부서진 유적 위로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 사진=윤재훈 기자)
(부서진 유적 위로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 촬영=윤재훈 기자)

이란은 여행하는 여행자들은 대부분 에스파한을 추천하지만 이란인들은 페르세폴리스를 추천한다. 아마도 자국민들은 비록 지금은 그 잔해만 나뒹굴고 있지만, 그 돌무더기 하나하나에 새겨진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화려했던 영광을 되새기고 있는 모양이다.

원래 ‘페르시아인들의 도시’라는 뜻으로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파르사(Parsa)’라고 불렸으며, 이후 인류문명의 발상지라는 아크로폴리스를 세운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Perse)인들의 도시(Polis)’라는 뜻으로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라고 말하였다. 이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이며, 현대 페르시아어로이란 문명의 증거 자체라고 하는 ‘타크테 잠쉬드(Takht-e Jamshid)’는 ‘잠쉬드 왕의 왕좌(Throne of Jamshid)’라는 뜻이다.

이름이 붙은 사연이 참 기구하다. 이 거대한 폴리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파괴된 후 너무 오랫동안 방치 되어 있는 바람에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져버렸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궁금해 하다가, 결국 전설상의 왕 ‘잠시드’의 궁전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잠시드의 왕좌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케메네스 왕조 때는 페르시아의 수도로 다리우스 1세 때인 기원전 518년부터 시작하여 계속 궁전들이 들어서고 온갖 보물들이 쌓여 부귀영화를 자랑했다. 그러나 아케메네스 왕조를 무너뜨린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곳을 점령한 뒤 방화로 파괴되었다. 이후 파르스의 중심지는 다른 곳이 되었고 페르세폴리스는 복구되지 않고 그대로 폐허로 남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페르세폴리스의 5km 북부에 있는 고대 도시 <이스타크르>는 페르세폴리스의 폐허로 쌓인 자재로 건설되었다. 그리고 이곳의 지배자이자 세습 영주였던 파르스 번왕이 파르티아를 전복시키고 세운 국가가 바로 <사산조 페르시아>이며. 첫 수도가 된다.

이곳도 엄청난 유적지이지만 발굴은 지지부진하다.현대에도 이란 최고의 경작지로 손꼽힐 만큼 본래부터 토지가 비옥한 지역이다 보니 사람들이 대대로 거주하였다. 16세기에도 아직 사람들이 거주하던 이스타크르 성곽에 반란군이 숨어들어간다던지 하는 일이 있었으며, 20세기에는 마르브다쉬트(Marvdasht라는 도시가 건설되어 현지 주민들이 모여 거주하고 있다.

지금도 파르스 주에서는 시라즈 다음가는 대도시다. 마르프다쉬트의 이름도 연대가 수천 년씩 올라가기 때문에 학자들은 원래 이 지역의 이름이 마르프다쉬트인지 그냥 이스타크르나 페르세폴리스의 근교를 이르는 말이었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이 도시는 13세기 쉬라즈의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에 의해 예술과 과학이 꽃피는 중심지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철저하게 부서진 제국. 사진=윤재훈 기자)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철저하게 부서진 제국. 사진=윤재훈 기자)

페르시아의 심장부라 일컫는 고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 ‘태양 아래 가장 부유했던 옛 도시’. 그곳으로 가는 길은 쉬러즈에서 북동쪽으로 40키로, 약 1시간 정도 황량한 도로를 달려야만 도착할 수 있다.

이란 최고의 유적지 <페르세폴리스>, 날은 건조하고 더우며 옛 도시는 나무 한 점 없는 야트막한 산기슭에 있다. 거대한 돌기둥들과 석상들이 왕조의 옛 터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앞쪽으로는 길게 가로수가 뻗어 있는데 조림한 것인지 원래 있던 것인지, 손차양을 하고 하늘만 올려다본다. 이란에서는 외국 여인도 무조건 히잡을 써야한다. 책보를 히잡 대신 쓰고 바람에 휘날리는 중국여인은, 마치 옛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에나 나온 순애보의 여주인공 같아 깔깔거렸다.

기원전 550년 키루스 대왕이 <메디아>를 정복하고 <아케메네스 왕조>를 창건했다. 그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바빌로니아 제국을 무너뜨림으로서 지구상 가장 강한 나라가 된 것이다.【윤재훈의 지구를 걷다③】페르시아 제국의 기원 '파사르가대'를 가다에 전편이 정리됨) 
이후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병합하고 다리우스 1세 때 인더스 강에서 유럽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차지함으로서, 중국을 제외한 그 당시 알려진 대부분의 문명세계를 통일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518년에 세워진 <페르세 폴리스(Persepolis)>는 세계를 호령하던 왕국을 품은 만인의 제국, <다리우스 1세>때부터 지어진 페르시아 제국의 궁전이다. 이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이집트를 재통일 한다. 지금가지 고고학적 탐사가 계속되고 있는데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기단에는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2~486)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대왕(기원전 486~465)에 이어 그의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기원전 465~424)가 98년 동안 3대에 걸쳐 왕궁을 만들었다."

 

고 써 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유적까지 있어 기원전 518년 이전에 건설되었다는 도시로 추정된다. 최초로 이 도시를 정한 것은 <키루스 대왕>이지만 <다리우스 1세> 때부터 궁전과 테라스 등을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 때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케메네스 왕조가 끝날 때까지 그 공사가 끊이지 않았다

페르시아 제국의 오랜 역사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곳, 중국의 만리장성을 본 듯한 거대함은 없지만 그 시절 세계를 호령했던 페르시아인들의 높은 건축적 안목과 기술을 엿볼 수 있다. 세계인들도 그 가치를 인정하여 197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그 이유를 보면 .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학적 유적으로, 역사상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고대문명이 독특한 자질을 보여주는 증거로 평가 된다."

 

(제국의 뜨락을 쓸쓸이 걷고 있는 후예들. 사진=윤재훈 기자)
(제국의 뜨락을 쓸쓸이 걷고 있는 후예들. 촬영=윤재훈 기자)

해발 1600미터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쿠이 라흐마트Kuh-i-Rahmat(자비의 산)은 뙈약볕이 내리쬐고 햇볕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다. 먼지 이는 누런 벌판은 황량하기만 한데 입구 쪽을 바라보면 약간의 푸른빛이 보인다. 배산임야다. 어떻게 이런 척박한 땅에 수도를 건설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세계를 여행하면 할수록 우리의 자연에 탄복을 한다. 사계절 뚜렷하고, 어느 산골짜기에서나 물을 마실 수 있는, 평범한 것 같지만 세계에 이런 자연을 가진 나라들은 드물다. 물 한 동이 얻기 위해 찌는 듯한 아프리카 더위 아래 수십 km를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는 너무 많다.

한국에서 독일작가로 살아가는 <안톤 숄츠>도 ‘헬조선이 웬말이냐? 한국만한 나라도 없다’라고 일갈한다. “부족한 것을 모르는 것이 꼭 행복한 것만은 아닐 것도 같다.” 처음부터 풍족하게 살아와서 ‘왜 부족해야 하지’라고 되묻은 젊은이들이 있다. "아귀의 욕심은 수미산만 한데 목구멍은 바늘 구멍만 하다. "

코로나의 광풍도 한국이 세계에서 자살률이 제일 높은 것도, ‘빈자(貧者)의 철학’이 부족해서이지는 않을까? 하루에도 우리 집에서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와 세재양'은 우리가 과연 ‘생각하는 동물’인가 라는 생각을 멈추게 만든다.

 

“조국이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바랄 것만이 아니라,

나는 조국을 위해, 이 지구촌를 위해 조그만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까?”

 

는 과연 진부한 옛말이고, 낡은 이데올로기라고만 우리가 치부할 수 있을까?

(아, 제국의 자존심 ‘만국의 문’을, 옛 사신처럼 고개를 조아리고 들어가 볼까. 사진=윤재훈)
(아, 제국의 자존심 ‘만국의 문’을, 옛 사신처럼 고개를 조아리고 들어가 볼까. 사진=윤재훈)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과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키루스 대왕에 의해 선택되었던 도시,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Darius, 550~486 BC) 왕과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건축되어 왔으며, 군사, 제정, 연회, 왕의 거처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 곳.

입구 왼쪽 111개 돌계단을 올라가니 맨 먼저 크세르크세스 1세가 세워 만국의 사신을 맞이했다는 ‘만국의 문(The Gate of All Nation다르바제 멜라)’이 나온다. 그의 이름을 따 ‘크세르크세스 문’이라고도 한다. 매년 초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들이 아케메네스 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왕좌 홀the Throne Hall’로 가기 위해서는 이 문을 지나가야 한다.

계단을 보면 그들의 선진 석수(石手) 장인들의 능력과 위용을 엿볼 수 있다. 보통은 한 계단에 돌 한 덩어리씩 쌓은데, 여기는 커다란 통 돌을 다섯 계단으로 만들어 말을 타고도 불편함이 없이 오르도록 10센티 정도 높이로 만들었다. 얼마나 많은 정질을 하여 저렇게 올라갔을까. '쇠기둥을 갈아 바늘을 만드는 그들의 지고함'을, 나는 쿠이 라흐마트 산기슭에 만든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의 거대한 무덤 벽면을 보면서도 느꼈다.

입구는 좁은데, 그 양쪽으로 사람 얼굴에 날개 달린 거대한 황소 한 쌍인 상상 속 동물 '라마수(Lamasu황소인간)'가 우리를 압도한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악마를 몰아내는 신으로 '몸은 황소에 독수리의 날개, 그리고 수염을 기른 사람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다.

이런 수인상(獸人像)은 아시리아 미술에서 발원한 것인데, 많이 훼손되어 있어 안타깝다. 짐승의 한 날개에서는 크세르크세스 1세에 관한 명문이 3가지 언어로 새겨졌다. 문은 바로 의장대 사열로와 연결되며 왼편에는 쌍두 독수리상이 노려보고 있다.

이들은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4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그 사이로 각국의 사신들이 거대한 석물을 올려다보면서 자신의 왜소함으로 처음부터 기가 눌렸겠다. 무너진 잡초와 대리석 틈으로 화려했던 제국의 영화를 2,500년이 넘도록 서럽게 반추하고 있다.

문득 500년 사직(社稷)을 뒤로하고 개성의 수창궁에서 신 군벌들에게 무너지며, 권불십년(權不十年)을 뼈저리게 경험했을 고려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500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어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련가 하노라
- 야은 길제

박트리아(Bactria), 바빌론(Babylon), 페니키아(Phoenicia), 에티오피아(Ethiopia), 인도(India), 아라코시아(Arachosia) 등의 대표단들이 4개의 기둥이 세워진 대형 홀에 들어가기 전 이문을 통과했다. 그들은 왕을 알현하기 위해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왕궁의 위엄이 서린 검은 대리석 벤치에 앉아 있었다. 서쪽 입구에는 한 쌍의 황소가 동쪽 입구에는 두 마리의 라마수가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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