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 라이프⑯] 부채
[김경의 앙코르 라이프⑯] 부채
  • 김경 기자
  • 승인 2020.06.22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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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김경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
[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6월인데도 벌써부터 후텁지근하다. 엊그제만 해도 산책길의 흐드러진 장미꽃에서 슬쩍 여름을 예감했을 뿐인데, 어느새 한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사계절의 순환이 그 궤도를 이탈한 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봄이 오는가 하면 여름으로 넘어가고, 여름은 또 아열대를 방불케 한다.

간단한 점심 설거지를 하는 데도 금세 목덜미가 끈적끈적하고, 등줄기가 스멀거린다. 나는 수건으로 땀을 훔치다가 문득 부채가 생각난다. 재바르게 책장 서랍을 여니, 이런저런 부채들이 얌전히 차곡차곡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색채가 아름다운 단선(團扇)들이 시선을 끈다. 까마득한 시간 저편, C선생이 건네준 특별한 부채들이다.

20년이 훌쩍 넘은, 수수꽃다리가 한창이던 어느 봄날이었다. 동숭동의 찻집 ‘삼화령(三花嶺)’에 들렀다가 마침 그곳에 있던 C선생에게서 부채를 다섯 개나 선물 받았다. 한두 개면 되지 다 받느냐는 남편의 핀잔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주는 대로 전부 챙겼다. 전통 문화를 연구하는 C선생의 안목을 아는 터라 욕심을 부린 것이다. 무엇보다도 곱게 물들인 한지의 은은한 색감에 매료당했다. 연노랑 바탕에는 진노랑으로, 연분홍에는 진분홍으로, 연보라에는 진보라로 테를 두른 단선들. 수수한 정감이 새록새록 우러나는 느낌이었다. 부채도 유행에 따라 그 종류가 꽤 많다. 흰 부채보다는 알록달록한 색동부채, 치마의 선처럼 둥근 단선, 바퀴 모양의 윤선(輪扇), 풀잎을 엮어 만든 초엽선(草葉扇), 주름옷처럼 접혀지는 쥘부채들이 있다. 서랍 안의 부채들은 별 특색이 없는 그저 그런 전통적인 모양의 부채들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부채들에 마음이 끌린다. 나는 거실 한 쪽에 놓인 백자 항아리에 부채들을 꽂는다.

항아리와 부채. 의외로 썩 잘 어울리는 그림이다. 멋스럽고 고유한 우리네정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고나 할까.

어린 시절의 한때가 떠오른다. 할아버지의 모시옷과 부채도 늘 함께 호흡하던, 눈부신 흰색으로 채색된 여름날의 정경이다. 새하얀 모시옷과 할아버지의 긴 턱수염을 소리 없이 날려주던 흰색 부채는 당연히 여름의 대명사로써 손색이 없었다. 물론 집에서나 외출하실 때나 할아버지는 항상 모시옷 차림이었으나 손에 쥔 부채는 달랐다. 집에서는 쟁반같이 커다란 단선을, 외출하실 때는 쥘부채를 챙겼다. 쥘부채를 펴면 은은한 향기가 풍겨나면서 금세 짙푸른 소나무 사이로 백로가 날았다. 나는 걸핏하면 할아버지의 쥘부채에 눈독을 들이곤 했다. 할아버지의 낮잠을 기회로 두근두근 쥘부채를 펼치면 기대한 만큼 번져나는 향기 속으로 백로의 날개가 하늘을 가렸다. 바람은 부채 끝을 타고 일어 내 얼굴을 간질이고 머리칼을 날렸다. 그 시원하고 감미로운 바람에 더위는 숨을 죽였다.

성격이 몹시 급했던 아버지도 언제 어디서나 부채를 소지했다. 아버지는 땀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성격과는 달리 선풍기를 멀리 하고 줄곧 부채바람을 일으켰다. 언젠가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서서히 부채바람만 모으는 아버지가 너무 답답해 보여 입을 열었다.

그렇게 계속 손 운동을 하시면, 더 덥지 않으세요?

당돌한 내 질문에 빙긋이 웃으며 차근차근 설명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부채질에서도 심성이 길러진다. 덥다고 해서 빨리, 세게 부채를 흔들면 더욱 더 더워진다. 천천히 느긋하게 부채바람을 일으키다 보면 차츰 몸의 열기가 식고, 아울러 마음의 열기도 가라앉게 된다.

아버지의 말씀에서 나는 어렴풋이 어떤 깨달음을 느꼈다. 몸을 식히는 동안 더위로 들뜨고 풀어진 마음도 다시 가다듬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몸만 차갑게 한다고 해서 더위가 물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무심코 하는 부채질 한 번에도 스스로 마음을 닦을 수 있는 지혜가 숨어있었다. 정진의 세계가 엿보였다. 나는 그날, 한참 동안 아버지를 흉내 내어 가만가만 부채를 앞으로 밀어 보았던 듯싶다.

나는 그날의 느낌을 되살리며 요즘도 즐겨 부채를 찾는다. 아버지의 그 깊은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는 못해도, 부채바람을 맞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뿌듯하다. 근래에는 부채의 쓰임새도 참 다양해졌다. 인테리어 소품이나 자동차 햇빛가리개 등으로도 쓰이지만, 그래도 역시 더위를 쫓는 용도가 제일이다. 냉방이 발달하지 않은 옛 시절에는 단오선이라 해서 단옷날 무렵에 가장 인기 있는 선물이기도 했다. 다행히 남편도 부채바람을 즐겨 우리는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뒷전으로 하면서 여름을 난다.

결혼 초에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낡은 선풍기가 부채와 함께 여름을 지켰다. 아니 낡은 선풍기가 한동안 아들 녀석의 여름 친구로 잘 버텼다. 지금은 결혼해 일가를 이룬 녀석의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이야기다. 녀석이 팬티 바람으로 양손에 부채를 쥐고 흔들어대다가 갑자기 선풍기를 찾았다. 고장이 나서 벌써 버린 뒤였다. 녀석은 느닷없이 펄쩍 뛰며 볼멘소리를 내질렀다. 도저히 살 수가 없네요. 다른 집에 좀 가보세요. 다들 에어컨까지 있다구요. 선풍기조차 없는 이런 검소한 집에서 절대로 못 살아요. 나는 당황하다 못해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검소한 집? 선풍기의 부재가 검소해서는 아닌데…. 나는 그 자리에서 당장 선풍기를 구입했다. 날개도 날렵하고 색깔도 감청색으로 세련미가 넘치는 선풍기를 녀석이 덥석 안았다. 녀석은 얼굴을 풀고 헤실대며 내내 선풍기 바람을 온몸으로 받았다. 우리 아버지도 그 시절, 자식들에게는 흔쾌히 선풍기 바람을 보내주었다.

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항아리에 꽂혀 있는 부채들을 바라본다. 아무리 뜨거운 불볕더위가 퍼부어도 이제 안심이다. 저렇듯 부채와 내가 마주하고 있는 것을. 오늘따라 부채는 더없이 고아하고 당당하다. 부채가 내 곁에 버티고 있는 한, 더위는 별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여름이 돋보이는 것 같다. 뜨겁고 칙칙한 여름 바람이 부드럽고 넉넉한 여름 바람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부채를 손에 쥐자 여름 바람이 집 안에 고이기 시작한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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