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속의 안식처⑩] 서울도심여행_이화마을 지나 장수마을까지2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6.25 13:29
  • 수정 2020.06.26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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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50+센터, 시니어들과 떠난 여행

흥인지문에서 이화마을 지나 장수마을까지2

 

“1895년부터 1970년대까지 낙산은 산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로 판자집이 많았으며,
1950에서 60년대 사이에 시민아파트들이 조성됐다.“

(무슬림의 처녀들이 관광을 왔다. 촬영=윤재훈 기자)
(낙산, 무슬림의 처녀들이 관광을 왔다. 촬영=윤재훈 기자)

흥인지문 근처에 있는 훈련원 터는 조선시대 무과시험을 치르던 장소로 우리 민족의 파란만장한 역사을 담고 있다. 1572년 선조 5년, 27세의 청년 이순신이 말에서 떨어져 부러진 다리를 나무껍질로 묶고 다시 달렸지만 불합격되고, 4년 후인 31세에 무과에 합격한 장소이다.

1882년에는 구식군대에 대한 차별로 봉기가 일어난 임오군란의 현장이기도 하다. 또한 1907년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으로 ‘조선의 군대가 해산식을 거행한 뼈아픈 장소’이며, 훈련원 공원 북쪽의 커다란 부지는 또 다른 외세인 미국공병부대가 차지하고 있다. 최소한의 자국토의 방위권인 전작권 마저 타국에 넘어가 있는 나라,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 국가의 나약함이 어려 있는 곳이다.

흥인지문에서 낙산으로 오르는 길은 도시 속의 섬에 갇힌 기분이다. 몇 개의 횡단보도를 건너 요행히 억새가 흩날리는 서울 성곽을 따라 오른다. 도심 속에 있다 보니 사람들로 상당히 붐빈다. 억새 사이에는 작은 정자가 하나 있고 10분여 쉬엄쉬엄 걷다보면 <서울 도성 박물관>이 나온다. 위로 서울 성곽을 따라가다 뒤쪽으로도 내려올 수 있다.

서울디자인 지원센터가 3개 층을 활용하고 있는데, 1,3층은 상설전시실이며 2층은 기획전시실과 도성정보센터로 구성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먼저 한양도성의 현주소의 조명과, 조선 초기 한양도성의 축조과정과 관리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미디어 전시물과 모형을 통해 설명해 준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훼손되었다가 최근 복원되어 현재의 모습을 되찾는 과정까지 한양도성의 과거와 현재를 볼 수 있다.

(낙산 오르는 길. 촬영=윤재훈 기자)
(낙산 오르는 길. 촬영=윤재훈 기자)

이어 뒤쪽으로 올라와 한양의 내사산 가운데 가장 낮은 동쪽에 있는 125m의 <낙산>을 오른다. 서쪽에는 338m의 인왕산이 있고, 남쪽에 262m의 목멱산(남산), 북쪽에는 342m의 북악산(백악산)이 있다.

그 밖을 둘러싸고 있는 외사산으로는 동쪽에는 348m의 용마산, 서쪽에는 행주산성이 있는 125m의 덕양산, 남쪽에는 629m의 관악산, 북쪽에는 가장 높은 837m의 북한산이 솟아있다.

앞에 있는 나지막한 산을 안산(案山)이라고 하는데, 남주작(南朱雀)에 해당하는 목멱산이며, 뒤쪽은 주산(主山)으로 북현무(北玄武)의 북악산, 좌청룡(左靑龍)으로는 낙산, 우백호(右白虎)로 인왕산이 조선 500년의 네 방위를 지켰다.

(낙산공원. 촬영=윤재훈 기자)
(낙산공원. 촬영=윤재훈 기자)

 

"1895년부터 1970년대까지 낙산은 산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로

판자집이 많았으며, 1950에서 60년대 사이에 시민아파트들이 조성됐다. "

 

그 후 90년대 말 아파트가 철거되고 재개발의 논란 끝에 다행히 공원화되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나지막한 성곽을 따라 창신동 일대의 사대문 안 풍광이 잘 내려다보여 주말이면 청춘들이 모여들고, 남산과 더불어 서울의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산의 모양이 낙타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낙타(駱駝)산 또는 타락(駝酪)산이라 부르며 줄여서 낙산이라고 한다.

(공동수도에서 뭔가를 씻는 아낙. 사진=윤재훈 기자)
(공동수도에서 뭔가를 씻는 아낙. 사진=윤재훈 기자)

왼쪽으로 집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공동 수도에는 아낙은 홀로 야채를 씻고 있다. 아래쪽으로는 <이화동 벽화마을>이다. 해질 무렵이며 대학로와 혜화동 쪽에서 데이트 삼아 노을을 보기 위해 올라오는 청춘들 덕분에, 찻집에는 자리가 없다.

2006년 수십 명의 예술가들이 참여한 낙산 공공프로젝트를 통해 재탄생된 마을이다. 2012년 방영된 SBS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 2008년 방영된 MBC 버라이어티 쇼 <우리 결혼했어요>와 <1박 2일> 등에 소개되면서, 한류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을 보고 오는 중국과 일본 여행객들까지 늘어 너무 상업적인 길이 되어 버렸다.

(이화마을 골목길에서. 사진=윤재훈 기자)
(이화마을 골목길에서. 사진=윤재훈 기자)

특히 물고기 계단이 사진 포스로 인기가 많은데, 한 동네 주민이 임신 중인 아내의 태교에 좋다며 잉어를 벽화로 그려달라고 해 그려진 그림이다. 여기저기 그려진 그림 중에 유일하게 벽화와 관련된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다. 쪽 내려가면 4호선 혜화역으로 내려갈 수 있으며, 아직 해가 남았다면 혜화문(동소문)까지 보고가도 좋다.

오랜만에 서울에 나와 더 머물고 싶다면 대학로를 정처 없이 거닐다 학림다방에서 옛 커피도 한 잔 마셔 보시라. 건너편 마로니에 공원에서 길거리 가수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낙산으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다가 연극을 한 편 보고 귀가해도 좋다.

(낙산 정상에서. 사진=윤재훈 기자)
(낙산 정상에서. 사진=윤재훈 기자)

조금 나이가 든 세대라며 낙산에서 오른쪽에 있는 (장수 마을)로 내려가기를 권한다. 옛 시절의 향수가 물씬 풍기며 주민의 65%가 65세 이상이라고 하여 장수마을이라고 부른다. 6,70년 좁은 골목길이라 노인들이 다니기에는 내리막이 너무 급하다. 옛 시절 피난민들과 도시로 돈 벌러 왔던 가난한 사람들이 구릉지대에 모여 살며 집을 지었다.

보통 40년 이상 거주한 사람들이다 보니 마을공동체가 발달되고, 비탈진 언덕과 좁은 골목길들이 달동네를 연상시키지만 옛 모습만은 정겹다. 그런데 내려가는 내내 사람 보기가 힘들었다. 이화마을과 달리 순수한 주거지로서 꼬불꼬불 하고 경사진 길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뭔가 오묘한 이 마을만의 개성이 있는 것도 같다. 우리나라 옛 골목의 정서가 담겨 이곳만의 색채와 느낌을 발한다.

(내리막이 노인들에게는 너무 경사가 심하다. 촬영=윤재훈 기자)
(내리막이 노인들에게는 너무 경사가 심하다. 촬영=윤재훈 기자)

예전에는 재개발이 대세였다. 그러나 서민들은 그 돈으로 기존에 자신이 거주하던 지역에 지어질 아파트 분양은 꿈을 꾸기가 힘들었다. 서울시내 다른 지역에 뿌리내리는 일 역시도 곤란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대안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사람을 중심에 놓고 사고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일었고 그 결과 등장한 것이 <도시재생>이었다.

우리 서로 더는 다른 지역으로 뿔뿔히 흩어지지 않고 지금 사는 곳을 조금 더 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자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뉴타운이 그러하듯 도시재생도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다. 또한 1~2년 안에 성과가 날 그럴 일도 아니었다. 뭔가 가시적인 효과를 내기도 힘들었고, 효율적인 면으로 생각하면 ‘퇴출 1순위’일지도 모른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지양하고픈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삼선 4구역>에 속하는 장수마을은 이 분야에서 나름 성공한 동네다. 적잖은 사람들이 이 마을을 방문해 귀를 기울이고 있다. 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이 마을이 왜 그렇게 주목받았는지 알 수 없다.

(마을 모습, 공가(空家)들이 제법 있다. 촬영=윤재훈 기자)
(마을 모습, 공가(空家)들이 제법 있다. 촬영=윤재훈 기자)

1968년 무허가 주택 양성화 조치 이후 본격적으로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하니 주민들의 평균연령대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주민들 스스로 마을의 일들을 고민하고 결정하기 시작했으며 그런 과정은 서울시가 2015년부터 주도적으로 펼쳐온 정책들과 비슷했다.

그 중심에는 이 마을 주민협의회 대표 <배정학>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2017년 말경 그의 사망소식이 인터넷에 떠돌았다. 주민들은 그를 배씨, 배대표, 정학이형, 배총무 등으로 불렀다. 그러나 이제 그 다정했던 이름들도 옛 이야기가 된 듯하여 아쉽다. 아래로 내려오니 공가(空家)들이 많다. 어쩌나! 또 그 재개발의 소식이 들려오면.

장수마을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369마을이 시작된다. 이미 한 차례 정비사업이 마무리 된 동네라 깨끗하지만 삭막하다. 풍경은 단조롭고 정이 느껴지지가 않는다.

또한 이곳 동대문 밖 숭인동, 창신동 일대는 비운의 왕 단종의 정비인 정순왕후 송씨의 삶의 흔적이 꽤 많이 남아있어, 정순왕후를 따라가는 역사기행코스까지 개발되어 있다.<[내 마음 속의 안식처②] 서울 도심여행_동묘 벼룩시장에서 창신동까지 2편에 잘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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