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채운의 스카이가든 8] 슬기로운 노인 생활

권채운 작가
  • 입력 2020.07.10 10:50
  • 수정 2021.02.19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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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채운2001년 제4회 '창작과비평' 신인소설상 당선      소설집 [겨울 선인장] [바람이 분다]
권채운
2001년 제4회 '창작과비평' 신인소설상 당선
소설집 [겨울 선인장] [바람이 분다]

“오늘은 일찍 나오셨네?”

“벌써 일이 끝났수?”

“일이랄 것두 없어요. 동네 한 바퀴 쓱 훑으면서 담배꽁초나 버려진 음료수병 따위를 치우는 데, 운동 삼아 하는 거지 뭐.”

앞 동에 사는 동갑네다. 아침마다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쓰레기를 줍는 ‘환경지킴이’ 활동으로 한 달에 27만원을 챙기는 똘똘한 노인이다. 정부에서 수십만 개의 노인 일자리를 만들어서 노인들에게 수입을 올리게 하는데도 나는 아직 그 대열에 끼지 못했다. 일을 한다는 건 사회생활을 한다는 뜻이니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나보다 어려운 이들이 그 일을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나는 판판이 놀고 있다. 다리를 끌며 구부리고 일하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공연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볼일이 있다며 동갑네도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바람도 선선하고 날씨도 좋은데 왜 다들 집 안에만 있는 걸까. 이렇게 되면 오늘의 계획이 틀어진다. 완벽한 노인으로 살자고 작정한 날부터 실행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그게 누구든 어떤 푸념이든 열심히 귀 기울여주고 그 사람 편에 선다는 것이다. 노인이라고 젊은이들에게 대접이나 받던 시대는 일찌감치 지나갔다. 살다 보니 어느새 노인이 되어버렸는데 공연히 주눅 들어서 한 귀퉁이에 찌그러져 있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아니, 내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판이니 이 소중한 하루를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노인이 행복하게 산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코로나 이전에는 옷차림도 10년은 젊어 보이려고 애를 쓰고 병원에서 의사의 할머니라는 호칭에 벌컥 화를 내기까지 했다. 아니, 내가 선생님 할머니에요? 그냥 이름을 부르면 될 걸 할머니, 할머니, 듣는 할머니 듣기 싫으네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의사의 사과를 받고서야 진료실을 나왔지만 생각해보니 스스로도 참 어이가 없었다. 나를 포함한 내 또래들은 모두 노인인 것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아침마다 한 움큼씩 약을 털어 넣고야 안심하고 하루를 시작하는, 빼도 박도 못하는 노인이면서.

나는 노인이다. 그런데도 누군가 어르신이라고 부르면 왠지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대접 받는다는 느낌보다는 세상 한쪽 구석으로 밀리는 듯한 생각이 들어서 그랬을 것이다. 코로나시대에 접어들면서 이제부터는 AD/BC로 나누었던 것처럼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눠질 것이라고 한다. 이제까지 좋은 집에 좋은 옷에 좋은 음식에 해외여행까지 누리고 살았으니 조금도 억울할 것은 없다. 그렇지만 벌써 몇 달을 동네에서만 뱅뱅 돌다 보니 갑갑해서 울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TV에서는 하루 종일 65세 이상 고령자는 외출을 자제하라는 자막을 줄기차게 내보낸다. 나이 70이면 고령자 축에 끼고도 남을 나이인 것이다.

코로나시대에 살아남으려면 노인은 외출하지 말고 부득이하게 외출할 때는 마스크 쓰고 손 소독제로 소독하고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손부터 비누로 박박 씻어야 한다. 신문 기사를 보니 어떤 외국사람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부 지침을 잘 따르는 것은 전체주의의 산물이며 미성숙한 개인주의라고 했단다. 과학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정부의 지침에 잘 따른다고 봐주면 수만 명이 죽어 나가는 자기 나라의 자존심에 생채기라도 날까봐 그러는 게 아닐까.

TV에서 ‘슬기로운 의사 생활’ 이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우리가 늘 접하던 대학병원의 의사들과는 어딘가 다른, 바람직한 의사 생활을 보여주었다. 환자가 포기할 정도의 환자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생명을 살려내는 의사, 긴급호출이 언제 올지 몰라서 저녁회식자리에서도 술을 마시지 않는 의사, 멀리 캠핑을 갔다가도 호출이 오면 다 접고 득달같이 달려오고, 키다리아저씨 역할을 하느라고 월급을 다 쓰고는 친구에게 빌붙어 사는 의사, 자기가 행복한 것보다 다른 사람이 행복한 걸 보는 게 더 행복한 의사. 시간 날 때마다 다 같이 모여서 좋아하는 밴드를 구성해서 목청껏 노래하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그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드라마의 슬기로운 의사들처럼 산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살 만한 세상일까.

시절 따라 새순이 돋고, 꽃이 피고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달린다. 둘러보면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다. 휴대폰으로 오는 안전문자의 붉은 표시가 닦달하지 않는다면 작년과 다를 것 없는 세상이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그 위를 어슬렁거리는 왜가리마저 새삼스레 눈여겨보면서 괜한 감상에 젖어든다. 천변 따라 깨끗이 조성된 산책길을 매일 한 시간 동안 걷고 나서 30분 간 운동기구에 매달려 하기 싫은 걸 꾹 참아가며 근력운동을 한다. 하루라도 빠지면 연금액수가 줄어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필사적이다.

고향 친구들과 만나서 쓸데없는 얘기로 웃고 떠들다 보면 하찮은 근심은 잊어버리기도 하고 심각했던 생각도 대단찮은 것으로 내려앉기도 했다. 멍하니 TV 앞에 앉아 있으면 그렇게 허투루 써버린 시간으로 치부했던 사소한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고 가정해 본다면 이렇게 비비 꼬며 지루해하던 날들이 얼마나 금쪽같은 시간으로 바뀔까. 하기는 우리 모두 시한부 인생이다. 그때가 언제인지 모를 뿐. 이 코로나 판국에 그냥 노인으로 하루하루 버티며 살기도 어려운데 슬기로운 노인으로 행복하게 살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선현들의 지혜를 빌리려면 독서가 으뜸인데 그 또한 금세 눈물이 질금거려서 책갈피 몇 장 넘기기가 어렵다.

몇 십 년 동안 다달이 만나 같이 밥을 먹고 소소한 걱정거리나 즐거움을 나누던 친구들이 내가 먼저 전화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전화하지 않는다. 진정한 친구 한두 사람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던데 내 인생은 실패한 것일까.

소소하고 사소한 일탈조차 언제 해보았는지 까마득하다. 문화예술 공연을 관람하는 것도, 운동장에 나가 목청껏 응원하는 것도 할 수가 없다. 인생에 낙이 없는 때가 곧 닥친다고 하더니 그예 그 때가 온 모양이다.

어떡하지?

머릿속부터 비워내는 게 순서일는지도 모르겠다. 속절없이 흘러간 시간을 곱씹어보았자 이로울 게 없다. 젊은 시절이라고 이렇다 하게 큰소리치며 살아본 적이 없다. 특별히 이뤄놓은 것도 없다. 근근이 자식 둘을 키워 가정을 꾸리게 한 게 다일 뿐. 아무런 내세울 것 없이 나이만 잔뜩 먹어 노인이 되었는데 예상수명은 늘어나 있다. 정신건강에 좋으니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한다지만 몸이 무겁고 쉬 피곤해져서 나이를 실감하게 되면 불안이 슬금슬금 쳐들어온다.

우리 아파트 아래층에는 마당쇠를 자처하며 아침마다 아파트 주변을 비질하는 어르신이 산다. 그 어르신 덕분에 늘 상쾌하게 집을 나설 수가 있다. 눈이 내리기가 무섭게 눈을 치우는 사람도 다름 아닌 그 어르신이다. 그분이야말로 슬기롭게 노년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닐까.

아크릴 실을 사다 친환경 수세미를 짜서 나눠 볼까. 천을 사다 마스크를 만들어서 이웃에게 나눠주면 어떨까. 잠깐씩 이웃의 아이를 돌봐줄 수도 있겠지.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면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길가에 우두커니 앉아서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느니 벌떡 일어나 동네라도 한 바퀴 돌아 볼 일이다. 아직 내 힘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좋지 아니한가.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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