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여행이다⑥] 영월여행, 단종의 숨결을 따라3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7.28 14:44
  • 수정 2020.07.28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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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여행, 단종의 숨결을 따라3

 

“때로는 조금 높은 곳에서 보는 이런 풍경이 나를 놀라게 해,
저 아래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펼쳐지거든…”
- <가을로> 민주의 대사 중에서

 

(단종 역사관 앞에서. 촬영 윤재훈)
(단종 역사관 앞에서. 촬영=윤재훈)

뙈약볕 내리쬐는 장릉은 코로나 여파인지 비교적 한산하고 내부는 넓게 조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숙종의 공(功)이 클 듯하다. 중종 때 복권상소가 올려 졌지만 거절당하고 숙종 때에 가서야 성리학자들에 의해서 비로소 노산대군으로 되었다가, 다시 정종과 함께 복위되어 ‘예(禮)를 지키고 의(義)를 잡는다’라는 뜻으로 단종(端宗)으로 묘호되니 말이다.

입구를 들어서니 <단종 역사관>이 있다. 조선왕조와 단종에 관한 이야기들, 왕세자의 일과들이 소박하게 전시되어 있다.

(장릉. 촬영 윤재훈)
(장릉. 촬영=윤재훈)

장릉을 가기 위해 오른쪽 숲길을 오른다. 여름 녹음이 진저리치며 빛난다. 하늘이 이렇게 파랄까 싶다. 우리가 조금만 환경은 보호 한다면 이런 하늘을 늘 보고 살 수 있을 텐데, 짙푸른 자연을 볼 때마다 늘 안타까움이 든다. “우리 인류는 ‘나와 환경은 한 몸’이라는 인식 속에서만 코로나를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장릉은 42기의 능 가운데 유일하게 강원도에 있다. 2기는 북한에 있는데,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남북이 힘이 합쳐 같이 올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곳은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 사적 제 196호 지정되었으며 이전에는 노산군묘로 불리다 숙종 때 능으로 승격이 되었다. 별칭으로 백성들이 노릉(魯陵)이라 불렀다.

조선시대(1392~1910) 왕실과 관련된 무덤에는 능(陵)과 원(園)이 있다. 왕릉으로 불리는 <능>은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무덤’을 말하며, <원>은 ‘왕세자과 왕세자비, 왕의 사친(私親)’들이 안장된다.

왕릉과 원은 단종 장릉과 여주의 영릉(세종대왕릉)과 녕릉(효종대왕릉, 형 소현세자는 아버지 인조의 견제로 독살되고, 둘째아들 봉림대군의 릉)를 제외하고는 한양으로 40km 이내에 입지하고 있으며, 왕릉이 40기, 원이 13기로 총 53기가 된다. 한양으로부터 100리 이내에 모셔야 한다는 경국대전의 규정을 벗어난 왕릉들인 셈이다. 영월에 남겨진 단종의 유배지 자취와 당시 충신들의 절의가 깃든 장소를 8폭으로 꾸민 화첩인 보물 제 1536호인 <월중도>를 보면, 제 1면에 장릉이 있다. 무력으로 폐위된 왕이기 때문에 단종릉에는 무인석이 없다. 그런데 장릉 주변의 소나무는 절을 하듯 유난히 단종의 능을 향해 구부러진 소나무가 있어 ‘충절송’이라고 부른다. 숙종이 추증과 복위를 승인함에 따라 뒤늦게 종묘 신위에 포함되었으며,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과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은 종묘 신위에 들지 못했다.

(사후까지 수습하며 단종을 모셨다는 엄홍도 제각. 촬영 윤재훈)
(사후까지 수습하며 단종을 모셨다는 엄홍도 제각. 촬영=윤재훈)

서강에 떠도는 유해를 영월 호장 엄홍도가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은 달게 받겠다”는 충정으로 수습하여 이곳에 밀장(密葬) 하였다.
장릉은 간소한 후능석물(厚陵石物) 양식이며 다른 왕릉과 달리 충절을 바친 신하들의 위판을 배향한 ‘배식단사(配食壇祠)와 충신각, 정려각’ 등이 있다.
단종은 숙종 7년 1681년 노산 대군으로 승격되고, 숙종 24년 1698년 단종으로 복위된다. 지하에서도 정순왕후와 함께 숙종에게 고마움을 표할 듯하다.

(충신각, 정려각, 장판옥 등이 있다. 촬영 윤재훈)
(충신각, 정려각, 장판옥 등이 있다. 촬영=윤재훈)

장릉을 내려와 홍살문 안쪽으로 들어간다.
산 아래로는 넓게 녹색의 융단이 펼쳐지고 정려각, 장판옥, 충신각, 수라간과 우물터 등이 보인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268인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 단종대왕 제향 시 제물을 올리며 집의 모양이 정(丁)자로 되어있는 정자각(배위청拜位廳)과 수라간, 보통 때는 조금씩 샘물이 솟다가 매년 한식 때 제사를 지내려면 물이 많이 용출되었다는 영천(靈泉)도 있다

(옥수수가 매달린 식당의 풍경이 운치가 있다. 촬영 윤재훈)
(옥수수가 매달린 식당의 풍경이 운치가 있다. 촬영=윤재훈)
(배가 고프면 풍경도 눈에 안 들어온다. 밥상을 앞에 두고 시원한 막걸리 생각을 하니 침이 넘어간다. 촬영 윤재훈)
(배가 고프면 풍경도 눈에 안 들어온다. 밥상을 앞에 두고 시원한 막걸리 생각을 하니 침이 넘어간다. 촬영=윤재훈)

“배가 고프다.” 점심이 너무 늦어 일행들은 약간 지친 듯하다. 특별히 잘한다고 하여 일부러 찾아온 집, 손님들이 많다. 한참을 기다리니 음식이 나오기 시작한다. 동동주를 먼저 한 순배(巡杯) 도니,


“햐, 그래, 이 게 여행의 참 맛이지”


감탄 소리가 나온다. 어느 것을 먹어도 별미다. 시(詩)를 열망하는 벗들과 왔으니 더더욱 그러하리라. 모든 것이 꿀맛이다. 농촌의 논들이 녹색인 요즘, 바람이 불 때마다 파도처럼 일렁이며 푸른 벼 줄기들, 농부들의 축복이다.

누군가의 탄성이 흘러나온다. “머니, 머니(?) 해도, 여행은 먹는 것이여”, 인간의 삶 대부분은 먹는 것과 자는 것으로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골집 마당에 핀 꽃들이 여행자의 흥분처럼 아름답다.

(빼어난 신선암(선돌) 풍경. 촬영 윤재훈)
(빼어난 신선암(선돌) 풍경. 촬영=윤재훈)

신선암(立石선돌)으로 간다. 서강 강가에서 신선(神仙)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작은 설레임도 인다. 강원도 길은 푸른 기운이 온 산하를 덮고 있다. 파란 하늘빛이 들어앉은 서강과 어울려 솟아있는 층암절벽은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고 우뚝하다. 천지가 신록의 절정이다 70m의 바위 절경이 빼어나다.

이곳은 유지태와 김지수 주연의 영화 ‘가을로’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현우는 마침내 검사가 되지만 백화점 붕괴로 사랑하는 여인을 눈앞에서 잃는다. 그리고 10년 후 ‘민주와 현우의 신혼여행’이란 다이어리가 도착한다. 그리고 민주가 짜놓은 여행코스를 따라 불타는 가을 여행을 떠난다.

“때로는 조금 높은 곳에서 보는 이런 풍경이 나를 놀라게 해,
저 아래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펼쳐지거든…”
- 민주의 대사 중에서

국가 지정문화재 명승 제 76호 로 지정된 선돌은 영월읍 방절리에 있으며, 신선암 아래로는 옛길(신작로)이 있으니 시간이 있는 여행자라면 한 번 걸어볼 일이다. 고생대 석회암이 발달된 수직의 갈라진 틈(절리) 사이로 암석이 부서져 내리면서 점차 기둥모양이 된 것이다. 주변 하천의 침식작용으로 석회암이 깎여져 나가면서 더욱 수직으로 만들어졌다.

그 아래 소(沼)에는 자라바위의 전설이 여태 전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한 가지씩 이루어진다고 하니 한 번 빌어볼 일이다. 320미터의 산허리, 소나기재에서 들어가면 된다

(사공은 노를 잡고 손님를 기다린다. 촬영 윤재훈)
(사공은 노를 잡고 손님를 기다린다. 촬영=윤재훈)

이제 석양빛이 붉어오고 <한반도 지형>을 찾아간다. 그런데 뗏목체험이 6시까지만 가능하다고 하여 서둘러 진로를 바꾼다. 바로 근처에 여행지들이 모여 있으니 움직이는데도 큰 부담이 없다.

뗏목에 오르니 사공의 넉살이 참 좋다. 그의 걸쭉한 입담에 사람들이 웃음 짓는다. 노를 저어보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하더니 여학생 두 명에게 노를 젓게 한다. ‘삿대’를 아느냐고 물어본다. “그대는 아는가? 나는 모른다. 단지 중학교 때 배운 노래만 기억난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돚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
- ‘푸른 하늘 은하수’

단지 이 노래 속에서만 아득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삿대’. 거리에서 싸울 때나 들리는 그냥 ‘삿대질’이 아니다. 요즘 아이들의 입에서는 동요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무슨 말인지도 알아듣기 힘든 랩만 난무한다. 너와 나의 소통보다는 마치 투명 인간 같다. 우리에게 진정 아련하게 감흥을 주었던 것들은 점점 사라져 버리는 느낌이다. 동요소리가 들리지 않는 삭막한 시대다.

흰 옷의 사공을 긴 막대기 하나를 들더니 강 속으로 집어넣는다. 물속으로 사라졌던 장대가 이내 솟구쳐 오른다. 바로 강 깊이를 재거나 얕은 곳에서 배를 밀 때 쓰는 도구다. 이게 삿대다. 사공은 계속해서 흥을 돋군다.

(김수영 문학회 전 회장님이 신이 나셨다. 바로 춤이 나온다. 촬영 윤재훈)
(김수영 문학회 전 회장님이 신이 나셨다. 바로 춤이 나온다. 촬영=윤재훈)

사공은 이 일에 이력이 난 듯 계속해서 스토리텔링을 들려준다. 악어바위, 공룡바위군, 물 위에 여우 바위, 나름대로 그 형태들을 갖추고 있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저 위 전망대에서 한반도 지형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도 손을 흔들며 소리를 외친다. 어른들의 가슴에도 잠시 동심이 깃드는 듯하다. 자연 속으로 나오니 사람들의 가슴이 넓어지고 스스럼이 없어진다. 싱그런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만약 서울 도심 한 가운데에서 이렇게 웃음을 짓는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만일 여성 앞에서 그랬다가는 ‘미투’로 잡혀갈 지도 모르는 불온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이 현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지하철 안에는 모두 굳어 있는 얼굴로, 더더구나 요즘은 마스크를 눈 아래에까지 올리고, 거기에 모자까지 덮어쓰고 있는 모습들은 정말이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누가 더 예뻐요”, 하얀 잇속을 드러낸 아이 같다. 촬영 윤재훈)
(“누가 더 예뻐요”, 하얀 잇속을 드러낸 아이 같다. 촬영=윤재훈)

사공은 강물에 발도 담궈 보라고 한다. 모처럼 양말을 벗고 발을 담근다. 시원한 물살이 나를 단숨에 어린 시절로 소환한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훌러덩, 벗고 마을 강가에서 동무들과 천둥벌거숭이가 됐다. 만일 비가 오면 그렇게 벗고 동네 한 바퀴를 뛰어다녔다. 어른들은 쳐다보며 웃었다. 그런 시절이 이 땅에서 있었다. 그런 추억을 간직한 이들이 이 나라의 5, 60대 이상일 것이다. 입에서는 노랫소리가 저절로 흥얼거려진다. 자연으로 나오니

“아, 세상 참 좋다.”

(쟁반 위에 올려진 아름다운 섬, 한반도. 촬영 윤재훈)
(쟁반 위에 올려진 아름다운 섬, 한반도. 촬영=윤재훈)

오전에 들렸던 청룡포나 이곳 한반도 지형처럼 이 지역에서는 이렇게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지형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런 곳을 <감입곡류> 하천이라 한다. 물이 흐르는 지역이 융기되거나 계속 아래 로 흐르면서 구불구불한 자연 하천 형태를 띠는 것이다. 강이 흐르는 바깥쪽은 물이 빨리 흐르기 때문에 주변의 암석을 깎여서 절벽이 생기며, 강의 안쪽은 물이 천천히 흘러 모래가 쌓인다. 그러면서 강이 점점 옆쪽으로 암석이 깎여서 넓어지면 이와 같은 한반도 모양이 생긴다고 한다.

앞으로 수십 년, 수백 년 후, 이 모습이 어떻게 변할까. 강은 더욱 넓어지고 다른 모습으로 변해갈 것 이다. 먼 훗날 다시 이 지구를 여행 오면 지도책에서는 이 모양이 사라지고 없겠다.

“그때는 이 초록별에 와 누굴 만날까?”

(왕이 되어 서글픈 단종. 촬영 윤재훈)
(왕이 되어 서글픈 단종. 촬영=윤재훈)

다시 ‘단종과 정순왕후’를 생각한다.

왕조의 흥망성쇠(興亡盛衰), 단 30년도 가기도 힘든 그 왕 노릇을 위해 조선의 역사는 얼마나 폭압적이고 피바람을 불렀는가? 백성들의 피땀 위에서 조성된, 단 몇 사람, 그들만의 리그이지 않았는가.

그렇게 피바람을 불렀던 작은 아버지 수양대군도, 인과(因果)에 의해서인지 말년은 그리 좋지 못했다. “말년을 보며, 특히 40대 이후, 그 사람이 얼굴을 보며, 여지껏 그가 살아온 삶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야사에 의하면, 수양대군은 1457년 음력 6월 갑자기 악몽을 꾸고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묘를 파헤쳐 폐서인 시켰다. 그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가 나타나 “내 아들을 죽인 원수”라며 침을 뱉은 후 병증이 심해져 그랬다고 한다. 악몽과 나병은 갈수록 깊어지고. 어의들의 치료에도 백방이 효험이 없어 온천욕을 즐겼다고 한다.

한 번은 오대산 상원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100일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치고 온 몸이 가려워 혼자 목욕을 하는데, 동자승이 지나가 등을 밀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네가 나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감 옥체에 손을 대고 흉한 종기를 씻어드렸다는 말을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더니, 동자승도 웃으면서 “상감께서도 후일에 누구를 보시던지 오대산에서 문수동자가 등을 밀어주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라며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온 몸의 종기와 부스럼이 씻는 듯이 나아 부처님의 은혜에 감동한 세조는 상원사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뒤 5만 명의 화공과 5만 명의 목수를 동원해 자신의 기억을 되살려 문수동자상을 조성해 상원사에 봉안했다. 지금도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는 세조가 보았다는 목조 문수동자상이 있으며, 1984년 10월 15일 국보 221호로 지정되었다.

세조의 딸 의숙공주도 아버지의 나병이 낫기를 기원한 기도문을 지어 문수동자전에 바쳤는데, 1984년 7월 21일 상원사의 승려들 사리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문수동자상 내에서 속적삼도 발견되었는데 1991년 3월 조사 결과 세조의 것으로 밝혀졌다.

말년의 세조는 심한 악몽에 시달렸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에 정신병적인 망상도 심해져 불교에 귀의한다. 어린 단종을 비롯한 형제들과 일가친척 외에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피바람을 일으켰으니 하늘이 가만있지는 않았나 보다. 1468년 9월 23일 수강궁의 정전에서 ‘나병’으로 승하한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언제 올려다보아도 평화롭다.

말이 많았다. 묵언(黙言)으로 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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