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의 지구를 걷다⑬] 칭다오(靑島)의 눈물2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8.07 17:00
  • 수정 2021.04.08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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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靑島)의 눈물

 

“이번 여행을 통해 세계중심,
중화(中華)의 나라라고 자부심을 갖은 그들의 진화(眞華)를 보고 싶다.”

(칭다오 맥주를 만드는 라오산의 노자상, ‘상선약수(上善若水)’처럼 세계를 주유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촬영=윤재훈)
(칭다오 맥주를 만드는 라오산의 노자상, ‘상선약수(上善若水)’처럼 세계를 주유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촬영=윤재훈)

두 번째 세계 여행길은 칭다오에서 시작하다.

칭다오에서 시작한 여행은 72개의 유명한 샘이 있어 ‘샘의 도시’로 불리는 ‘지난(제남(濟南)’으로 향했다. 그 인근에는 중국인들의 성산 ‘태산(泰山)’이 있었으며 이어, 천 년 고도 ‘난징’, 정원의 고향이며 세계문화유산이 많은 ‘쑤저우(소주(蘇州)’,와 호적한 호수의 마을 ‘퉁리’,에서의 고적함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이어 중국 제일의 현대문명이 넘실거리는 동방명주 TV탑과 그 뒷골목에 숨어있던 최대의 판자촌 '장차오'와의 극명한 대조, 임정(臨政)의 숨결이 살아있는 ‘상하이’, 중국의 7대 고도 중의 하나인 ‘항저우’을 거쳐, 이상하게 관광객에게는 돈을 받지 않은 케이블카를 타고 입구까지 도착하여 천 개의 봉이 기기묘묘한 눈 쌓인 ‘황산’에 올랐고, 동남쪽의 끝 따뜻한 ‘샤먼’ 항구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달마처럼 서쪽에는 방향을 잡았다.

영국에서 반환되고 시끄럽게 끓고 있는 홍콩의 바다를 보면서 ‘광저우’를 지나, 천 개의 산이 솟아 있는 광시 좡족 자치구이며 강물 위의 비경을 간직한 고도 ‘구이린(계림桂林)’, 3,000년의 역사를 지닌 ‘창사’ 중심가에서는 구이린에서 같은 게스트에 지냈던 초등학교 교사 아가씨들 세 명과 반갑게 재회를 했다.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천 개의 바위기둥 사이로 무림의 고수들이 날아다닐 것 같은, 이 세상의 풍경이라고는 짐작할 수 없었던 ‘장자제’,

(윈난성 다리(大理) 고성. 촬영=윤재훈)
(윈난성 다리(大理) 고성. 촬영=윤재훈)

거대한 짐승들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쿤밍’의 거대한 바위 숲 ‘석림(石林)’, 그리고 마침내 ‘윈난성’으로 입성했다.

호랑이가 뛰어넘을 만한 천길 계곡 아래 거친 물길 ‘호도협 종주’, 나시족의 고향 윈난의 ‘다리’와 ‘리장’ 그들의 불멸의 성산 ‘옥룡설산(玉龍雪山)’과 구체구을 빼닮은 ‘남월곡’의 비취빛 물, 지상의 천국이라는 ‘샹그릴라’로 이름을 바꾼 후 관광객이 밀려오는 도시, 그리고 ‘메리설산’.

(한 번 돌릴 때마다 불경을 한번 읽거나, 육자진언을 한번 외운 것과 같은 공덕이 생긴다는 마니차(摩尼車마니륜). 촬영=윤재훈)
(한 번 돌릴 때마다 불경을 한번 읽거나, 육자진언을 한번 외운 것과 같은 공덕이 생긴다는 마니차(摩尼車마니륜). 촬영=윤재훈)

어느덧 중국 비자 3개월이 만료되어 간다. 할 수 없이 미얀마 날아가 28일만 머문 후에 다시 이곳으로 왔다. 왜냐하며 미얀마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스물 여드레 날만 머물 수 있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여행을 하면서 이 점도 궁금했다. 하염없이 여행자들이 오래 머물면 그 나라에서 더 경비를 많이 지출할 것이고, 그럼 그 나라에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더구나 한국의 여권파워는 2019년 세계 2위, 2020년에는 3위에 해당하는 부유한(?)나라인데 말이다.

다시 중국의 서쪽 광활한 대지 위그루인들의 땅으로 방향을 잡았다. 사막지대 실크로드 길목, 서북지방 최대의 공업도시이자 간쑤성의 성도인 ‘란저우’에서 성스러운 도시 작은 티베트 ‘샤허’, 칭하이 성의 성도 ‘시닝’, 해질 무렵 영롱한 무지개 빛으로 바뀌는 ‘칠채산’이 있는 ‘장예’,

만리장성의 서쪽 끝인 ‘자위관’을 지나 너무나 가고 싶었던 둔황의 ‘막고굴과 명사산, 월아천’을 보고 당도가 높은 과일들이 풍부하게 생산되는 ‘투루판’, 중국 서쪽 대륙의 끝, 중국 서부의 최대도시 ‘우루무치’까지 가서 중앙아시아를 넘어 카자흐스탄으로 갈 것이다.

유사(有史) 이래 이 거대한 대륙은 우리와 이웃하여 상전처럼 지낸 적이 많았으며, 그 역사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조공을 바치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던 그런 종속 관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옛 문화와 시문들, 심지어 음악, 그림들까지 많은 것들이 그들에게서 전해져왔다. 그러니 싫든 좋든 그들을 배제하고는 우리의 옛 문화와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가 곤란할 지경이다.

“이번 여행을 통해 세계중심, 중화(中華)의 나라라고 자부심을 갖은 그들의 진화(眞華)를 보고 싶다.”

(라오산 입구에 위치한 사찰. 촬영=윤재훈)
(라오산 입구에 위치한 사찰. 촬영=윤재훈)

라오 산(崂山)은 깨끗한 광천수로 만든 <칭다오 맥주>의 고향이며, 청도는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항구 도시이다. 나는 오늘 해변가로 나와 끝도 보이지 않은 망망한 황해바다를 바라보며 저 너머에 고국이 있을 것이라고 가늠해 본다. 해양성 기후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우리나라에 비해서 바닷바람의 끝이 덜 매섭고 따뜻하다.

역사적으로 이곳 산둥 반도는 북부 개발에 집중했다. 그중 칭다오의 옛 명칭은 <교오>라고 불렸으며, 작은 어촌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청나라 말기인 1891년에 군사시설이 건설되면서 발전이 시작되었다.

일치감치 산업혁명을 이룩한 유럽 열강들은 그 잉여에너지를 약한 나라 속국 만드는데 열중했고, 노예화 시켰다. 그 틈바구니에서 인구수만 많았지 서양에 비해 문물이 늦었던 아시아의 거대 제국은, 그들의 발길 아래 놓였다.

청일 전쟁 후, 삼국 간섭으로 중국에 은혜를 베풀었던 독일이 1897년 칭다오 일대를 치외법권(治外法權) 지역인 조차지(租借地)로 차지하면서, 그 뼈아픈 역사가 아이러니하게도 칭다오에 이런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산둥 반도 일대를 자신들의 세력 아래 두었고 1898년 독일에 의해 개항된 이후 역설적이게도 칭다오는 급속도로 발전되었다. 그 영향으로 온 도시가 서양풍의 빨간 뾰족 지붕의 집들이 많은데, 그 지붕의 뾰족함만큼이나 이곳 칭다오의 슬픈 역사가 숨어있는 셈이다. 그리고 여행자들은 그들이 남기고 간 유산인 칭다오 맥주를 마신다.

(칭다오 바닷가. 촬영=윤재훈)
(칭다오 바닷가. 촬영=윤재훈)

독일은 원래 이곳을 극동의 전초기지 군항으로 개발했다. 자국민들은 그런 상황을 50년 동안 못 본 척, 못 들을 척 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야욕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은 패전국이 되자 자신들이 산둥성에서 가지고 있던 권리와 이권을 일본에게 양도하려 했다. 이에 격분한 베이징 학생 3, 000여명이 1919, 5, 4일, 바로 우리가 일본치하에서 3, 1만세를 부르던 그 암흑의 시대에, 천안문 광장에 모여 반대집회를 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는 급속도로 확산되어서 중국 전역을 반일, 반독으로 들끓게 했고, ‘아시아 민족의 전쟁 원흉, 슬픔의 산물’ 일본도 1922년에 물러났다. 그 슬픈 역사의 땅이, 지금 비행기 아래로 치솟은 빌딩과 은빛 바다로 눈부시게 펼쳐지고 있다.

“과거는 반성하고 진실로 사죄하여야, 용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도 있다.
그런 다음에야 세상을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일제는 전쟁 만행도, 아시아 여인들의 정신대도,
오직 거짓말로 일관하며 세계인과 피해 당사국으로부터,
나아가 자국민들에게까지 지탄을 받고 있다.

그나마 독일은 반성하고 청산할 것은 청산하니,

세계인들이 어느 정도 수긍(首肯)하고 국민들의 화합의 씨앗까지 되지 않았는가.

‘친일(親日)의 문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칭다오의 풍경. 촬영=윤재훈)
(칭다오의 풍경. 촬영=윤재훈)

칭다오에는 730.64km 길이의 해안선이 있고, 총 길이 50km이 넘는 5개의 주요 강이 흐르고 있다. 전 축구 감독 김정남이 청도 해우(海牛, Hainiu) 프로 축구단의 감독을 역임했던 곳이라, 더 정이 간다. 거기다 한국 사람들이 약 8만 명이나 살고 있다고 하니 깜짝 놀랐다. 어디를 가나 우리 한국민들은 잡초처럼 질기게 잘 살아남은 모양이다. 유스호스텔 방 앞에도 한국어로 선명하게 교회 로고와 연락처까지 있는 것을 보았다.

(라오산의 도교사찰. 촬영=윤재훈)
(라오산의 도교사찰. 촬영=윤재훈)

여기에 라오 산(崂山)은 도교의 성지로 이름난 산이며 풍경의 변화가 다양하다. 해발 1133m로 중국 해안선 상에서 유일하게 해발 1000m 이상의 산이며 '해상 제일의 산(海上名山第一)'이라는 별칭까지 갖고 있다.

1982년 국무원은 칭다오의 라오산을 국가 풍경 명승 구역으로 지정하였으며, 1992년에는 스라오런 해수욕장까지 국가급 휴양지로 비준하였다. 대한민국 총영사관도 1994년 9월 12일에 개관하였다.
1984년에 중국 정부는 칭다오를 경제특구로 지정했다. 그 후 2, 3차 산업의 놀라운 발전을 경험했다. 산둥성의 주요 무역항으로 외국인 투자와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도 이곳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황해와 접해있는 칭다오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 산의 도시이기도 하여, 라오 산(崂山)을 비롯한 다쩌 산(大泽山), 다사오주 산(大小珠山) 등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산과 바다와 도시를 하나로 묶어 나날이 특화된 여행지로 변모해 가고 있어 앞으로 변화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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