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의 지구를 걷다⑭] 도미토리_배낭 여행자들의 웃음소리3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8.10 16:23
  • 수정 2020.08.22 19:1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미토리(Dormitory)
가난한 배낭 여행자들의 천국3

 

“매일 사람들이 찾아오고 떠난다.
다들 다양한 이야기로 자기만의 발자국을 남기며 간다.”

 

매쌀롱, 중국인 마을 게스트 하우스

(매싸이 국경 강가 게스트하우스. 촬영=윤재훈)
(매싸이 국경 강가 게스트하우스. 촬영=윤재훈)

미얀마와 타일랜드를 가로지르는 매싸이 국경 강가의 게스트하우스에, 새 새끼처럼 찾아든 지가 상당히 오래 되었다. 오후가 되자 건너편 숲속 가난한 미얀마 마을에서는 두런거리는 말소리와 함께 저녁연기가 피어오른다. 아이들은 오늘도 수영을 하여 좁은 두 나라 국경을 오고 간다. 아이들은 국경의 무의미함을 이미 오랜 시간 몸으로 체득한 듯하다. 지구의 운행도 그렇게 자연(自然)스러우리라.

“새들은 마음대로 오고가지만
인간만이 어리석어 땅 위에 철조망을 쳐놓고,
서로 오고가지 못하게 한다.”

“춘추 전국시대, 드넓은 대륙에서
국경이란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는가?
수시로 나라가 없어지고 생겨나고
인걸(人傑)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던가?”

하룻밤 유숙하는데 독채 바나나 지붕 나무집이 100b(4000원)이다. 배낭 여행자에게는 제격이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편안하게 며칠씩 국경의 강가를 거닐 수 있다. 비싼 한국의 게스트하우스하고는 비교가 안된다. 한국의 게스트하우스는 주머니가 가벼운 배낭 여행자들의 플랫폼이 아니다. 그냥 숙박업소이다.

이사벨이라는 프랑스 화가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출발했다. 다리 건너편 미얀마 땅인 타질렉을 보며 안녕을 고(告)했다. 언제 다시 이 길을 올 지는 기약이 없다. 마을 입구 쪽 신혼의 단꿈이 뚝뚝 떨어지는 젊은 카렌족 부부에게도 손을 흔든다.

이사벨도 장기 여행자로 경비를 보충하기 위해 매싸이 초등학교에서 잠시 미술교사 아르바이트를 했다. 미국에서 여행자로 지나가다 게스트하우스 종업원으로 눌러앉은 50대 성격 급한 사내의 도움으로 잠시 자리를 잡았다.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은 외국인들이 많이 오고 모국어인 영어를 쓰며 활달한 그가, 서로의 편리에 적당했나 보다.

(프랑스가 화가가 그려준 필자. 촬영=윤재훈)
(프랑스가 화가가 그려준 필자. 촬영=윤재훈)

 

막 시가지를 벗어나려하자 그녀가 화를 낸다. 배낭이 각자 두 개씩인데 앞에 놓고 등에 커다란 배낭을 또 매야하니 짜증이 난 모양이다. 슈퍼 앞에서 잠시 투닥거리다 시원한 음료수 한 병씩을 마시고 다시 출발한다.

그런데 1,000미터가 넘은 산 고지를 넘어가려니 오토바이가 힘에 부치는지 허덕거리며 올라가지를 못한다. 할 수 없이 한 사람이 내려 산등성이까지 걷다가 다시 타기를 반복했다. 밤늦게 도착하니 방이 하나뿐이다. 침대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게스트하우스에 익숙한 배낭 여행자들에게는 우선 피곤한 몸 누이기에 바빴다.

이곳은 중국인 마을이며, 1,300m가 넘은 산등성이에 모여 산다. 산 아래에 있는 치앙라이에도 많은 중국인들이 모여살고, 심지어 그곳에는 거리 이름까지 중국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들은 놀랍게도 국민당 군대의 잔당인 ‘고군(孤軍·고아가 된 군대)’의 후예들이며 국민당 8병단 93사단 소속이었다. 중국이 건너다보이는 이 산봉우리에서 장제스의 출진 명령만 기다리며 아버지들은 총부리를 겨누다 한 생을 다 보냈다. 이제 그 아버지들은 떠나고 후손들이 모여 산다. 장제스는 그 섬으로 쫓겨 간 이후 이들을 영영 잊어버렸나 보다.

(매싸롱 재래시장, 다양한 오지민족들이 모여산다. 촬영=윤재훈)
(매싸롱 재래시장, 다양한 오지민족들이 모여산다. 촬영=윤재훈)

1925년 3월 국민당의 총리 쑨원(손문)이 죽고 장제스가 최고 지도자가 되어 권력을 잡자, 제 2당이었던 공산당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6,000여 명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이 숫자는 공산당에 약 80%에 해당되었다.

이어 국공내전(國共內戰)이 반발했고 마오쩌둥과 살아남은 공산당원 3,000여명은 장제스를 사살하기 위해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초반에는 계속 밀렸다. 당시 400만에 육박하던 장제스 군대에 비해 장비 면에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에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부정부패를 폭로하며 민심을 파고들어 동요케 만들었다.

이어 농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할 무렵 마오쩌둥은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지주들의 토지를 나누어 주며 환심을 사는 정책을 펼쳐 농민계층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승기를 잡은 공산당은 국민당의 수도인 난징까지 함락시킨다.

장제스는 그가 권력을 잡을 당시 자금성에서 청나라 황실이 소유하던 어마어마한 보물 수십만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며 중국내에서 세력을 확장하자 보물의 약탈을 우려해, 20,000여 상자에 나눠 담아 장쑤성, 상하이, 난징을 거쳐 충칭으로 이동시킨다. 이는 제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무려 15년 동안이나 그렇게 한다.

그리고 공산당에게 밀리자 중국인을 공산당으로부터 피신시킨다는 명목으로, 1949년 12월 미국의 수송선 5척을 지원받아 보물과 함께 대만으로 도망간다. 이후 공산당의 비행기에 의해 배가 발견되지만 보물 때문에 차마 폭탄을 던지지 못하고, 두 사람은 역사 속에서 중국 보물을 지킨 원수지간으로 남는다.

(청년은 하루 종일 손님을 기다리지만, 오늘도 허탕이다. 촬영=윤재훈)
(청년은 하루 종일 손님을 기다리지만, 오늘도 허탕이다. 촬영=윤재훈)

이곳은 또한 바로 미얀마와 라오스까지 이어지는 <골든 트라이앵글> 루트다. 세계적인 마약왕 ‘쿤사’가 바로 이 길 위에서 활개 치며 정부군들과 대치하며 명맥을 이어나가던 곳이다. 지금도 산속 아카족, 리서족, 몽족 등 소수민족들의 움막에서는 모로 누워 마리화나를 피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게스트 하우스 주인도 국민당 후손이다. 그는 저녁 무렵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꼭 혼자 맥주잔을 기울인다. 청정자연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에게 초록의 향기를 무한 제공한다. 어느 날은 그와 같이 그 푸른 공기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마시기는 내가 마시는데 취하기는 산맥들이 먼저 취했다.”

(명랑한 아카족의 소녀들. 촬영=윤재훈 기자)
(명랑한 아카족의 소녀들. 촬영=윤재훈 기자)

예닐곱 살쯤 보이는 두 명의 아카족 소녀들이 청소를 한다. 아이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종일 싱글생글이다. 그 아이들을 보면 세상의 모든 시름이 녹아내린다. 나의 어린 날도 저와 같았을까? 아이들의눈망울을 보면 세상이 편안해 진다.

바로 옆에는 재래시장이다. 아침부터 열리지만 오후 시간이 되며 인근 산 속에 사는 소수민족들이, 망태 한 가득 온갖 야채들을 지고 시장비라도 벌기 위해 나온다. 10세가 갓 넘었을까 하는 소녀들도 망태를 메고 나오고, 말을 타고 온 아버지와 아이도 있다. 아이는 하루 종일 게스트하우스 기둥에 말을 매어두고 탈 사람을 기다린다.

그 곳에 약간 모자라는 듯한 한 아카족 사내가 시장 청소를 하며 그 한 쪽 귀퉁이에 움막을 짓고 산다. 49세인 사내는 너무 착해 항상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는다. 그는 나와 의기가 통했는지 어느 날 내가 밥을 해먹는 줄 알고 밥솥을 가져다준다. 한참 동안 나는 이 인근에서 나왔을 법한 표고버섯을 사서 버섯밥을 해먹었다. 가끔은 프랑스 화가와 같이 먹기도 했다.

다음 날은 인근 아카족 마을에 결혼식이 있다고 함께 가자고 한다. 산모롱이를 돌아 찾아간 마을은 오전부터 잔치 분위기였으며 전통적인 그들의 결혼식은 참 생소했다.

(산 속 마을 게스트 앞 재래시장, 깔리양족과 아카족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산다. 촬영=윤재훈 기자)
(산 속 마을 게스트 앞 재래시장, 깔리양족과 아카족이 평화롭게 공존하며 산다. 촬영=윤재훈 기자)

옛날에 이 일대에 소수민족들은 대부분 양귀비를 심었다. 그러니 마약루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70년 동안 국민들로부터 아버지처럼 존경을 받던 지금 국왕의 아버지인 <푸미폰 아둔야뎃 마하라자국왕>는 이곳에 일대 개혁을 가져왔다. 소수민족들을 가엾게 여겨 양귀비 밭을 일제히 갈아 엎고 차 재배를 할 수 있게 지원했다. 그 결과 이 일대는 타일랜드에서도 질 좋은 대규모 차생산지가 되었다. 특히 1,000m미터 고지가 넘은 곳에서 생산되는 차는 유명하며 치앙마이 녹차와 커피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어느 날은 커피를 재배하는 사내의 집을 놀러갔다. 놀랍게도 그는 한국에서 돈을 벌어와 커피농장주가 되었다. 그의 창고에는 커피 가마니가 쌓여있었으며 고지 위에서 익어가는 넓은 차밭은 청정 그 자체였다.

우즈베키스탄, 타슈겐트 게스트하우스

(시장 한 귀퉁이 큼지막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시장. 촬영=윤재훈)
(시장 한 귀퉁이 큼지막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시장. 촬영=윤재훈)

십 년이 넘도록 바람 따라 떠돈다는 중년의 한국인 0씨, 한국에 특별히 머물 이유가 없다고 한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 공무원을 한다는 한국인 부부와 가족, 한국인 청년도 만났다. 모처럼 한국인 0씨와 고려인 재래시장을 구경했는데, 그는 스마트폰 하나만 가지고도 정말 지리에 밝았다.

시장으로 들어오는 나를 바라보는 고려인 여인의 눈빛이 애잔하게 가슴으로 들어온다. 어머니 적 조선의 맛을 간직하고 있다는 딸들에게서 된장과 젓갈을 샀다. 옆에 아주머니는 고춧가루가 덜 묻은 것 같은 김치를 그냥 싸주었으며, 점포도 없이 길거리에서 장사하는 아주머니도 동포를 만났다며 싱건지 무를 담아주며 먹으라고 한다. 어느 아주머니와는 사진을 찍고 이모앱의 주소를 나누어 입력했다.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들은 우수하기로 정평이 나있었다. 어느 날 시베리아 열차에 강제로 태워져 눈보라치는 시베리아 벌판에 빈 몸뚱이만 버려졌던 고려인들. 그들은 살기위해 두더지처럼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 목숨을 연명하며, 이 낯설은 이국에서 중산층을 유지하며 살았었다. 아랄해에 인접한 모래땅도 고려인이 들어가면 옥토를 만들었다.

그러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16개 연방이 독립되었다. 그러자 학교나 공공기관 등 요소요소에 있던 고려인들은 하루아침에 쫒겨나고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현지인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요행히 견뎌냈다. 그 사람들이 다시 이 나라에서 중산층 정도를 이루며 살아간다고 하니, 그들의 끈질긴 생활력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어느 곳이나 고려인들이 살고 있었다.

0씨와 나는 의기가 통해 저녁을 함께 먹기 위해 슈퍼로 갔다. 돼지고기를 넉넉히 사고 야채와 마늘, 붉은 양파 등을 준비했다. 계산을 하기 위해 계산대에 들어서자 주인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는 한국에서 4년 간 일을 했단다.
그리고 슈퍼를 열고 결혼을 하고 차까지 샀다는 사내,
그는 ‘코리아 드림’을 이룬 듯했다." 

저녁에 바로 옆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리고 술을 사러 다른 집으로 갔다. 타슈겐트에서는 술만 파는 집에 가서 술을 사야한다. 슈퍼에서는 팔지 않는다.

(물 담배로 묘기를 보여주는 게스트하우스 종업원. 촬영=윤재훈)
(물 담배로 묘기를 보여주는 게스트하우스 종업원. 촬영=윤재훈)

게스트의 주인은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온 사람이었으며, 종업원은 이 나라 청년으로 아주 친절했다. 그는 한두 마디 한국어도 할 줄 알았으며, 한국인 친구가 있다고 하며 한국으로 페이스북 전화를 걸더니 연결시켜 준다.

더운 날씨인데, 부엌에는 몇 사람의 외국인들이 있었다. 0씨와 나는 오랜만에 삼겹살과 고기를 구워 고국의 기분을 느끼며 동포의 동질감을 느꼈다. 그도 나도 오랜 여행생활에 평소보다 과음하여 맥주를 마셨지만 취하지는 않았다. 말이 잘 통하는 한 민족을 만나니, 소중함이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고국으로 돌아가면 사람들에게 더 친절해지리라고 다짐하지만, 지하철에서 상대방과 눈길이라도 마주쳐 미소를 지으면 봉변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적이 걱정스럽다.

이국을 여행하면서 서로 간에 눈길이 마주치면 대부분 미소를 지으며 같이 웃어주었다. 만약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사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태국인의 인사를 꼽을 것 같다. 타일랜드 북쪽 치앙마이를 여행하다 보며 그냥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90도로 “싸와디 카(안녕하세요)”라고 고개를 숙인다.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왓(Wat사찰)에서 그런 정갈한 여인네들을 만나면, 청조한 아침나절 물가에서 수련꽃이라도 흔들거리는 듯 쏴한, 향기가 밀려오는 것 같아, 저절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존경심이 올라온다.

물질문명의 발달이 한없이 우리를 편리하게 해주는 것 같지만, 고국의 길거리를 걸으며 웃음을 잃어버린 한국인을 보면, 허전한 마음 한구석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세계를 자동차로 여행 중인 유럽젊은이들. 촬영=윤재훈)
(세계를 자동차로 여행 중인 유럽 젊은이들. 촬영=윤재훈)

단체로 여행한다는 서양 젊은이들의 승용차가 한 대가 들어온다. 본네트 위에는 그들이 지나온 루트가 자랑스럽게 그려져 있다. 그날 밤 여행 전용 차량으로 여행하는 가족들이 한 팀 더 들어왔다. 밤늦게 들어온 일본인 여행자와 마당에서 맥주 한 잔을 나누었으며, 그는 일정이 바쁜지 아침에 다른 도시를 찾아 떠났다.

“매일 사람들이 찾아오고 떠난다.
다들 다양한 이야기들로 자기들만의 발자국을 남기며 간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얀 구름들이 떠간다.
회자정리(會者定離)다.”

저작권자 © 이모작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