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 라이프⑰] 도시락 찬가

김경 기자
  • 입력 2020.08.11 15:36
  • 수정 2020.09.04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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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
[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이번에는 며느리가 좋아하는 꽈리고추 볶음이다.

나는 오늘 반찬의 대미를 장식할 주재료에 슬쩍 윙크를 보낸다. 포도씨유와 게간장이 자글자글 한소끔 끓어오르는 프라이팬에 푸릇푸릇한 꽈리고추를 재빨리 넣어 볶으니 금세 윤기다 돈다. 마늘 슬라이스와 잔멸치를 곁들여 한 차례 더 볶는다. 상큼한 고추 향이 주방 한가득 떠돈다. 마지막으로 고춧가루는 보일 듯 말 듯, 통깨는 듬뿍 흩뿌린다. 맛은 차치하고 비주얼만으로도 대만족이다.

얼마 만인가. 작정하고 이것저것 넉넉하게 솜씨를 좀 부려보았다. 아들네가 오면 같이 식사하고 나서 싸 보낼 요량이다. 그동안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주로 외식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누가 뭐래도 집 밥이 최우선이다. 요즘에 네 살배기 손자와 함께 마스크를 쓰고 맛집을 기웃거릴 할머니는 없다.

조리대가 제법 풍성하다. 두 시간 남짓 우왕좌왕하며 열의를 보인 성과물이다. 특별한 요리는 없고 죄다 수수한 밑반찬 수준이지만 은근히 뿌듯하다. 신바람이 난다. 귀염둥이 손자가 오늘은 또 어떤 새로운 재롱으로 웃음꽃을 피울까. 생각만으로도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멸치볶음은 호두, 잣, 땅콩이 멸치보다 더 기세등등하고, 우엉조림과 연근조림은 진갈색으로 반들거리느라 몸부림을 친다. 손자가 좋아하는 쇠고기 완자는 좀 너부데데해도 손자처럼 예쁘다. 새우젓 간을 한 호박나물과 들기름으로 조물조물 무친 가지나물은 어머니의 손맛을 품고 있다. 풋고추, 당근, 양파가 촘촘히 박힌 통통한 달걀말이는 한결같이 아들이 좋아하는 반찬이다. 어슷썰기 한 문어숙회에는 남편의 젓가락이 제일 먼저 닿을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내 음식의 완성도는 역시 깨알, 참깨가 화룡점정이다. 모든 반찬 위에 거침없이 쏟아 내린 고소한 참깨여!

어떤 걸 꺼내지? 나는 싱크대 문을 열고서 잠시 망설인다. 반찬이 하나하나 모양을 갖출 때부터 왠지 반찬통에 신경이 쓰였다. 가게 진열대를 방불케 하듯, 차곡차곡 쌓인 반찬통을 보노라니 픽, 웃음이 나온다. 누가 보면 음식의 달인 정도로 오해할 수 있겠다 싶다. 새삼 아들 녀석의 중학 시절 한때가 생각난다. 녀석이 친구들을 몰고 와 놀고선 밖으로 나가다가 느닷없이 주방 앞에서 멈칫거렸다. 야, 니들은 울 엄마가 집에서 젤 싫어하는 장소가 어딘 줄 알아? 바로 여기야. 여기, 주방! 아무튼 나는 가장 깔끔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유리 반찬통을 선택한다. 훈김이 어느 정도 나간 반찬들부터 차례차례 담기 시작한다. 투명하게 내다보이는 반찬들은 아무리 보고 또 봐도 흐뭇하다. 먹음직스럽다 못해 아름답기까지 하다.

이제 조리하지 않은 재료들을 살핀다. 채소용 플라스틱 통에 샐러드에 필요한 채소들을 챙긴다. 케일, 치커리, 겨자, 양상추, 파프리카, 방울도마도, 콜라비 등이 막 밭에서 뛰쳐나온 듯 생기가 넘친다. 모듬전으로 거듭날 데친 오징어, 양파, 부추, 고추, 깻잎들은 서로 손을 비비대고 있다. 된장국에 넣을 두부, 감자, 호박, 양파는 깍둑썰기로 청양 고추는 송송 썬다. 소금 간이 밴 갈치도 반찬통 안으로 들어간다. 대충 이 정도면 괜찮겠지 싶다. 아니 대충이 아니라 이보다 더 완벽한 밥상은 없을 터다.

냉장고 문이 열리고 금세 반찬통들이 제자리를 척척 찾아간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날리며 식탁 쪽을 바라본다. 아들 며느리 손자에, 모처럼 음식 호강을 하게 될 남편까지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울 식탁. 벌써부터 배가 불러오는데, 문득 가슴 밑바닥에서 뭔지 모를 다정다감한 느낌이 솟구친다. 눈에 익숙한 또 하나의 풍경…. 아, 도시락이다. 가지런히 정리된 반찬통에서 나는 뜻밖에 추억 속의 도시락과 해후한다. 가슴이 점점 더 뜨거워진다. 나는 아스라이 먼 시간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린다.

아침마다 식탁 한 쪽은 도시락으로 난리 북새통이었다. 우리 세대는 다 그랬다. 책가방과 함께 도시락 가방을 챙겨 들어야만 등교 준비 완료였다. 6녀 1남인 우리 형제는 모두가 다 두 살 터울이라 도시락만 늘어놓아도 한 상이었다. 어느 부모인들 자식 사랑이 뒷전일까만, 우리 부모님의 자식 사랑은 도시락만으로도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우리 형제들은 언제나 도시락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메뉴도 메뉴지만, 일단 반찬 가짓수가 대여섯 가지나 되었다. 기본인 김치와 김을 제하고도 네 종류의 반찬이 반찬통을 수놓았다. 포장된 김이 없던 때였으나 아버지표 구운 김이 있었다. 주방 한 쪽에는 늘 참기름 종지, 소금 병, 김솔, 가위가 한 세트로 갖춰진 쟁반이 놓여있었다. 아버지는 손수 참기름을 바르고 소금을 뿌려 석쇠에 구운 김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6등분 했다.

어머니는 워낙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에는 동네를 찾아다니는 요리 강습이 유행했는데, 주로 우리 집이 요리강습소가 되곤 했다. 그런 만큼 도시락이 더 빛났다. 장조림, 멸치볶음, 콩자반, 깻잎찜 등은 바탕이요, 시시때때로 신선한 얼굴이 등장했다. 감자 샐러드, 뼈째 갈아 빚은 동그랑땡, 갑오징어 구이, 오이 도라지 미나리강회, 쪽파말이, 연근조림, 토란졸임, 김속대기무침, 대갱이무침, 마른풀치볶음, 김부각, 들깨꽃부각 등등. 대학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교사 생활을 할 때도 도시락은 필수품이었다. 여자 동료들끼리 모여 점심을 먹을 때도 당연히 내 도시락이 인기였다. 어머니의 도시락은 색깔 맞춰 담은 반찬들로 맛을 보기도 전에 눈부터 홀렸다.

어머니는 도시락 애호가였다. 초등학교 내내 소풍이나 운동회 날만 되면 나는 어김없이 선생님께 도시락을 선물했다. 맛깔스럽고 예쁜 도시락. 어머니의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치나 나도 아들의 선생님 도시락을 챙겨본 적이 있다. 아들이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이었다. 기억나는 메뉴는 기껏해야 유부초밥과 김밥 반반씩, 아니면 감자 크로켓과 새우튀김 반반씩 정도였다. 참 무성의한 도시락이었다.

아들은 학교급식 세대라 도시락을 쌀 기회가 별로 없었다. 중학생이 되고서는 소풍 도시락마저 전문도시락이나 김밥 집에서 아들이 취향대로 골랐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로 아들이 김밥이나 파는 도시락을 좋아했는지 의구심이 인다.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도 항상 일러주곤 했다. 음식은 정성이라고, 정성이 밴 음식이 맛깔스럽고, 그 음식이 곧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의 비결이라고. 한때는 나도 꽤 음식에 열중해 조리대에 붙어 지냈다. 어머니의 음식을 흉내도 내고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검색하기도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내 사고의 틀이 흐트러졌다. 주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헛시간인 양 아까웠다. 자연히 음식에 소홀해지면서 정성은커녕 무엇 한 가지 제대로 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들까지 결혼시키고 나니 간단히 해결한다는 식으로 걸핏하면 외식을 선호했다. 뒤늦게 철든다는 말이 꼭 맞다. 요즘 내가 뒤늦게나마 철이 들었는가. 천만다행이다.

주방을 깨끗이 정리 정돈하고 앞치마를 벗는다. 마음이 가뿐하고 즐겁다. 어머니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해서 고단함을 잊은 평온한 얼굴로 그 대식구의 식사와 도시락까지 마련했을까. 새삼 부끄럽기만 하다. 나는 그동안 너무 게으르다 못해 편한 것만 추구했다. 작심 1일이 될지언정 단단히 각오를 다져본다. 주부 본연의 자세를 숙지하고서, 아니 아내와 어머니의 태도로써…

코로나19가 물러가면 온 식구가 소풍을 가야겠다. 싱그러운 풀밭에 돗자리를 깔고 내가 준비한 도시락을 펼치자. 손자가 방실거리며 깡충깡충 뛰겠지?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어머니를 불러내어 어머니의 솜씨를 되살려보고 싶다. 우리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가 어디일까요? 우리 집의 명소, 주방입니다! 아들의 경쾌한 목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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