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채운의 스카이가든 9] 파운드케이크

권채운 작가
  • 입력 2020.09.1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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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채운2001년 제4회 '창작과비평' 신인소설상 당선      소설집 [겨울 선인장] [바람이 분다]
권채운
2001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소설집 「겨울 선인장」 「바람이 분다」

하필이면 파운드케이크를 사올 게 뭐람. 뭘 이런 걸 다 사오느냐고 하며 어색하게 쇼핑백을 받아들었을 때 눈치를 챘다. 분명 파운드케이크일 것이라고.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손쉽고 모양 나는 선물이 파운드케이크라는 게 평소의 생각이었으니까. 매수인이 인테리어 업자와 같이 방문해도 되느냐는 문자를 했을 때 언제든지 전화하고 들르라고 흔쾌히 답은 했다. 그렇지만 지난 십년간 쓸고 닦아가며 애지중지했던 멀쩡한 아파트를 송두리째 갈아엎겠다는 소리에 마음이 허전해서 하루 종일 집안을 서성거리던 참이었다. 요즘 내 기분은 바닥으로 내려가서 도무지 꿈쩍을 않는다. 아파트를 팔고나서 한 달 사이에 값이 2억이나 치솟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가 매수한 허름한 아파트는 내가 매수한 그 가격 그대로였다.

매수자는 젊은 부부였다. 젊은 사람답게 두 팀을 시간차를 두고 불러 들였다. 먼저 온 인테리어 업자는 내 눈에도 차지 않았다. 나중에 온 업자의 설명이 더 그럴듯하게 들렸다. 반들거리는 온돌마루는 이제야 길들여져서 밝은 아몬드 색으로 빛나는데 다 뜯어내고 흰색 강마루로 간다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화이트 톤을 선호한다더니 도배며 문짝이며 마루며 싱크대까지 온통 흰색으로 바꿀 모양이다. 나는 그들의 어머니나 되는 것처럼 훈수를 두며 방으로 주방으로 욕실로 졸졸 쫓아다녔다.

너무 화이트로 가면 집이 붕 떠 보이는데…… 이 온돌마루가 강마루보다 훨씬 비싼 거예요. 사내아이가 있다면서요? 층간소음 때문에 바닥을 온통 두꺼운 매트로 뒤덮어야 할 텐데…… 레인지는 인덕션으로 해요. 가스레인지가 호흡기에 안 좋대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훈수를 두고 있는 내가 한심스러운 걸 알면서도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그들이 현관문을 나가고 나서야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무슨 괴이한 짓을 한 건가.

우리도 나이 들면 저러려나? 우리가 살 집인데 꼬치꼬치 웬 참견? 그러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매수자 내외가 주고받는 말소리가 덜 닫힌 현관문 틈을 타고 들려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잔금을 치른 것은 아니니 아직 내 집임에는 틀림이 없다. 누렇게 찌든 벽지야 새로 도배를 해야 하겠지만 이제 겨우 길이 나서 원목의 결이 드러나는 저 마루는 아깝기 짝이 없다. 이사 가면 다시는 볼 수도 없는 이 집에 왜 이렇게 미련을 두는 것일까.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으로 뛰어오른 요즘 시세로 아파트를 팔았어도 내가 이럴까.

헛헛할 때는 속을 채우는 게 최고다. 파운드케이크를 두 조각 잘라서 접시에 담았다. 어, 이게 아닌데? 예전에 먹었던 파운드케이크는 단단해서 자를 때부터 부스러기가 생겼다. 게다가 몸에 좋다는 온갖 재료가 혼합된 맛이라서 입에 맞지 않았다. 케이크를 자르는 순간 그 느낌부터 달랐다. 케이크는 부드럽게 잘렸고 부스러기도 떨어지지 않았다. 한입 입에 물자 혀에 착 감겼다. 파운드케이크 맞아? 포장 박스 겉면에 분명히 ‘클래식파운드’라고 적혀있었다.

파운드케이크는 즐기지 않아서 부러 사먹지 않았고 또 근래에는 누가 집에 사들고 온 적도 없었다. 먹어본 지 오래 되어서 그 맛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내 젊은 시절의 파운드케이크는 고품격 방문 선물이었다. 그렇지만 가족들이 아무도 파운드케이크를 좋아하지 않아서 누군가 사왔던 파운드케이크는 냉장고를 들락거리다가 음식물 쓰레기로 분류되곤 했다.

세월이 가면서 입맛도 바뀌지만 그 입맛에 따라 케이크의 맛도 바뀐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던 것일까. 급변하는 세상에 살면서 급류 가운데 뿌리박힌 바위처럼 요지부동의 자세로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그게 과연 옳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한 입 베어 문 케이크를 삼키지도 못한 채 요즘 들어 버릇이 된 자기반성을 하고 있었다.

자기반성이 젊을 때는 유익했겠지만 나이 들어서는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한다. 시류를 읽지 못해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거액으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책의 구렁에 빠졌을 때 남편이 이끌어간 곳이 정신건강의학병원이었다. 나는 드라마에서처럼 의사가 찬찬히 환자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에 대한 적절한 처방을 내려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젊은 의사는 대수롭잖다는 듯 몇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보름 치 약을 처방해 주고 그 약을 다 복용한 뒤에 다시 내원하라고 했다. 마음에 감기가 걸린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마음의 감기라, 그 마음의 감기가 창궐하는지 병원의 대기실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신경안정제에 의존하다가 종당에는 정신병원까지 가는 건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일단 잠을 자야 살겠다 싶어서 꼬박꼬박 약을 챙겨먹었다. 그 약 덕분인지 가슴이 벌렁거리는 게 좀 덜하고 잠도 서너 시간은 푹 잘 수 있었다.

한 달 넘어 계속되는 긴 장마까지 우울증에 덧칠을 한다. 뜸하던 빗소리가 다시 우렁차다. 집중호우로 급류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고, 산사태로 집을 잃은 사람도 있다. TV화면에는 처참하게 부서진 집들과 수마에 휩쓸린 농경지 사이에 황망하게 서 있는 사람 옆을 누런 흙탕물이 기세 좋게 흘러간다. 무서운 폭우다.

꿉꿉한 날에는 달달한 믹스커피가 제일이다. 따끈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니까 목에 걸린 듯 하던 파운드케이크가 부드럽게 넘어간다. 파운드케이크도 맛이 있구나. 내가 매수한 아파트도 인테리어를 해야 하는데 인테리어 업자를 대동하고 방문할 때 나도 파운드케이크를 사들고 갈까.

올 여름에는 유사 이래 최고의 폭염이 올 거라던 기상청의 일기예보는 긴 장마에 밀려 보기 좋게 나가 떨어졌다. 인공위성과 슈퍼컴퓨터까지 동원하는 일기예보도 와장창 틀리는 판에 일개 보통 사람이 시류를 읽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괜찮다. 다 괜찮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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