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 기자수첩] 서구열강들의 아시아 ‘식재료’ 침략사2…향신료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9.25 21:52
  • 수정 2020.09.25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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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는 유럽인들은 운이 좋았어요. 특히 포루투갈인들이 말이죠.
그리고 네덜란드와 영국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이유는 중국이 바다에서 해군을 철수했기 때문에 싸우지 않아도 됐다는 거예요.
때문에 그들은 인도양을 지나 믈라카, 중국남부, 일본, 한국에까지 닿을 수 있었어요.”
- 로버트 마르크스’ 휘티어대 교수

(대서양을 바라보고 있는 ‘발견의 기념탑.’ 촬영=윤재훈)
(대서양을 바라보고 있는 ‘발견의 기념탑.’ 촬영=윤재훈)

대서양 바닷가를 따라 하얀색 조형물 하나가 햇빛에 반짝인다. 어찌 보면 범선 같기도 한데, 바로 포루투갈 대항해시대를 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항해 왕자’ <엔리케 왕자>를 기념하기 위한 모뉴먼트(Monument)다. 그의 서거 500년 후인 1960년에 타구스 강변에 세웠으며 ‘발견의 기념탑’이라 부른다. 수많은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의 섬세함이 마치 살아있는 듯한 느낌이다.

조형물은 왕자가 탐험 당시 사용하였던 캐러벨(Caravel) 선의 모습을 본떠 높이 52m의 콘크리트 구조물로, 만들었으며 선수(船首)에는 엔리케 왕자가 서 있다. 그 뒤를 따라 동쪽 부분에는 아폰수 5세, 포루투칼 대항해 시대를 연 바스코 다가마와 발 다이어 항해가, 바스코 다가마를 이어 32세에 2차 인도 탐험대 선단 총사령관이 되어 13척의 함선을 이끌고 간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서있다. 그는1500년 3월 9일 인도를 향해가다 풍랑을 만나 표류했으며. 4월 22일 우연히 브라질에 도착한 탐험가이다. 그리고 최초의 세계 일주를 한 마젤란이 서있다.

양쪽으로 사람들이 서있는데, 대부분 탐험가와 항해사들이 많으며 그 외 왕실 구성원, 지도제작자, 선교사 등 33명이 모두 같은 방향을 하고 서있다.

(잔악한 침략자 바스코 다가마의 다리. 게티이미지 뱅크)
(잔악한 침략자 바스코 다가마의 다리. 게티이미지 뱅크)

엔리케 왕자는 1415년 8월 이슬람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지브롤터 해협 건너편에 있는 세우타(Seuta)를 공략하는 전쟁에 참여했다. 여기에는 큰형인 두아르테(죠앙1세의 장남)와 작은 형 페드로 왕자들과 함께였으며, 모로코의 항구 도시였던 세우타를 점령하여 포르투갈 해외진출의 거점이 마련하였다.지금은 스페인 땅인 북아프리카 끝 세우타의 점령을 계기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서안항로를 개척하게 된다. 이제 이슬람 상인들의 중개 없이 금과 향신료를 구입하기 위한 활로를 확보된 셈이며, 인도 항로의 개척에 대한 야망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바로 그 중심에 엔리케 왕자가 있던 것이다. 그 시대까지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해안의 최남단이, 카나리아 제도로부터 200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하는 <보하돌 곶>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보하돌 곶 저 너머는 이 세상의 끝이며, 그곳부터는 부글부글 끓는 바다가 펼쳐진다고 믿고 있었다. 당시의 유럽 항해자들 사이에서 이 미신에 대한 공포는 절대적인 것이었고, 보하돌 곶을 넘어 항해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누워있는 악랄한 침략자, ‘바스코 다가마’. 촬영=윤재훈)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누워있는 악랄한 침략자, ‘바스코 다가마’. 촬영=윤재훈)

길 건너편에는 대항해 시대 건축물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제레니무스 수도원’이 보인다. <바스타 다가마>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것이며, 전면에 그의 석관이 누워있다. 이 나라에서는 영웅이지만, 아라비아 해를 비롯한 인도에서는 후추를 약탈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악독한 침략자이다.

8차선 길을 건너가야 하는데 가운데는 기찻길이 복선으로 누워 있다. 거리에는 화가들과 악사들의 음악소리가 이따금 들렸다. 넓은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데 황제의 정원이라 부르며, 중앙에는 커다란 분수가 놓여있다. 왼편으로는 베라르도 미술관이 있으며 매우 세련되고 현대적이다.

인구 100만의 작은 나라는 바스코 다가마의 항해 이후 향신료 교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유럽의 해상 강국으로 발돋음하여 유럽의 관문이 되어 승승장구하며 번영을 누리는데, 그것은 특히나 동아시아에 대한 학살과 만행으로 얻은 것들이다.

1553년에는 마카오를 점령하여 400년 동안이나 식민지로 삼았다. 타일랜드 푸켓을 여행하다가 원색으로 깨끗하게 정리된 포루투갈 거리를 본 적이 있으며, 세계를 여행하다 보면 곳곳에 유럽의 신민지 흔적들이 산재해 있다.

“제 생각에는 유럽인들은 운이 좋았어요. 특히 포루투갈인들이 말이죠.
그리고 네덜란드와 영국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이유는 중국이 바다에서 해군을 철수했기 때문에 싸우지 않아도 됐다는 거예요.
때문에 그들은 인도양을 지나 믈라카, 중국남부, 일본, 한국에까지 닿을 수 있었어요.”
-‘로버트 마르크스’ 휘티어대 교수

포루투갈 최초의 중국 통상 사절단 대표 <토메 피레스> 가 중국에 당도했을 때, 마카오가 포루투갈 신민지로 조공관계라는 것을 안 중국황제는 격노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실 중국을 쉽게 정복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오판이었다. 당시 중국 선단은 유럽을 능가하는 최고의 수준이었으며, 그 중심에는 <정화의 선단>이 있었다.

(정화 대선단. KBS캡쳐)
(정화 대선단. KBS캡쳐)

1405년 명나라 3번째 황제 <영락>이 파견한 <정화 대선단>은 300여척 함선에 28,000여명을 태우고 정화 대원정>을 떠났다.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이렇게 큰 선단이 없었다. 수장인 <정화>는 길이 150m에 폭 60m의 배를 타고 움직였는데. 최대 8,000톤으로 추정된다.

비단으로 된 돚은 200명이 당겨야 움직일 정도였으며, 선원들이 하루 소비하는 쌀은 160가마 정도였다. 배 안에는 상아, 코뿔소의 뿔, 향신료, 비단, 도자기 등 진귀한 보물로 가득했으며, 28년 동안 7차례 항해에 나섰다

당시 유럽보다 훨씬 강력한 해양력을 가졌던 중국이 마음만 먹었다면 대항해 시대가 열리기 100전 전에 세계 최대 신민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정화의 7차 항해를 마지막으로 명나라는 해양진출을 중단하고, 아시아의 바다에서 물러났다. 그 후 해양력이 철저하게 무너졌는데, 가장 큰 이유는 비용 때문이었다.

(아시아의 바다를 누비던 정화 대선단. KBS캡쳐)
(아시아의 바다를 누비던 정화 대선단. KBS캡쳐)

그로부터 100년 뒤 인도를 찾아 나선 <바스코 다가마> 선단보다 100배 이상 큰 규모였다. <정화 대원정>의 목적은 대외적으로 국가의 위엄을 세계에 과시하는 동시에, 내부에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세계에 긍정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매우 강력하고 빠르며 인상적이었던, 중국의 해상 진출은
황실과 정부에서 너무 비용이 많이 든다고 판단했고,
육지를 떠나는 것이 중국의 전통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중단됐습니다.
중국은 낯선 국가들과의 해상 무역에 대한 야심이 전혀 없었죠.”
-‘프랑수아 지푸르’ 프랑스 국립응용과학원 교수

이렇게 서양이 아시아의 바다로 나와 대항해 시대를 열었을 그때, 전통적인 농업국가이며 육지에 기반을 둔 아시아에게 바다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육지에서는 아랍의 <오스만 제국>이, 인도에서는 <무굴제국>이,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각자의 세력을 견고히 하며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다를 바라보는 그 차이가 동, 서양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후추>의 욕망으로 시작된 <대항해 시대> 아시아의 바다는 번성했다. 포루투갈은 향신료 무역을 지배한 듯 보였지만, 1,500년대 포루투갈 후추 교역량은 전 세계 10%에 불과했다.

작은 해양국가인 포루투갈이 <바스타 다가마>라는 걸출한 침략자가 성 가브리엘호를 타고 1497년 함대를 이끌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여러 군도를 차례로 점령하기 시작한다.

(점령하는 곳마다 성을 쌓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KBS캡쳐)
(점령하는 곳마다 성을 쌓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KBS캡쳐)

그들은 아시아의 바다로 진출하면서 아라비아 해에 요새를 만들고 토착주민을 학살하고 <포루투갈 무역고리>를 만들었다.

유럽인들이 총을 쓰기 시작하면서, 인도양은 포루투갈이 패권을 잡게 된다. 후추를 찾아 인도로 떠나면서 해안가를 점령하고 <포루투갈의 고리>모양으로 견고한 성을 쌓아 나갔다.

(인도 고아 바닷가. 게티이미지 뱅크)
(인도 고아 바닷가. 게티이미지 뱅크)

1498년 5월 바스타 다가마는 꿈에 그리던 인도의 고아에 도착하게 된다. 유럽 최초로 인도를 발견한 것이다. 당시 후추무역을 독점하던 이슬람 상인들은 그들을 보고

“망할 놈들,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하고 망연자실 했다고 한다.

“유럽인들은 인도에 가서 말하기를 ‘우리가 좋은 물건을 가져왔으니 당신들도 우리가 가져온 것을 좋아하게 될 것이야’라고 말했다.
하지만 인도인들은 ‘아니, 당신들 물건은 형편없어, 당신들 물건 중 어떤 것도 필요 없어. 우리는 여기 인도에서 당신들보다 훨씬 더 잘 만들 수 있어.’
- 이언 모리스, 스탠퍼드대 교수

그 후 바스코 다가마는 여러 경로를 통해 캘리컷의 통치자 자모린을 만나기 원했고, 본국에서 가져온 진상품인 외투와 모자 6개, 설탕 등을 올리자 비웃음만 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인도나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었으며, 그들이 가져온 물건은 볼품없는 것들이었다. 이 두 대국들은 모든 것이 국내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해 그다지 탐나는 물건이 없었다. 그 당시 유럽과 동아시아의 생활수준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도 고아 바닷가. 게티이미지 뱅크)
(인도시장 풍경. 촬영=윤재훈)

그 당시 유럽이 동양보다 잘하는 것은 바로 총을 만드는 것이었다.
유럽은 아주 좋은 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총으로 사람들을 쏘기 시작했다.”
- 이언 모리스, 스탠퍼드대 교수

그도 그럴 것이 인도는 풍부한 면화 공급에 더해 기원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서 깊은 방직, 염색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인도는 세계 최고의 면직물을 생산하는 본고장이었다. 특히나 캘리컷은 영국과 유럽을 휩쓴 ‘캘리코 면직물’의 본고장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면직물 외에도 당시의 유럽은 선박과 화약무기 등을 제외하고는 중동이나 인도에 비해 기술력이 압도적이지 못했다. 그러니 포루투갈이 내놓은 물건을 본 자모린은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이미 지역 상권을 꽉 잡고 있던 아랍 상인들이 그들의 배가 보이면 고함을 치며 격렬하게 증오심을 보여 통상교역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바스코 다가마는 1차 항해에서 할 수 없이 소량의 상품만을 싣고 1499년 9월 리스본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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