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 기자수첩] 서구열강들의 아시아 ‘식재료 침략사3’…향신료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09.29 10:36
  • 수정 2020.09.29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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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왜 아시아에 가고 싶어 했을까요?
왜냐하며 그곳은 무든 부의 원천이 있었기 때문이죠,
유럽인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어요.”
                      - 로버트 마르크스’ 휘티어대 교수

(리스본에서 바라본 대서양. 촬영=윤재훈)
(리스본에서 바라본 대서양. 촬영=윤재훈)

유럽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연 나라. 유럽의 변방에 있던 나라가 향신료로 단숨에 ‘세계의 수도’, ‘세계의 관문’으로 되었다. 16세기 초 리스본는 무역선들로 넘쳐났고 항구에는 배를 만드는 조선소들로 활기가 넘쳤다. 사실 리스본은 영어식 표현이며 포루투갈인들은 <리스보아>라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포루투갈의 과거역사를 따라가 보면 중세시절(8세기 초~12세기 초)에는 스페인과 함께 아랍(무어인)의 식민지였다. 지금도 스페인에 가면 ‘레콩키스타(reconquista, 영토재정복) 축제’가 열리고 있는데, 아랍의 지배로부터 스페인의 영토 재정복을 기념하게 위한 축제이다.

당시 아랍은 문명의 황금기로써 수학, 천문학, 항해술 등에서 유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진적인 학문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랍의 지배하에 있던 포루투갈은 자연스럽게 선진 기술들을 습득할 수가 있었다. 그것이 대포와 총 같은 무기와 항해술에 바탕이 되었고 대항해 시대를 열어 되려 아랍상인들을 죽이고 아시아 수탈의 시대 문을 여는 원동력이 된다.

(하늘이 주신 선물, 후추. 게티이미지 뱅크)
(하늘이 주신 선물, 후추. 게티이미지 뱅크)

“후추, 자연이 내린 축복이지만 인도인에게는 영욕(榮辱)의 상징이며,
 포루투갈에게는 영광의 약탈물이다.”

그들은 인도의 ‘켈리켓(코지코드, Kozhikode)에서 대량의 후추를 빼앗아 갔으며, 그 지명을 따서 자신들의 배의 이름도 <캬라크선>이라고 명명하였다.

1차 항해를 마친 바스쿠 다가마는 개선장군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오는 길에 괴혈병 퍼져 그의 형과 많은 선원들을 잃고 30여명만 남아 배를 저을 선원마저 부족하게 된다. 할 수 없이 배 한 척을 침몰시키고 2척만 돌아왔지만, 그 안에 실린 얼마 되지 않은 향신료로도 출자자들은 60배가 넘는 배당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국왕 마누엘 1세로부터 ‘Don’ 칭호와 함께 거국적인 환영식 속에 영웅 대접을 받았으며, 인도양의 제독이라는 지위도 하사받았다.

“그들이 왜 아시아에 가고 싶어 했을까요?
왜냐하며 그곳은 무든 부의 원천이 있었기 때문이죠,
유럽인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어요.”
                        - 로버트 마르크스’ 휘티어대 교수

포루투갈의 2차 항해는 1500년 귀족 출신인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이 이끈다. 32세의 젊은 그는 13척의 함선을 이끌고 1500년 3월 9일 기세 좋게 희망봉을 향해 떠났지만 폭풍 속을 표류하다 대서양을 넘어 브라질까지 밀려가버린다. 4월 22일 지금의 바이아 주의 ‘포르투 세구루 해안’에 도착해 그곳의 언덕을 ‘몽치 파스코알(부화절의 언덕)’이라 명명하고, 포루투갈 문양이 그려진 나무 십자가를 해변에 세우고 ‘일랴 지 베라 크루스(진정한 십자가의 섬)’이라 명명한다. 포루투갈 영토임을 선언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간다. 그나마 남의 나라 땅에 흘러들어와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 힘을 얻었으면 백 번 감사를 표하고 떠나야 인지상정일 것 같은데, 정복자들은 정말 사이코 같다. 그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브라질에 도달했으며, 1500년 이전에 독일의 항해사 마르팀 베아임도 탐험했다.

왜 남아메리카 대부분의 나라에서 자국어가 아닌 스페인어 통용되고, 브라질에서만 포루투갈 언어가 공용이 될까 궁금했는데, 그것이 바로 침략자들에 의한 식민지의 뼈아픈 역사가 숨겨져 있었다. 일제 침략을 당하여 36년간 나라 없는 백성으로 개, 돼지 취급을 받던 우리들의 아픔도, 고스란히 뼈 속으로 전해져 온다.

(아프리카의 남쪽 끝 희망봉을 돌면 인도가 멀지 않다. 게티이미지 뱅크)
(아프리카의 남쪽 끝 희망봉을 돌면 인도가 멀지 않다. 게티이미지 뱅크)

그 후 다른 탐험가들이 브라질에 도착하여 카브랄이 실수한 것을 알고 ‘테하 지 베라 크루스(진정한 십자가의 땅)’라고 다시 고쳐진다.

카브랄은 5월 2일 다시 동쪽을 향해 출발했으며, 희망봉을 돌다가 5월 29일 배 4척이 침몰하게 된다.

"유럽인들은 이제 총이 교역을 효율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버는데. 그 방식은 꽤 오랫동안 지속된다."
                                                        - ‘이언 모리스’ 스탠버드대 교수

(인도 고아 해변. 게티이미지 뱅크)
(인도 고아 해변. 게티이미지 뱅크)

그리고 9월 13일 캘리컷에 도착해 통치자 자모린으로부터 교역소를 짓도록 허락을 받지만, 아랍상인들과의 갈등으로 공격당하여 53명이 살해당하는 ‘교역소 습격사건’이 일어난다. 그러자 이슬람 선박 10척을 나포해 승무원들을 모두 처형해 버린다.

사건의 발단은 인도 상권을 주도하던 아랍상인들이 포루투갈 함대를 견제하며 향신료 거래를 방해하게 된다. 이에 제독 카브랄이 포루투갈에게 향신료 시장 우선권을 요구한다. 뒤에 온 상인들이 기존상인들을 뒤로하고 자신들에게 특혜를 요구한 것이다.

그 요구가 무시당하자 카브랄은 아랍상선을 약탈하며 보복전을 펼치고, 여기에 아랍상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교역소를 습격한 것이다.

그런데 카브랄은 폭동의 배후에 캘리컷 측이 있다고 판단하고 하루 종일 대포를 쏘아 항구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다. 이에 두 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적대관계가 되었고. 이 폭동사건이 바스쿠 다가마의 4차 항해에 피바람을 예고한다.

이제 카브랄의 악명은 아라비아 해에 메아리치며 코친(코치)으로 가서 극진한 대접을 받고, 향신료, 비단, 고급 목재뿐만 아니라, 많은 보물들을 6척에 배에 나눠 실고 1501년 1월 16일 포루투갈로 출항했다. 그러다 가는 길에 2척의 배가 침몰하고 4척은 6월 23일 타구스 강을 통해 영광스럽게 귀환한다.

(바스코 다가마의 다리 아래 범선은 평화롭다. 게티이미지 뱅크)
(바스코 다가마의 다리 아래 범선은 평화롭다. 게티이미지 뱅크)

마침내 1502년 포루투갈의 4차 원정은 다시 악명 높은 바스쿠 다가마가 출항하여, 인도양을 온통 피바다로 만들어버린다. 정부에서도 아예 외교적으로 할 수 없으며 무력으로 휩쓸어 버리라고 20척의 함대를 꾸려 보낸다.

그러나 무역이란 양국이 서로 이익이 되어야 할 수 있는 것인데, 포루투갈에서는 도무지 인도인의 기호에 맞는 자원이나 상품이 없었다. 그들은 향신료에만 탐을 낼 뿐이지 중국의 비단이나 도자기와 차, 일본의 은 같은 매력적인 상품들이 없었다. 거기다 품질도 좋지 않은 물건들을 장거리 운반하고 있으니 가격도 맞을 리가 없었다. 때문에 설령 교역허가를 준다고 해도 그 물건들을 팔아서는 이익을 내기가 어려웠다.

그러기에 3차 항해까지 들인 공력과 사망한 사람들, 편성되었던 선박의 절반 이상이 침몰되었어도, 그동안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평화로운 고아 해변에 난데없는 대포사격이 시작된다. 게티이미지 뱅크)
(평화로운 고아 해변에 난데없는 대포사격이 시작된다. 게티이미지 뱅크)

그런데 그들에게는 성능 좋은 배와 대포가 있었다.

“거기에 기독교인들이 보기에 인도인은 동등한 파트너가 아니라
지옥으로 떨어질 불신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을 죽여도 도덕적으로 전혀 거리낌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불신자들에게 살해당한 기독교인 53명의
교역소 습격사건의 복수가 우선이었다.”

그래서 인도 도착 후 이슬람 군과 일부러 싸움을 걸어 죽이고, 무역이 아닌 약탈과 해적사업을 시작한다. 주요 항로는 지키고 있다가 상선이 나타나면 ‘카르타스(Cartaz)’라는 듣도 보도 못한 통행증을 팔아먹으며 해적질을 했다.

또한 오노르 항구를 초토화 시키고, 이교도의 팔다리를 잘라 돛대에 매달고 사격연습을 하는 가학적인 행동들을 하며, 아라비아 해를 공포에 떨게 한다.

틈만 나면 포로들을 배의 돛대나 기둥에 매달아 죽이더니, 그것도 모자라 바스쿠 다가마는 당대인들도 치를 떨 정도의 끔직한 <미리호 학살사건>을 일으킨다. 그 배는 메카를 왕복하는 순례선이었는데, 아랍세계에서 손을 꼽을 정도의 부유한 승객들이 가득 탄 배였다.

바스쿠 다가마는 배를 나포하고 승객들이 몸값협상을 제시했지만 모른 척 했다. 그것은 배 여러 척에 향신료를 가득 채워주겠다던가, 또는 자모린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해주겠다는 등의 매력적인 조건이었다

(서구 침략자들의 야욕에 의해 인도인을 불구덩이로 몰아넣은 향신료. 게티이미지 뱅크)
(서구 침략자들의 야욕에 의해 인도인을 불구덩이로 몰아넣은 향신료. 게티이미지 뱅크)

그러나 그는 불신자들을 때려죽일 생각만으로 갖가지 모든 조건을 무시하고, 배의 화물을 모든 턴 후 불을 질러 버린다.

함대에 동행했던 서기 Thome Lopes의 기록에 따르면 바스쿠 다가마는 승객들이 허둥지둥 배 안에서 타죽은 모습을 멀리서 느긋하게 감상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악마의 환영인 듯 사악하고 짐승 같은 인간이었다.

“그렇지만 포루투갈에서는 위대한 영웅이 되어 신앙인들의 산실인

제로니무스 수도원 정면에 편안하게 누워,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다.

이것이 세계가 기록하는 승자들의 역사다.”

 

“잔악무도한 침략자는 말년에도 백작으로 승진하여 영지를 하사받고,

편안한 여생을 누린다."

승객들은 날뛰며 가까스로 화마를 진압했는데, 이 모습이 매스꺼웠던지 바스쿠 다가마는 다시 배를 나포한다. 승객들과 여인들이 아이를 내밀고 품에 있던 보석들까지 내밀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바스쿠 다가마는 이번에는 해병대를 승선시켜 다시 불을 질러 버린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배가 반쯤 탈 때까지 해병대들을 퇴선 시키지 않고 포위망을 유지하게 한다. 죽기 살기로 선원들에게 맨손이나 도끼로 덤벼든 승객들은 더욱 끔찍하게 살해했다. 바다로 뛰어든 사람들에게는 롱보트에 선원들을 태워 허우적거리는 그들을 창으로 찔러 죽이게 했다. 가히 레떼의 강을 건너는 지옥의 불구덩이를 보는 듯하다.

살아남은 것은 오직 세례를 받을 수 있는 유아, 즉 부모와 떨어뜨려 기독교 버전으로 세계관을 바꿀 수 있는 갓난 아이들 뿐이었다. 사망자는 300여명 이었으며 이게 다 1500년에 일어난던 교역소 습격 사건에 대한의 복수라는 것이다.

(포루투갈의 전투선에 비해 인도와 아랍인의 상선은 옆에 대포가 없었다. KBS 캡쳐)
(포루투갈의 전투선에 비해 인도와 아랍인의 상선은 옆에 대포가 없었다. KBS 캡쳐)

<피터 반 데르 멀위> 영국 해양박물관 큐레이터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갤리선(전투선)에는 앞부분에만 포를 설치할 수 있었다.
양옆은 병사들이 노를 저어야 해서 대포를 무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랍(동양)의 해군이 쏠 수 있는 것은 화살뿐이었던 반면에,
포루투갈의 캬라크선은 양 옆에 큰 포를 장착한 무장 상선들이었다.

배의 양면을 대포로 무장한 캬라크선은 전투선과 상선의 장점을 결합한 범선이었다. 그 당시 유럽의 배는 지중해에서 해전이 잦아 대포로 무장했지만, 아시아는 상선들이었다. 모든 것이 동양에 뒤졌지만 무기만은 월등히 앞섰고 그것이 운명을 갈랐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바스쿠 다가마는 캘리컷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어선들을 습격하며 어민들을 인질로 잡았다. 그리고 통치자 자모린에게 교역소 습격사건에 대한 사과와 보상, 이슬람상인들의 추방을 요구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으라고 생떼를 쓰는 격이었다.

그러나 캘리컷은 이미 2차 항해를 왔던 포루투갈 함대의 포격으로 이미 항구는 초토화가 되었고, 수백 명의 사람이 죽었으며 재물도 약탈당한 뒤였다.

1500년 2차 항해 때는 이슬람 상선 10척에 방화를 자행하며 총과 대포로 무장하여 캘리컷을 불바다로 만들더니, 1502년에는 바쿠코 다가마가 다시 29척의 이슬람 상선을 파괴하고 800여 명의 상인들을 학살한 것이다. 그 후 함선마다 포로들을 돛대에 수십 명씩 매달아 죽이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무차별 포격하여 캘리컷 항구를 다시 쑥대밭으로 만든다.

여기에 더욱 기고만장해진 바스쿠 다가마는 경악할 만한 패륜행위를 저지르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카레라이스 사건’이다. 유럽인 탐험가들이 저지른 패악과 살육 중에서도 잔혹하기로 손꼽히는 행위이다.

그는 포로들의 팔과 다리, 귀와 코를 잘라낸다. 이것은 교역소에서 죽은 53명의 포루투갈 인에 대한 복수와, 기독교인을 죽인 불신자들에 대한 응징이었는데, 이것을 편지와 함께 자모린에게 보낸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종교인가.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종교 아닌가?”
                                - 이케다 다이사쿠

(유럽인 탐험가들 사이에서도 잔혹하기로 악명 높은 바스코 다가마의 ‘카레라이스 사건’. 뉴시스 제공)
(유럽인 탐험가들 사이에서도 잔혹하기로 악명 높은 바스쿠 다가마의 ‘카레라이스 사건’. 뉴시스 제공)

“이걸로 카레라이스나 해먹어라.”

인육으로 카레를 해먹으라는 경악스러운 짓을 해대며 바스쿠 다가마는 이틀 동안 항구에 400발의 포격을 더 퍼부으며, 시가지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인도의 말라바르 해역 전역은 공포의 도가니로 인근 항구의 모든 상선들은 숨기에 바빴고, 모든 무역행위가 일시에 멈췄다. 겁을 잔뜩 먹은 코친이나 칸나노르, 콜람, 코둔갈루 등의 인도 세력들은 포루투갈의 보호 아래로 들어가기를 희망했고, 교역조건을 재협상하거나 배에 향신료를 가득 채워주는 식으로 굴복했다.

자모린도 평화조약을 미끼로 바스쿠 다가마를 유인하여 매복 공격을 하여 항구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지만 실패하고 만다. 바스쿠 다가마는 사로잡은 브라만 3명을 또 돛대에 높이 매달았고, 자모린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는 서신과 시체를 뗏목에 실어 보낸다. 가히 악마의 현신 같다.

“바스코 다가마, 유럽인으로 아시아를 공격한
최초의 신민지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로 불린다.”

카리브해와 신대륙에 피바람을 몰고온 침략자, 콜롬버스와 서로 버금가는 인물이다.

(대항해 시대, 아시아 침략의 문을 연 범선. KBS 캡쳐)
(대항해 시대, 아시아 침략의 문을 연 범선. KBS 캡쳐)

원한이 뼈에 사무친 자모린도 끝내 굴복하지 않고 휘하 제독과 아랍 용병들과 함께, 끌어 모을 수 있는 배는 다 끌어 모아 아랍 대형선 20여척, 삼부크 수십 척, 소형 갤리선 수백 척으로 함대를 급조해 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캘리컷 해전에서 포루투갈 카라크선 16척에 대패를 당하고 만다. 그만큼 서유럽의 화포로 무장된 선박과 인도의 상선과는 어마어마 격차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스쿠 다가마는 끝내 캘리컷과 자모린을 불평등조약으로 굴복시키는 데는 실패한다.

결국 그는 칸나노르와 코치에 거점을 마련하고 어마어마한 향신료를 약탈해서 1503년 7월 리스본으로 돌아간다. 그 함대 안에는 후추 1,700톤, 계피와 말린 정향, 메이스, 육두구 400톤 등의 엄청난 분량의 향신료를 약탈해 갔고 그는 떼돈을 벌었다.

결국 바스쿠 다가마나 포루투칼 탐험가, 선원이나 선교사 등은 현지의 풍습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며, 오로지 미개한 불신자 취급만 했다. 인도인이나 아랍인의 입장에서는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해적이자 약탈자였으며 사악한 살인마였다.

“기독교인을 빙자해 패악을 저지르는, 적그리스도에 가까운 인성을 가진 인간들이었다.”

사실 바스쿠 다가마뿐만 아니라 휘하 함대원 및 포루투갈인 탐험가들도 대부분이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 지옥에 떨어질 이교도 불신자들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된다는 심리들이 공유된 것 같다

원한이 극에 달한 자모린은 영혼까지 다바쳐 다시 인도와 아랍, 오스만의 연합 함대 200여척을 간신히 마련한다. 그러나 그것마다 신무기로 무장된 포루투갈에게 1506년 칸나노르 해전과 1507년의 공성전에서 대파를 당한다. 이것이 그에게는 다시 일어서기 힘든 결정적인 패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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