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 라이프⑲] 목요일의 외출

김경 기자
  • 입력 2020.10.05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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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
[다시 그 자리](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이모작뉴스 김경 기자] ‘에세이 21’에서 원고 청탁서가 왔다. ‘추억의 사진 한 장’ 난에 게재한다며 사진과 그 사진에 대한 추억담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잠시 잠깐 시간을 되돌려보다가 일단 컴퓨터를 켜고 사진첩에 들어가 본다. 의외로 이런저런 사진들이 많이 내장되어 있다. 한동안 사진마다 깃든 추억을 복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가. 한순간, 나는 별빛처럼 빛나는 섬광과 마주하며 한 장의 사진에 시선을 붙박인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날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가슴이 설렌다. 뚜벅뚜벅 걸어온, 그날 그 시간이 없었다면 과연 오늘의 내가 존재할까. 스스로를 찾아보겠다고, 그 방편으로 선택한 소설공부 시간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사진이다.

2002년의 어느 봄날, 홍매화가 한껏 맵시를 자랑하는 송파문화원 앞뜰이다. 사오십 대 제자들이 모처럼 두 분 선생과 함께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잡았다. 유재용 선생은 예의 그 인자한 미소로 양팔을 다정스레 제자들에게 내주고, 명천 이문구 선생은 홀쭉한 모습에 형형한 눈빛으로 뒷짐을 지고 있다.

당시에 유재용 선생은 송파문화원 원장직을 맡고, 명천 선생은 위암 수술과 항암 치료로 체중은 많이 감소했으나 예후가 좋던 회복기였다. 그즈음 사진 속의 제자 중 서너 명은 신진 소설가로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2000년 봄, 내가 첫 테이프를 끊으면서 유애숙, 박현경, 권채운 등이 뒤를 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아스라한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등단작이 대표작인 문인들이 수두룩혀. 들까불지 말고 이제부터가 시작이여.

명천 선생의 축하 일침이 아니더라도 등단 전보다 더 더욱 배움이 절실하던 때였다. 그날은 어느새 18년이란 세월의 뒤안길에 머물렀다.

올해도 어김없이 송파문화원 앞뜰에는 꽃이 피었는데, 사진 속 선생들은 찾아뵐 길이 없다. 명천 선생은 2003년, 유재용 선생은 2009년에 그만 훌훌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명천 선생 타계 후, 유재용 선생마저 대장암에 발목이 잡혔다. 오늘따라 만해 한용운의 시정에 절로 고개가 수그러든다.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왜 염려하지 못했던가. 그리움만 한 가득 가슴에 고인다.

월화수목금토일, 일주일은 온전히 목요일을 위해 존재하던 나날이었다. 목요일은 두 분 선생과의 만남으로 충일했다. 목요일의 외출은 내가 나를 찾아가는, 일상의 작은 반란이었다. 뒤늦게 싱클레어의 아프락삭스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던가. 아니면 ‘노라’가 되어 내 안의 견고한 벽을 뚫고자 했던가. 4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20대의 열정이 샘솟았다.

1996년의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이었다. 나는 집에서 가까운 백화점 문화센터에 개설된 ‘소설의 창작과 이해’라는 강좌의 문을 두드렸다. 뜻밖에도 유재용 선생이 맡은 강좌였다. 일찍이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관계>에 열중했던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은 온화하고 포근한 첫인상처럼 성정 또한 훈훈했다. 우리 제자들이 명천 선생을 시아버지, 유재용 선생을 친정아버지라고 명명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수업은 한 수강생의 작품을 나머지 수강생들이 차례차례 합평한 뒤에 선생이 총평으로 마무리를 하는 방식이었다. 총평은 늘 질책보다는 칭찬을 앞세우고, 질책도 제자들이 상처를 받을까 봐 직설법을 피해 에둘러 완곡하게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그 언중에는 날카롭고 예리한 화살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선생의 강의를 들은 지 2개월쯤 지났을까. 선생이 송파문화원에 문학반을 열어 명천 선생을 초빙했다며 우리를 송파문화원으로 이끌었다. 나는 그렇게 목요일 오전에는 유재용 선생을, 오후에는 명천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는 행운을 업게 되었다.

임꺽정, 명천 선생의 첫인상은 영락없이 그랬다. 시커먼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매, 귀밑까지 내려온 곱슬머리와 장대한 체격. 나는 처음부터 잔뜩 주눅이 들었다. 선생의 역작 <관촌수필>은 물론, ‘한국 문단에서 가장 이채로운 스타일리스트’라고 한 김동리 선생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대학 시절에는 선생의 소설 <다갈라 불망비>에 심취했는데, 책 표지 안쪽 선생의 모습은 완전한 자유인의 표상이었다. ‘연묘가 살아 있는 동안만 나는 열심히 살겠음. 이 종이의 여백엔 다른 또 하나의 피안을 그릴 것.’ <다갈라 불망비>의 한 구절을 마음 깊이 읽었다.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것도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나는 이 대목에서 숨이 멎었다. 나름대로 고통의 미학에 대해 깨우쳐가는 과정이었다.

글 솜씨만큼 말의 달인이기도 한 선생은 애당초 유연함과는 담을 쌓았는지도 몰랐다. 정곡을 찌르는 직사포에 툭하면 욕설까지 날아드는 통에 항상 좌불안석이었다. 그래도 무슨 배짱인지 나는 몇 달 뒤에 괴발개발 쓴, 소설인지 뭔지도 모를 작품을 디밀었다. 선생은 그 글을 두고 예상치 못한 후한 점수를 매겼다.

애가 몇 살이에유?
올봄에 중학생이 됐어요.
다 컸네. 이제 애는 혼자서도 지 앞가림 잘 할 테니 손 떼고 소설 써유.

수업을 마치고 회식하러 가는 길에서 선생의 격려를 받았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선생의 한마디가 내 삶의 신세계를 밝혀준 등불이었다.

문화원 강의가 끝난 오후 다섯 시쯤이면 주로 만둣국이나 삼겹살집의 회식 자리에서 못다 한 시간을 이어갔다. 유재용 선생도 빠짐없이 동석했는데, 조용히 미소만 짓는 선생에 반해 명천 선생은 거침없이 좌중을 휘어잡았다.

술 한 잔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글을, 가슴속에 켜켜이 쌓인 것들을 깡그리 끌어올리려면 취해봐야 하는 거여. 자, 한 잔 받어봐유.

멍하니 받은 술잔만 만지작거리는 내 꼬락서니가 얼마나 밉상이었을까. 게다가 나는 센스도 감감해 빈 잔을 냉큼냉큼 채우지도 못했다.

참말로 한심혀. 마실 줄 모르면 채울 줄은 알아야지. 글을 제대로 쓸라나, 에구 복장 터져! 그 답답한 심중을 헤아리지 못한 내 우둔함에 선생은 ‘고집이 세다’라는 말로 넘어가 주었다.

등단한 다음 해라고 기억한다. 두 분 선생을 모시고 어떤 문학 행사장에 가는 중이었다. 유재용 선생이 명천 선생에게 말을 건넸다.

후배가 주간인 그 잡지에 김경 씨 작품 하나 실어달라고 해봐요. 첫 제자인데…….
예? 내 제자 아녀유. 유 선생 제자한테 왜 내가 신경을 써유?
무슨 말씀을, 내 제자라니요?
유 선생 제자 맞아유. 난 저런 제자 둔 적 없슈.

그 장면만 떠올리면 지금도 한없이 행복하다. 제자를 밀어내는 그 은근함이 오히려 제자 굳히기인 것은 아니었을까. 문득 명천 선생이 스승을 뛰어넘는 제자가 진짜 제자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렇다. 나는 알고 있다. 내게 있어 진짜 제자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또한 최고의 기쁨이요, 행복이라는 것을. 솔직히 나처럼 큰 스승을 두 분이나 모신, 선택 받은 사람이 어디 또 있겠는가. 가짜 제자가 된 것만으로도 대만족이다. 뭣이라고? 가짜 제자면 다 된 거여? 초심을 잃지 말고 열심히 해요. 불현듯 다독임과 꾸지람의 두 목소리가 귓전에서 뒤섞인다.

정신이 번쩍 든다. 안일함에 젖어있는 내 꼬락서니가 그만 들통 났다. 이제부터라도 감히 선생들의 문학 세계를 흉내 내 볼까나. 진짜 제자가 되기 위한 가없는 희망으로 정진, 또 정진이다. 그 다짐이 곧 내 문학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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