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 라이프⑳] 소나기를 그리며

김경 기자
  • 입력 2020.10.14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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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
[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주룩주룩, 선 굵은 장대비가 힘겨루기라도 하듯 퍼부어댄다. 한 50여일의 지루한 장마 끝에 지칠 줄 모르고 쏟아진다. 심상치가 않다. 이쯤 되면 거의 물 폭탄 수준이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면서 안절부절못한다. 티브이를 켜니 화면에서도 빗줄기가 거침이 없다. 아예 우산을 접고 비옷으로 무장한 기자는 시간당 100㎜이상의 폭우라고 한다.

여름은 장마의 계절이다. 장마가 오면 꿉꿉하고 누겁기는 해도 반갑고 든든한 마음이 앞선다. 자연의 순환 기능으로써, 메마른 땅을 촉촉이 적시며 타들어가는 자연을 치유하고 회복시켜준다. 장마는 한마디로 고갈된 에너지를 충족시켜주는 귀중한 생명수다.

올해 장마는 숫제 그 기대감을 완전히 저버렸다. 적기를 벗어나 유례없는 최장 기간을 기록하다 못해 엄청난 폭우로 재난을 초래하고 있다. 코로나19 시대에 엎친 데 덮친 격이다. 하기야 이번 장마도 코로나19처럼 다 우리 인간이 저지른 불행이다. 인간이 부른 재난이다. 지구 온난화가 주범이다. 지구 온난화가 일으킨 기후 온난화가 원인이다. 적도에서 올라온 북대서양고기압이 시베리아에서 내려온 한랭전선을 밀어내지 못했다. 계속 대치하는 한랭전선 때문에 폭우가 쏟아진 것이다.

티브이 화면은 점점 더 강도 높은 재난의 현장을 속속들이 내보인다. 돌발적인 산사태에 속절없이 집이 파손되고 도로가 끊어진다. 제방이 무너지는 여파로 삽시간에 마을이 침수되고 만다. 물이 불보다 더 무섭다는 옛말을 실감한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감싸며 베란다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여전히 빗줄기는 거세게 유리문을 때린다. 더욱 가중된 불안감으로 다시 티브이 화면에 집중하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육중한 몸집의 소들이 화면을 꽉 채우고 나선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다. 털은 온통 비에 젖은 채 크고 까만 눈동자가 갈팡질팡 흔들린다. 생존 본능이 스스로를 지붕 위에까지 끌어올렸으리라. 울부짖는 소들의 절규가 귓속을 메운다. 문득 아득한 시절의 한때가 기억의 장을 헤집고 나온다.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인가 불분명한 여름날이다. 아침부터 내내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는데, 어스름이 깃들자 기어이 하늘길이 뚫렸다. 저녁밥을 먹고 사방이 어둠의 장막에 둘러싸였는데 비는 더 억세게 퍼부었다. 그날따라 아버지의 퇴근이 늦었다. 우리 형제들은 조바심을 내며 숨죽여 어머니를 둘러싸고 앉았다. 어린 마음에도 뭔가 이상 기류가 느껴졌다. 밤은 깊어가고 우렁찬 빗소리가 밤을 장악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가 송수화기 밖으로 새어나왔다. 어머니와 큰언니, 작은언니가 부산스레 움직였다. 나도 덩달아 발을 동동거리며 손을 놀렸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두세 벌씩 옷을 껴입혔다. 어느덧 방 한가운데는 제각각의 책가방과 큼직한 여행가방이 모아졌다. 깜깜한 비 난리 통에 어디론가 떠날 채비라니, 가슴이 콩닥콩닥 괜히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마침내 아버지가 허겁지겁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일단 조금만 더 상황을 지켜보고 지대가 높은 대승사로 피난을 가자고 했다. 대승사는 우리 가족이 다니는 절이다. 우리 집에서 골목을 나와 한길을 건너면 바로 시청인데, 시청을 지나서 좀 더 올라가면 대승사가 나온다. 아버지는 굳은 표정으로 잠은 금물이라고 엄포를 놓으면서도 계속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우리를 다독였다. 그러면서 틈틈이 전화 통화를 하곤 했다. 몇 시쯤이었을까. 빗줄기가 숙지근해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대로 이불 위에 쓰러져 잠에 떨어졌다.

사진=뉴시스 제공
사진=뉴시스 제공

다음날 아침, 온 동네가 시끌벅적거렸다. 우리 형제들은 앞다투어 내달려 골목을 벗어났다. 밤새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아스팔트길인 한길은 온데간데없고, 웬 시냇물인지 강물인지 모를 물살에 붙은 속력이라니. 우리는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한길 건너편에도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혼탁한 수면 위로 온갖 쓰레기들이 출렁거렸다. 나뭇가지, 신문지, 양은냄비, 옷가지, 신발, 판자, 지푸라기……. 쓰레기 창고가 무너진 듯했다. 그리고 새끼돼지 한 마리. 새까만 새끼돼지는 온몸으로 허우적거리다가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꿀꿀 꿀꿀, 새끼돼지의 울음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새끼돼지가 떠나간 뒤에는 또 어떤 것들이 물살에 첨벙거렸을까. 그날 아침의 내 기억은 새끼돼지에서 멈춰버렸다. 나중에 언니들은 둥둥 떠밀려가는 닭과 오리도 보았다고 했다. 나는 한동안 새끼돼지의 환영에 시달렸다. 죽었을까? 살아났을까? 누군가가 새끼돼지를 구했을까?

티브이 화면은 아직도 재난 지대를 찾느라 정신없이 카메라를 쫒아간다. 내 어린 시절의 물난리는 요즘에 비하면 정말 작은 사건에 불과할 수도 있다. 아무렴, 60년대 초반인 그때에는 기후 온난화라는 말도 없었다. 당연히 물난리도 생소해 그 물난리로 내 고향 순천이 유명세를 탔다.

이제 장마는 결코 예의 그 장마가 아니다. 장마는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는 경고의 메시지다. 2015~2019년 최근 5년은 지구 역사상 가장 따뜻한 시기였다. 따라서 지구는 점점 더 잦은 이상기후를 일으키고 있다. 폭염, 폭설, 강풍, 가뭄 등등. 시베리아 동토가 38도 폭염으로 이글거리고, 이탈리아 알프스에는 분홍색 빙하가 나타난다. 북극곰은 어슬렁거리며 쓰레기통을 뒤지고, 호주의 곳곳에서는 밀림 산불이 일어난다. 모두가 다 상징적인 무서운 현상들이다. 기후 위기는 절대로 무심히 지나치고 방관할 먼 나라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렇듯 지금 당장 재난의 장마가 덮치지 않았는가.

여름다운 여름이 그립다. 메마른 땅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런 장마가 그립다. 예전에는 그랬다. 여름날, 숨이 턱턱 막히면 하늘을 우러러 한바탕 쏟아지는 소나기를 기다렸다. 한 줌 청량제 같은 소나기에 온몸을 맡기고 경쾌하게 달리고 싶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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