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의 지구를 걷다㉕] 아시아 오지 기행 6_몽족마을에서 만난 한글 옷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10.21 11:22
  • 수정 2020.10.2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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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오지 기행, 고산족 순례

몽족마을에서 만난 한글 옷

소나무에 올라가 손차양을 하고
하루에 몇 번,
먼 산모롱이를 돌아 나올 버스를 기다리거나,
장에 간 엄마를 기다렸다
먼 등성이 위로 먼지가 일면
동구 밖까지 뛰어 나갔지만
버스가 그냥 지나간 날이 더 많았다
- '설날이 다가오면', 윤재훈

 

(한글이 선명한 옷을 입은 몽족 청년. 촬영=윤재훈)
(한글이 선명한 옷을 입은 몽족 청년. 촬영=윤재훈)

몽족 청년이 낯익은 글씨에 옷을 입었다. 이상한 일이다, 이 오지 산중에서. 가까이 다가가보니 <부산 사상구청 공익 요원>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어떻게 저 옷이 이곳까지 왔을까.

하긴 동남아에는 수많은 한국의 헌옷들이 지원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나라는 이제 살만하니 현지인들이 아닌, 이 오지 민족들에게 보내주는 모양이다. 갑자기 캄보디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프놈펜 시내 사거리에서 오토바이 사고가 났다. 청년이 머리에 피를 흘리고 쓰려져 있는데, 한참 후 경광등을 울리며 한글이 선명한 119 차량이 왔다. 대원들은 우리나라 화재현장에서도 볼 수 있는 119 글자가 선명한 화재 대비용 검정 오바를 입었다.

청년은 머리에 피를 심하게 흘리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구경만 할 뿐, 어느 누구 하나 선뜻 다가가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마치 내가 책임이라도 둘러쓰기 싫다는 듯이. 처음에는 생생하던 청년이 119에 실려 갈 때 쯤은 축 쳐져 있었다. 그의 생사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메콩강이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경계를 나누는 쩌우독 국경에서,망중한를 즐기는 여인
(메콩강이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경계를 나누는 쩌우독 국경에서, 망중한를 즐기는 여인. 촬영=윤재훈)

그리고 메콩강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향수에 젖다 그만 휴대폰을 도둑 맞았다. 아까부터 멀리 나무 아래에 청년이 하나 가지를 잡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산보 나온 청년이려니 하고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청춘 남녀가 내 앞을 지나가면서, 지퍼를 열고 무엇인가를 빼가는 그런 제스처를 하며 지나갔다. 나는 “저 애들이 왜 저러나” 하면서 무심코 아까 청년이 있던 쪽을 보니, 그는 막 커브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옆에 두었던 배낭을 보니 지퍼가 열려있고, 안에 있던 휴대폰이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아까 그 청춘 남녀의 제스츄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후 나는 폰도 없이 여행을 다니다 배낭여행자들의 천국이라는 치앙마이의 빠이에서, 허름한 노키아 중고폰을 하나 샀다. 오랜 시절 지녀왔던 지인들의 연락처는 다 잊어 버렸다. 깨끗하게 리셋이 되었다.

깔리양족의 미혼을표시하는 순백의 옷을 입고 솜씨자랑중인 소녀들
(깔리양족의 미혼을 표시하는 순백의 옷을 입고 솜씨 자랑 중인 소녀들. 촬영=윤재훈)

오지 산속 깔리양족들은 가난해서 인지 일 년 내내 별다른 행사가 없다. 그러나 크리스마스가 돌아오면 교회에서 그들만의 축제를 지낸다. 며칠 전부터 교회에서 점멸등을 켜지고 이브날은 모닥불을 피우며 노는데, 산 속의 날씨는 상당히 쌀쌀하다.

그런데 오바또(면사무소와 비슷)에서 일하며 잘 알고 지내던 깔리양족 쑤찬이 119 외투를 입고 나와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 오바또 마당에 있는 정자에는 배분되지 않고 낡아가는 한글이 선명한 옷들이 쌓여 있다.

(집집마다 마당에 틀을 내놓고 설빔을 만든다. 촬영=윤재훈)
(집집마다 마당에 틀을 내놓고 설빔을 만든다. 촬영=윤재훈)

여기저기 집 앞에는 아낙들이 틀을 내놓고 새해에 입을 가족들의 전통 설빔을 만드느라 바쁘다. 몽족들은 남녀 구분 없이 화려한 분홍빛 바탕에 은장식이 많이 달린 무거운 옷을 입고, 맵시를 자랑한다. 먼 옛날 우리의 어머니들도 저런 설빔을 만들었을까, 까마득하기만 하다.

아마도 60년대 말쯤에는 운 좋으면 두꺼운 양말 선물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겨울이면 마당에 눈이 소복히 쌓이고 늑대가 집 앞까지 내려오던 깊은 산 속에서 살다가, 도시로 이사를 왔다. 70년대에는 엄마랑 재래시장에 가서 운동화나 옷을 사주시던 기억이 난다. 기쁨에 들떠 그 설빔을 머리맡에 두고, 잠을 잤다. 혹시나 밤에 누가 가져가지 않을까, 그런 걱정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 기억들이 마치 어제 같은데, 이제 그때의 일가친척들은 대부분 이 지상에는 안 계신다. 부모님도 다시는 볼 수가 없다. 깊어가는 가을날 낙엽들은 떨어지는데, 마음 둘 때 없이 정처(定處)없다. 

(설날이 마냥 즐거운 29살의 '찡증리'. 촬영=윤재훈)
(설날이 마냥 즐거운 29살의 '찡증리'. 촬영=윤재훈)

나에게는 판사 외삼촌이 한 분 계셨다. 어쩌다 오시는 그 분은 우리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시절 보기 힘들었던 검정 코로나 세단을 타고 오셨는데, 8시에 하는 TV 주말 연속극에서나 볼 수 있었던 차였다. 커다란 서양식 저택에 살던 부잣집 주인공들은 우리가 보기도 힘들었던 향그런 바나나를 간식으로 먹었으며, 밖에 나갈 때는 그런 차를 타고 나갔다. 

그러니 그분이 오시면 동네가 왁자지껄했다. 조무래기들은 신기한 세단을 구경하기 위해 마치 경호원처럼 차 양쪽에 붙어 따라왔다.

특히나 외삼촌이 오시면 그 시절 상상하기 힘든 복돈을 주셨다. 그래서 해마다 기다렸는데, 외삼촌은 그리 많이 오시지는 않았다.

해마다 설날이 다가오면
판사 외삼촌을 기다렸다.
왜냐하면 그 시절 받기 힘든 복돈을 주셔서
외삼촌이 가신 뒤에 바로 엄마에게 빼앗겼지만,
그래도 명절이면, 외삼촌을 기다렸다.

외삼촌이 오시면 동네 어귀부터 떠들썩했다.
조무래기들이 검정 세단 옆에 붙어
호위를 하며 들어왔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우리가 아시아에서 최빈국,
가난했던시절
세계의 원조로 연명하며,
꿀꿀이죽으로 때우던 시절

해방이 되고, 전쟁이 끝나도,
이 나라 농촌에는 더욱 먹을 게 없었다.
쌀은 구경하기도 힘들었고
그나마 추수가 끝나면,
떨어진 쌀을 주우려 논을 헤맸다 
하루 종일 햇볕 아래 집에 있어도
알사탕 하나 구경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심심하면 소나무에 올라가 손차양을 하고
하루에 몇 번,
먼 산모롱이를 돌아 나올 버스를 기다리거나,
장에 간 엄마를 기다렸다
먼 등성이 위로 먼지가 일면
동구 밖까지 뛰어 나갔지만
버스가 그냥 지나간 날이 더 많았다

까금(산) 속 외딴 땟집 한 채
어머니의 손에는 과자가 있을 리 없었다
아카시아 꽃잎만 종일 날리고
하늘은 짙푸르게 높았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이 나라에서 영 잊혀진,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머니가 더욱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 '설날이 다가오면', 윤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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