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의 지구를 걷다㉚] 코카서스 3국을 가다 4_ 와인의 나라, '조지아'를 향해

윤재훈 기자
  • 입력 2020.12.19 20:36
  • 수정 2020.12.31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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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의 나라, '조지아'를 향해

 

여행자가 어떻게 여행을 소화하느냐에 따라,

여행의 질과 가치가 결정된다.

                                 -니체

 

(스스럼없이 아이에게 붓을 맡기는, 그의 품이 넓어 보인다. 촬영-윤재훈)
(스스럼없이 아이에게 붓을 맡기는, 그의 품이 넓어 보인다. 촬영-윤재훈)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밤길 따라 천천히 올드 시티Old city를 걷는다. 바닷가 도시라 그런지 카스피해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제법 세다. 하긴 250일 바람이 부는 나라라고, 그럴만도 하겠다. 조지아도 페르시아어로 '바람이 부는 작은 길'이라는 뜻이란다.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는데, 조그만 지하 입구 안쪽에서 붓터치에 열심인 사내가 보인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 보니 밖에서 보기보다 상당히 넓다. 안은 온통 원색적인 그림들로 전시되어 있는데, 그의 내공이 보이는 듯하다.

맨발로 어느 산길을 걷고 있는 그의 자전적인 사진을 보니, 그의 삶도 그리 순탄하게 살아오지는 않는 듯하다, 가족으로 보이는 팀이 들어오자 그는 그리고 있던 대작(大作) 앞에서 주저 없이 아이에게 붓을 주면 색을 칠해 보라고 한다. 그의 넉넉한 예술적 품이 보이는 것 같아 신선하게 다가온다.

(polis가 생소하다. 촬영=윤재훈)
(polis가 생소하다. 촬영=윤재훈)

성안을 한 바퀴 돌고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뒷쪽에도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을 성곽에 붙여버렸다. 어떻게 하려나? 이 큰 건물을 부술 수도 없고, 이런 짓이 가능한 나라라니, 그것도 유네스코 문화재에 지정되어 있는데, 상상도 못할 일이다.

성곽에서 내려다보는 건물들은 오일 머니가 넘쳐나서 그러는지, 국민소득에 비해 고압적인 관리를 보는 듯하다. 안내소 표지판에는 polis(경찰)라고 소리 나는 데로 써 있다. police라고 쓰는 우리와 표기법이 달라 생소하게 다가온다.

성터를 한 바퀴 돌아 나오니, 다시 매트로Metro 역이다. 화장을 해서 그런지 스코트랜드 인형 같은, 더러는 조각을 해놓은 것 같은 청춘들이 많다

(전통음식. 케밥. 촬영=윤재훈)
(전통음식. 케밥. 촬영=윤재훈)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음식은 본래 터키나 중앙아시아의 음식과 유사하였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이 지배하는 동안 러시아식 식문화가 강요되면서 재배 작물들도 이에 맞게 변화되었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는 자신들의 전통음식을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수천 년 개미(맛)가 배인 입맛을 하루아침에 무력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침략자들은 식민지의 백성을 마치 동물처럼 사육화 하면서 우민화시키려 했다. 마치 일제가 우리의 말과 글을 말살하고, 정신까지 황국화 시키려 했던 만행처럼 말이다.

그중에서도 케밥(Kebab)은 아제르바이잔의 일반 가정에서 저녁 식사 때 가장 자주 먹는 요리다. 여기에 쇠꼬치에 덩어리 고기(주로 양고기)를 끼워 화로에 구워, 보통 야채 꼬치와 함께 먹는 샤슬릭이 대표적이다.

(흔한 ‘벤츠’ 택시. 촬영=윤재훈)
(흔한 ‘벤츠’ 택시. 촬영=윤재훈)

대중교통 요금은 우리보다 훨씬 저렴하다. 충전카드는 2마낫인데, 낡은 시내버스와 지하철은 0,2마낫이고 연계가 가능하며, 우리처럼 여러 명이 탈 수도 있다. 그리고 “벤츠 운전자들이여 놀라지 마시라!” 우리나라에서는 과시용으로 부자들만 탈 수 있는 비싼 차 ‘벤츠’가, 영업용 택시로 흔하게 돌아다닌다. 요금도 저렴하다.

우버 택시는 시내에서 3마낫이면 가능하고, 일반 택시는 3~5마낫인데, 시내에서는 3마낫이면 가능할 것 같다. 차 앞에 노란 선이 있으면 회사 택시인데 3마낫부터 시작하고, 노란 선이 없으면 개인택시인데 1마낫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멀리 갈 때에는 아마도 거리에 따라 계산되는지, 회사택시가 더 저렴한 듯하다. 관광버스가 서더니 할머니가 휠체어를 타고 호텔로 들어간다. 단체로 여행을 온 중국인 관광객인 듯하다.

“여행은 두 발로 걸을 수 있을 때 떠나라.”

 

아제르바이진을 떠나다.

(바쿠 역 안 풍경. 촬영=윤재훈)
(바쿠 역 안 풍경. 촬영=윤재훈)

조지아로 가는 기차가 서는 역은 중심가에 있는 28May에 있다. 그 주위에 제법 숙소들이 숨어 있다. 간판이 없는 곳들도 있다. 이제 아제르바이젠을 떠나려고 하니 처음에 간판도 없던 게스트하우스를 찾아 헤매던 기억이 떠올라 괜시리 웃음이 나온다. 역 뒤로는 서민들을 위한 케밥 식당이 두어 군데 있으며, 보통 1, 30(천 원이 못됨) 마낫 정도 하니, 배낭여행자들도 갈 만하다. 보통 여행자들이 앞쪽으로 들어오면 역을 찾기가 쉬운데, 뒤쪽 광장에서 들어가다 보면 약간 헤매기 쉽다. 광장에 앉아 있는데, 경찰이 왔다 갔다 해 그런 데로 치안이 있어 보인다.

역 안은 오일머니가 넘쳐나서 그런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다. 1층으로 내려가니 번호표를 뽑는 시설도 있다. 조지아 행은 하루 한 번뿐이 없으니 조심해야 되겠다. 9시 50분에 출발하며 24마낫(16800원 정도)이다.

기차는 3등급으로 나누어지는데, 1등급은 ‘에스베SV’이고 2등급은 ‘쿠페Kupe(우즈베키스탄과 비슷)’, 3등급은 ‘플러스카드Plaskard’라고 부른다.

(조지아를 향해. 촬영=윤재훈)
(조지아를 향해. 촬영=윤재훈)

열차를 탈 때 세밀히 여권과 표를 검사하더니, 출발하자마자 또 검사를 한다. 아직 사회주의 물을 완전히 벗지 못한 듯하다. 조지아를 향해 바쿠역을 출발한 국경열차는 카스피해를 따라 북쪽으로 가지 않고, 한없이 남쪽으로만 내려간다. 한참를 내려간 열차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유명한 <고부스탄 암각화> 지대를 지나더니, 마침내 행로를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를 향하여 북쪽으로 튼다. 암각화 지대까지는 약 67km 거리로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까지는 578km로 약 7시간 반 정도 가야 한다.

(하늘 아래 호수, 이시쿨이 있는 키르키스탄 ‘촐폰아타’ 근처에 있는 암각화. 촬영=윤재훈)
(하늘 아래 호수, 이시쿨이 있는 키르키스탄 ‘촐폰아타’ 근처에 있는 암각화. 촬영=윤재훈)

특별히 암각화에 관심이 있다면 권할만 하지만 나는 이시쿨이 있는 키르키스탄의 촐본아타 근처 고대의 암각화 지대에서 눈시리게 보았다. 그 시대의 그림들은 대부분 초등학생들 그림처럼 유치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시절 고대인의 문화적 상상력과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벅수모양의 조형물들도 세계 각국에서 보인다.

 

마지막 국경도시 (셰키)

(셰키의 여름궁전,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촬영=윤재훈)
(셰키의 여름궁전,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촬영=윤재훈)

자정이 지나가자 상인과 장인들의 도시이며 조지아 국경을 넘어가는 마지막 도시, <셰키>를 지나가는 모양이다. 셰키라는 지명은 기원전 4세기에 흑해(黑海)에서 살고 있던 사카족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부르게 되었다. 3000년의 역사를 지닌 이 마을은 아제르바이잔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코카서스 산맥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만 8000여 명 정도가 살고 있는 한적한 시골이다. 나지막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쌓여 있어 풍광이 아름다운 살기 좋은 마을이다.

이 땅에는 1743년 우리나라와 발음이 같은 <셰키 한국汗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비록 나라는 작았지만 1797년에 건설된 작지만 화려한 <칸의 여름궁전>를 만날 수 있다. 특히나 호두나무로 제작된 원색적이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아름다운 곳이다. 셰키의 무슬림 왕이 여름에만 잠시 거처했던 곳이며. 지금의 궁전은 지진이 나서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1806년 러시아의 알렉산드로 1세에 의해 속국이 되었으며. 76년간 존속되다가 1819년 러시아에 흡수 합병되고 마는 불운한 왕조였다. 부하라에도 칸의 여름과 겨울 궁전이 있는데, 그 높이와 크기에서 압도적이었다.

(사막의 배, 낙타. 촬영=윤재훈)
(사막의 배, 낙타. 촬영=윤재훈)

또한 마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이곳도 고대 실크로드 대상(隊商·카라반)들의 주요 교역로였다. 그래서 18~9세기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지나 이스탄불까지 연결되던 실크로드 상인들의 숙소 <카라반 세라이Karavan Seray>가, 지금도 여행자들의 숙소로 건재하고 있다.

카라반 세라이는 ‘상인들’을 뜻하는 카라반(Caravan)과 ‘저택’을 뜻하는 세라이(Serai)로 구성되어 있는데, 시설과 크기에 있어서도 여타 도시에 뒤지지 않는다. 정면에서 보면 3층인데 윗길에서는 2층이고, 1층에는 상가들이 있다.

이곳에서는 실크 제조와 수공예가 유명했다. 그러한 전통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옛날 낙타와 인부들이 쉬었던 장소는 실크와 수공예품을 판매하고 체험하는, 공방(工房)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 지역이 산골마을이지만 바쿠에서 조지아로 넘어가는 실크로드 교역의 주통로였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페르시아 인의 자존심, 카핏. 촬영=윤재훈)
(페르시아 인의 자존심, 카핏. 촬영=윤재훈)

대상들은 수십 마리에서 수백 마리의 낙타를 이끌며 실크로드의 교역품을 실어 날랐다. 낙타가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는 최대 40km 정도였으니, 대상들의 숙소인 카라반 사라이도 그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카라반사라이에는 낙타가 먹고 쉴 수 있는 공간과 인부들의 숙소, 목욕탕과 바자르 등의 부대시설도 필수조건이었다. 대상들은 이곳에서 하루 동안의 여독을 풀며 다음 여정을 준비했다.
또한 카라반 사라이 숙소의 기능뿐만이 아니라, 교역과 정보 교환도 이루어졌다. 지역관리들은 이곳을 세금징수 장소로도 활용했다. 그만큼 카라반 사라이의 활성화는 지역 경제에도 한몫을 담당했다. 대상들이 숙소에서 묵어감에 따라 여러 가지 경제적 이득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역 영주(領主)들은 서로 카라반 사라이를 짓고 대상들에게 무료로 제공했다. 대상들도 자신들이 오가는 길목에 위치한 카라반 사라이에 적절한 도움을 주면서 자신의 사업을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기차가 서있으면 에어컨이 나오지 않아 무척 덥지만, 우즈베키스탄과 달리 달릴 때면 3등칸에도 시원한 바람이 나온다. 좁은 한 공간에 여덟 개의 침대가 붙어 사람들이 빽빽하게 차있으니, 내려올 때는 다른 사람의 침대를 밟고 내려와야 할 정도로 좁다. 그러니 기차가 서면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다. 잠시 차량의 이음매 부분으로 나가보지만 그곳도 덥기는 마찬가지다.

오일 머니가 넘쳐서일까, 풍체가 좋은 아제르바이잔의 중년들은 표정이 너무 굳어있다. 경직되어 있는 얼굴에는 웃음주름이 보이지 않고 험악한 느낌마저 들어, 하룻밤을 같이 세워도 말을 붙일만한 분위기는 좀처럼 조성되지 않는다.

여름 도심, 한낮
횡단보도 앞,
7살 딸아이와 도서관에 간다

시내버스 아저씨
무표정한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다
급하게 출발한다

고개를 돌리니
하얀 트럭 한 대
시커먼 매연을 내뿜는다

아저씨 한 분
속상한 일이 있는지
눈가가 찡그리고 있다

아이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연신 웃으며 장난질을 치는데,

아저씨가 우리를 빤히 보고
빙그레 웃음주름을 짖는다
주름 사이로 단물이 번지는 듯하다

- 웃음 주름, 윤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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