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화인이 들려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입술소리

박애경 기자
  • 입력 2019.01.23 18:19
  • 수정 2019.01.24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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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기념곡 작사시인 이화인의 시집 '가벼운 입술소리'

【이모작뉴스 박애경 기자】 2019년 새해 첫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반추하는 시집이 출간됐다. 시간은 영속적이라 시작과 끝이 항상 맞닿아 있다. 해의 첫 시작과 지난해의 마지막이 늘 이어있다는 얘기다. 마지막 마무리가 끝나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화인 시인이 그의 네 번째 시집 <가벼운 입술소리>를 새해 벽두에 독자들에게 내놓은 이유이지 싶다. 걸어 온 인생길을 들여다보고 적멸(寂滅)의 집으로 가기 전, 남은 이생의 삶을 시작하고 정리하길 바라는 시인의 마음일 수 있겠다.

시인 이화인은 제주4·3기념곡을 작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나 전북대학교를 거쳐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2003년 현대시문학으로 등단, 임화문학상, 현대시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리움은 오늘도 까치밥으로 남아>, <길 위에서 길을 잃다>, <묵언 한 수저> 등 3편의 시집과 <쉰여덟에 떠난 Nepal 인도>라는 수필집을 집필했다.

이번에 내놓은 <가벼운 입술 소리>는 네 번째 시집이다. △저문 강가에서 △지상에서 가장 따뜻한 밥상 △제주도에 가면 △사랑이란 이름으로 △적멸(寂滅)의 집 △가벼운 입술소리 등 시집은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 그리움, 외로움, 꿈, 절망, 꽃, 바람, 비, 연인, 어머니, 아버지 등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대상은 무진하다. 시인 이화인의 시심(詩心에도 이러한 대상들이 규칙적으로 드러난다.

먼저 제1부 ‘저문 강가에서’는 선험적 시련과 아픔이 내재되어있다. 그것이 때로는 싸락눈으로, 젖은 꽃으로, 이브의 달로, 할미새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시인은 저문 강가에서 지난 삶을 조망하며 사무치게 그리운 노모를 떠올린다.

 

영광스러웠던 날 슬펐던 날도

그리움의 애증마저도

여울지는 강물에 내려놓고

경건하게 귀 기울여 보라

여울지는 저 물소리가 무얼 말하는지

무얼 일러주는지                               

-저문 강가에서 中-

 

어머니는 나를 잊었습니다

그러나 잊은 게 아니었습니다

흘러간 세월을 헤집고 젊음을 기억하려는

어머니 두 눈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계십니다

일찍 떠나서 미안해하는, 측은한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는, 울고 계신 아버지가 계십니다              

-어머니는 나를 잊었습니다 中 -

 

어머니의 대한 그리움은 제2부로 이어진다. 무덤가 이팝나무가 정을 듬뿍 담은 어머니의 고봉밥이 되고, 이미 별이 된 어머니가 저물녘 하늘 어둠길을 내려와 팽나무 가지에 걸판스런 밥상을 차리기도 한다. 지상에서 가장 따뜻한 밥상에 시인은 위로받는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와

갈 길을 묻는 떠돌이 아들에게

따스운 쌀밥 한 그릇 먹이고 싶었다

무덤가 이팝나무가

어머니 부탁으로 하얀 쌀밥을

듬뿍듬뿍 고봉으로 담아 올렸다                   

-고봉밥 中-

 

제3부 ‘제주도에 가면’에서는 시인의 해탈이 감지된다. 시인은 철저히 자기를 고립시키면서 내재된 아픔을 스스로 치유한다. 제주는 시인의 성난 포효를 들어주고, 울음을 대신 울어준다. 무릎을 내어주고 이불을 덮어주며 자장가를 불러준다. 시인은 제주의 품속에서 젖은 눈을 감고 단잠을 잔다. 꿈속은 이미 즐거운 소풍길이다.

 

제주도에 가면

나보다 바다가 먼저 취하고

취한 나를

등대가 먼저 끌어안았다

등대의 무릎을 베고 누우면

파도가 부르는 자장가에

한라산이 한달음에 달려와

이불이 되어 주었다                

 -제주도에 가면 中 -

 

삶의 덫에 치인 상처투성이 영혼을 어루만져주던 제주에서의 치유를 통해 시인은 삶을 너그럽게 관조하게 된다. 이것은 제4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에 삽입된 시 ‘사노라면’에 나타나있다. 그리고 상처마저도 사랑으로 감싸 안는다.

 

사노라면,

사는 것이 슬픔만은 아니라고

사는 것이 기쁨만은 아니라고

토닥여 준다

살다보니,

사는 것이 슬픔만은 아니더라고

사는 것이 기쁨만은 아니더라고                            

-사노라면 中 -

 

시인의 해탈은 제5부 ‘적멸(寂滅)의 집’에서 정점을 이룬다. 마음속 묵은 때 비워내고 사리를 빚는 노스님처럼 품안에 담은 세상을 훨훨 날려 보낸다.

 

노을이 붉은 휘장을 두르고

만리 너른 그늘을 보듬어주자

나무는 품 안에서

수천수만 나비 떼를 날려 보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는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지고

적멸의 집은 고요 더 깊다                                  

 -적멸(寂滅)의 집 中 -

 

그리고 마침내 시인 이화인은 살아갈 날이 살아 온 날보다 적은 인생 가을 길에 서서 시인으로서의 삶을 잘 갈무리하고 알차게 꾸려야겠다는 다짐을 제6부 ‘가벼운 입술 소리’에 담았다. 등단 이십년이 지나도록 시 한줄 쓰는 일을 어려워하는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고, 온 몸으로 쓴 시집이 시인의 마음과는 달리 누군가에게 짐이 되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의 시들이 짬짬이 가볍게 읽혀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네 번째 시집의 제목을 ‘가벼운 입술소리’라 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구(詩句) 하나하나 시절(詩節) 한줄한줄에 내재된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썰물 지는 갯벌

노랑부리저어새가 제 발자국에서

노을을 건져 올리고 있다

한 입 뱉어낼 때마다

뚝뚝, 눈물진          

뒷걸음치는 바닷물이 붉다                     

 -노을-

 

해를 새롭게 시작하며 ‘노랑부리저어새’ 시인 이화인을 만나기 위해 가벼운 시집 한권 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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