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라이프㉒] 추억 여행

김경 기자
  • 입력 2021.02.03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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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
[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1월도 추억 속으로 묻혀가는 마지막 날입니다. 마무리 잘 하시고 다가오는 2월에는 좋은 일만 가득한 멋진 나날이 되길 빕니다.’

살가운 그녀가 아침 일찍 카톡을 보내왔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과 불빛인지 햇빛인지에 물든 주홍 나뭇잎이 문자의 배경으로 깔려 있다. 마음이 푸근해지면서도 왠지 가슴 한 편이 허허롭다. 오늘이 1월의 마지막 날이라니…. 새해 시작이 엊그제만 같은데, 세월이란 놈은 일언반구도 없이 앞만 보고 내달린다.

내달리는 세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추억 속으로’ 라는 문구에 시선이 간다. 그래, 괜히 허허롭니 뭐니 되잖은 가슴앓이로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추억이나 들추어 볼까. 잘 되었다. 코로나 시대에 묶인 집 밖의 여행을 추억 여행으로 대체시켜 보자. 이 아침에 떠나는, 내 삶의 어느 한 페이지를 반추해볼 수 있는 뜻밖의 여행이다.

책상에 딸린 사물함에서 추억의 보물 창고인 묵은 노트를 꺼낸다. 저장된 추억들이 노트 갈피마다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10여 년 전의 아스라한 추억이 서린 노트 갈피를 만지작거린다. 새 옷을 입고 나들이를 하고 싶다는 내가 불쑥 튀어나온다. 참 낯설다. 그때는 정말 그랬던가? 그랬겠지. 물론 무턱대고 새 옷 타령을 한 건 아니었다. 타인의 죽음에서 비롯한 삶의 외로움을 달래보려는 일종의 방편이었다고나 할까. 나는 그때처럼 양손으로 커피 잔을 감싸고서 그날 그 시간 속으로 서서히 발을 뗀다.

오늘은 모처럼 친구들 셋과 아차산에 오르는 날이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주방으로 안방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뛰어다닌다. 물이 끓으며 흘러내리는 원두커피 향은 코를 간질이고, 화급하게 깎아 담은 배와 오이 조각은 볼품없이 제멋대로다. 면장갑, 땀수건, 생수병, 초콜릿 등을 식탁에 늘어놓은 채 나는 거울 앞으로 다가선다. 얼굴에 선크림을 박박 문질러 바른 뒤에 챙이 달린 모자를 눌러쓴다. 10분만 일찍 서둘렀어도 이리 콩 튀듯 팥 튀듯 하지 않을 텐데……. 남편이 기어이 한 마디를 하고서 보온병에 커피를 채우고, 배낭에 차곡차곡 내용물들을 담아준다. 약속시간에 쫓기는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나는 남편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날려버린다. 바야흐로 봄인 것을. 연두로 물든 산에 오르면 햇살 또한 연둣빛으로 빛나겠지? 설레는 가슴으로 집을 나선다.

아차산 관리사무소를 지나 드디어 산에 들어선다. 땅에 붙어 고물거리는 앙증맞은 새싹들, 따사로운 햇살에 반짝이는 여린 나뭇잎들, 맑고 달콤한 공기…. 우리들은 금세 연둣빛 얼굴로 양팔을 벌리고 심호흡을 한다. 일순간 온몸의 묵은 때들이 말끔히 스러진 듯, 저마다 얼굴에 윤기가 흐른다. 누가 감히 우리들을 쉰 세대라고 이죽거리는가. 지금이 바로 인생의 황금기인 것을…. 포르르 날아오르는 새들도 우리의 발걸음에 맞춰 더 경쾌하게 날갯짓을 한다. 그렇다고 단숨에 정상으로 치닫는 건 금물이다. 틈만 나면 숨이 차다는 핑계로 털썩 주저앉는 게 또 우리들의 매력이다. 주전부리로 입을 호강시키는가 하면, 남편 흉에 열을 올리다가 슬쩍 아이들 자랑을 흘린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수다의 세상은 산 속에서 더 즐겁다. 한바탕 까르르 웃고 나서 커피 타임을 체크한다. 보온병에 담긴 커피는 종이컵에서도 모락모락 김을 피운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느라 모두가 잠잠한 중에 어디선가 낯선 말소리가 들려온다. 우리와 비슷한 또래들 대여섯이 내 등 뒤로 가까이 자리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친구가 자살을 했어요.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지금도 가슴이 서늘해요. 어머, 정말요?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글쎄요,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한 가정이었죠. 탄탄대로 전문직 남편에다 큰애는 대기업에, 둘째는 명문대에 다니거든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나이를 무색케 하는 미모 때문에도 늘 친구들의 눈총을 받곤 했는데….

우리들은 갑자기 물벼락이라도 맞은 듯 서로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본다.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분위기를 뚫고,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며칠 전, 신문에서 본 공소증후군(空巢症候群 ․ empty nest syndrome)이라는 말이 뇌리를 스친다. 중년 여자를 공격하는, ‘빈 둥지신드롬’이라고도 하는 병이다. 나는 슬며시 보온병 뚜껑을 다시 연다. 친구들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들고 있던 종이컵을 내민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초췌하고 쓸쓸해 보이는 그녀에게도 따끈한 커피 한 잔을 건넨다. 요즘 들어 나도 문득문득 혼자라는 사실이 가슴을 짓누르곤 했는데….

내가 그랬듯, 그녀도 거울 앞에 서서 자문했을지도 모른다. 행복하니?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혼자만의 진지한 표정에 빠진 그녀를 상상한다. 그녀는 한없이 작아진 자기의 모습만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던가. 나는 혼자다.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남편은 늘 바쁘다. 내 손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성장한 아이들은 뭔가 말을 걸어도 세대 차이가 난다며 돌아선다. 헌신적으로 가정에만 충실했는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무료하다. 할 일도 없다.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그녀는 여태까지 너무 조급하게 살아왔다. 자기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의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자기의 존엄성은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다름 사람에 의탁해 타자의 기준에 맞춰 그저 쓸려 다녔다. 집 마련에 헐떡이면서 아이들 대학 합격만이 미래의 투명한 삶이라고만 생각했다. 어쩌면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도 모른다. 내 가족, 내 핏줄만이 전부라는 어리석은 미망, 그 허상만을 좇았다.

우리 나이는 결코 떨어지기 위해 붉게 물든 낙엽이 아니다. 지금 그대로 정열적으로 불타고 있는 예쁜 단풍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실제로 나이를 잊고 산다. 물론 무의식적인 심리 작용일 테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간혹 눈치 없는 이들이 물어올 때면 재빨리 셈을 한다. 올해가 몇 년이지? 내 주민번호 앞자리 숫자는? 결코 숫자가 중요한 건 아니다. 지금 내 나이는 그동안 잃고 살았던 내면의 세계에 몰두해야 하는 시기다.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시야를 넓혀가며 자존 의식을 키워야 한다. 설령 자기 연민을 이기지 못해 성형외과나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봉책일 뿐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보람 있고 향기로운 일들이 얼마든지 널려있다. 아름다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즐기는 것이다. 못다 한 공부, 재미있는 운동, 장애아동이나 노약자 돌보기 등등.

우리들은 정상에 올라 땀을 훔치며 기념사진을 찍고 내려온다. 해넘이 시간에야 아쉬운 작별을 한다. 바람이 약간 쌀쌀하다. 아직은 완연한 봄이 아니고 겨울 끝이 살짝 보이는, 겨울과 봄 사이 환절기다. 파카 깃을 잡아 올리는데, 문득 어제 텔레비전에서 본 흰색 트렌치코트가 떠오른다. 이 계절에 한번 폼 나게 입어보고 싶다. 이왕이면 남편과 함께 외출하는 건 어떨까. 느긋하게 차도 한 잔 마시고, 트렌치코트를 선물해달라고도 하고. 아니다. 일단 흰색 트렌치코트는 내가 구입하자. 그런 뒤에 잘 차려입고서 남편과 외출하는 것이 좋겠다. 고궁을 걸어도 운치 있고 미술관 관람도 괜찮고, 칼국수를 먹어도 맛있을 터다. 회심의 미소가 절로 나온다.

트렌치코트를 차려입고 어디를 갔던가? 그때만 해도 저렇듯 새 옷에 대한 욕구가 꿈틀거렸다. 옷뿐만이 아니다. 그때에는 수많은 욕구가 넘쳐 좌절하면서 공허함에 휩싸인 번뇌의 시대였다. 지금이라고 그 두터운 때가 벗겨진 것은 아니나 그래도 그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는 생각이다. 누가 나이를 물어도 셈을 하지 않고서 선뜻 답을 낸다. 스스로를 뒤돌아보는 여유가 그때보다는 잦아진 일상이다. 이렇듯 추억 여행도 할 수 있으니 괜찮다. 그리고 이따금 인생의 깊이라도 터득한 척, 서산대사의 말씀을 읊조리기도 한다.

생야일편 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사야일편 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부운자체 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

생사거래 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생사가 한 점 구름과 같아서 실체가 없다는 말씀이다. 나는 언제쯤이나 이 말씀을 깨닫게 될까. 그렇다. 비록 깨닫지는 못할지라도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그 삶을 사랑하는 자세로 살아가자. 나는 묵은 노트를 품에 한 번 안아보고서 사물함의 문을 연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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