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라이프㉓] 벼락 맞은 나무, 웃다

김경 기자
  • 입력 2021.03.03 14:36
  • 수정 2021.04.13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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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3월이 낼모레로 다가오니 자연의 기운이 역시 다르다. 때맞춰 들려오는 남녘 지리산 곳곳의 봄소식이 반갑기 그지없다. 복수초의 첫 꽃망울을 시작으로 매화, 산수유, 히어리, 진달래가 손짓을 한다.

모처럼 꼭두새벽에 일어나 산수유와 매화를 비대면으로 마주한다. 산뜻하면서도 은은한 고품격의 모습에 시쳇말로 심쿵한다. 며칠 전만 해도 매서운 2월 추위가 눈발까지 흩날리며 기세를 부리더니, 다 지나갔다. 게다가 내일부터는 드디어 코로나19를 잠재울 수 있는 백신 투여가 시작된다. 마음이 가뿐하다 못해 그동안 움츠려들었던 심신에 날개를 단 기분이다. 근두운에 올라탄 손오공이 부럽지 않다. 세상이 새로워 보인다. 왠지 이 봄과 함께 뭔지 모를 행운, 요행이 찾아올 것만 같다. 행운이란 놈이 본래 제멋대로 들쑤시는 놈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들썩인다. 봄기운에 너무 취했는가. 언젠가 정말 행운을 찾아 집을 나섰던, 산수유와 매화가 만발한 화창함 봄날이 떠오른다. 나 혼자만이 행운을 잡으러 단단히 각오를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속한 등산모임의 회원들 모두가 행운바라기였다.

등산모임의 구성원은 고등학교 친구인 열두 명의 남자들과 그 식구들이다. 매달 셋째 주 일요일에 하는 산행의 역사가 어느덧 20년을 넘기면서 아이들은 하나둘 결혼하고, 이제는 부부모임으로 자리 잡았다. 등산모임의 최대 자랑은 산이 거기 있어 한 발 한 발 오를 뿐, 기를 쓰고 정상에 도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유유자적 산을 즐긴다. 숲의 싱그러움, 지저귀는 산새, 시원한 산들바람에 온몸을 맡기며 자연과 교감한다. 그저 그런 무욕의 경지에서 정을 나누며 쉬엄쉬엄 걷다 보면 정상에 서 있곤 한다.

그때에 우리는 한창 팔팔한 사십 대 중반이었다. 그날은 여느 때와 좀 달랐다. 가평에 위치한 운악산 등반이었는데, 뚜렷한 목적지를 향한 제법 기운찬 발걸음이었다. 정상 못미처에 있다는 벼락 맞은 나무를 찾아야 했다.

정기모임 날이 아닌 몇 달 전 겨울, 서너 명의 회원이 운악산을 오르다가 벼락 맞은 나무를 발견했다. 그들은 밑동만 새까맣게 탄 채 잘린 모습이 신기해 부슬부슬 떨어지는 수피 몇 조각을 떼어냈다. 하산하고 식당에서 저녁을 먹다가 수피 조각들을 꺼내놓고 이리저리 들여다보았다. 마침 옆자리에 앉았던 나이 지긋한 어른이 반색을 하며 호언장담을 했다.

예부터 내려오는 속설이 있지. 벼락 맞은 나무를 몸에 지니거나 곁에만 두어도 반드시 행운이 따른다는 건데…… 그 행운이란 게 뭐냐 하면…… 바로 돈(재물), 돈이 들어온다는 게요.

참 기분 좋은 속설이었지만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런데 한 달쯤 지나면서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벌어졌다. M씨 회계사무소에 서너 명의 신규 계약자가 나타나고, K변호사는 부쩍 많은 사건을 의뢰받고, 무엇보다도 늘 한가하던 C씨 병원에 환자들이 북적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벼락 맞은 나무 수피를 가져온 이들 모두에게 일어난 행운이었다. 속설이 맞았다는 게 신통했다. 우리들은 만나기만 하면 벼락 맞은 나무가 선물한 행운의 얘기꽃을 피우며 각자 나름대로 희망을 품었다.

운악산에 첫발을 내딛기 전부터 다리품이 여간 만만치 않았다. 웬만한 시냇물보다 더 널찍이 흐르는 계곡 물을 끼고 한참을 걷고 또 걸어도 산은 저만치서 뒷짐을 지고 내려다보기만 했다. 겉모습이 빼어난 산은 오르면 오를수록 험난해 우리들의 애를 태웠다. 하지만 모두들 벼락 맞은 나무 수피를 한 조각씩 떼어 와야 한다는 일념에 땀으로 멱을 감으면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산들이 대부분 돌산이긴 해도, 운악산은 숫제 바위투성이였다. 넓적한 바위들이 길을 대신하는 바람에 몇 차례나 밧줄에 의지해 발을 옮기곤 했다. 여태까지의 산행과는 판이하게 난이도가 높았다. 문득 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이렇듯 산타기가 험한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 산을 즐기는 순수함을 벗어난 불순한 의도? 어떤 요행을 갈구하는 우리들의 서투른 몸짓이 내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M씨의 목소리가 허공으로 치솟았다.

와, 맞다 맞아. 바로 저거야. 야, 그대로 있네!

벼락 맞은 나무는 약간 가파른 오르막길에 가로질러 넘어져 있었다. 원래 길가에 바투 서 있던 것으로 수종은 알 수 없었으나 둥치로 보아 분명 고목이었다. 주위의 다른 나무들은 전혀 탄 흔적 없이 말짱한데, 그 나무의 밑동만이 희한하게 새까맸다.

회장이 씩 웃으며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톱이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나무 둥치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우려던 게 아니었나? 치밀한 계획이라도 세운 것인가? 톱은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잘도 넘어가는데, 나무는 쉬이 잘리지 않았다. 모두들 눈을 똥그랗게 뜨고 헤벌쭉한 표정으로 큰 토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모습이라니. 그때만큼은 사십 대의 식자(識者)들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오직 치기를 부리며 한껏 들뜬 장난꾸러기들뿐이었다. 어쨌거나 기어이 큰 토막을 잘라내었다. 회장은 어깨가 빠질 듯한 고통을 감내하며 그것을 짊어지고 앞장을 섰다.

발걸음도 가벼이 정상으로 전진하는 우리 사이에 끝없는 말들이 난무했다. 자잘하게 열 토막 내어 각자 도장을 새겨야 한다, 큰 토막 그대로 한 달씩 집집으로 순례를 해야 한다 등등. 나는 회장이 멘 가방을 눈으로 좇으면서 무심히 한쪽 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넣었다. 뭔가가 손에 잡혔다. 언제 떼어냈던가. 손가락 크기만 한 세 개의 나무 조각. 나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것은 요행을 바라는 부끄러운 내 민낯이었다.

하산 길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모두들 입가에 웃음을 매달고 당장 부자가 될 것처럼 들떠 있었다. 과연 벼락 맞은 나무가 우리에게 어떤 행운을 가져다줄 것인가. 나는 다시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나무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그만 픽, 웃음이 나왔다. 최첨단 과학 시대에 속설을 곧이곧대로 믿고 행하는 내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아니 나처럼 드러내놓고 요행을 바라는 우리 회원들이 뜬금없이 너무 사랑스러워 보였다. 이내 어떤 깨달음이 내 머리를 쳤다. 벼락 맞은 나무를 갖기 이전에 이미 우리는 행운을 거머쥔 사람들이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의 끈끈한 우정으로 빚어진 만남, 등산모임 그 자체보다 더한 행운이 어디 또 있겠는가.

이제 산수유와 매화가 바람에 흩어지고 나면 금계국, 접시꽃, 장미가 만발할 것이다. 코로나19로 아쉬웠던 한때를 훌훌 털어내고 다시 산행할 시간이 시나브로 다가오고 있다.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가 또 어디 벼락 맞은 나무라도 꼭꼭 숨어 있는지 찾아볼 일이다. 아니 우리 등산모임이 어떤 모임인데……. 산뿐인가. 우리는 어디든지 못 갈 데가 없다. 깊은 오지나 계곡은 말할 것도 없고, 바다가 보고프면 동해로 남해로, 강이 부르면 어라연으로 섬진강으로 달려가지 않았던가. 이문구의 소설 ‘우리 동네 사람들’처럼 우리도 멋스럽게 얼마든지 어울려 살 수 있다.

우리에게 진정한 행운은 만남이다. 헌데 그때 회장이 메고 간 벼락 맞은 나무토막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또 내 주머니에 간직했던 나무 조각은? 어디선가 벼락 맞은 나무가 떼굴떼굴 구르면서 파안대소한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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