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주의 신중년 요즘세상54] 깊은맛 유감

오은주 기자
  • 입력 2021.03.04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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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심리학과 졸업 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늪' '저녁 산행' 추천완료 등단소설집  [달의 이빨] [하루 이야기] [잠든 정원으로부터] 출간2011년 한국소설작가상 수상현재, 한국문화콘텐츠 21 운영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이화여대 심리학과 졸업
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늪'
'저녁 산행' 추천완료 등단
소설집 [달의 이빨] [하루 이야기]
[잠든 정원으로부터] 출간
2011년 한국소설작가상 수상
2019년 조연현문학상 수상
한국문화콘텐츠21 운영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아니 뭔 남자가 결혼생활 30년 동안을 마누라가 해주는 음식에 입맛을 길들이지 못하고 여태껏 ‘깊은맛’타령이람. 된장찌개를 해주어도 먹을만은 한데 깊은맛은 아니라고 하고, 시어머니에게 배워서 무를 깔고, 시래기도 넣고 생선조림을 해주어도 한 끗 차이로 깊은맛이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애초에 서울여자인 남주씨와 전라도 남자인 남편의 입맛 사이에는 합일이 되지 않는 깊은 강이 흘렀는데, 지금까지 그 강을 메우지를 못하고 깊은맛 부족이란 지청구를 수시로 듣는 처지로, 이젠 아예 맛평가에 대한 후렴귀로 여겼다.

남주씨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론적으로 따지자면 그 깊은맛이란게 첫째, 어린 시절의 ‘배고픔’이 가져다 준 결과물이기가 쉬웠다. 배가 고프면 무슨 음식이건 맛이 있는 법이니까 남편이 입에 달고 사는 고생담인 ‘다음 끼니가 걱정이었다’라는 상황에서 뭔들 맛이 없었겠는가 말이다. 둘째는 재료의 질 자체가 다른 탓이리라. 집근처의 텃밭에서 따온 야채와 어판장에 가서 사온 생선과 해물의 싱싱함을 현대 서울에서 어찌 구한단 말인가.

셋째 이유가 가장 중요한데, 기실 그 깊은맛은 추억과 기억이 녹아있는 맛이지, 비법의 맛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남주씨는 남편이 애타게 그리는 깊은맛은 돌아오지 않는 어린 시절처럼 소환불가에 재현불가라 설득하며 서울식 밥상을 차렸다.

그런 남편이 올해 설을 맞아 5인 이상 모임 금지령에 따라 혼자서 고향집에 다녀왔다. 고향집 가는 날짜가 다가올수록 남편은 깊은맛 충족에 대한 기대로 들떴다. 남도 바닷가 마을엔 노모가 홀로 살고, 그 옆에 큰형네가 사는데 형수가 노모의 손맛을 계승한 터라 ‘깊은맛’을 듬뿍 맛보고 올 수 있는 까닭이었다. 남주씨는 시어머니와 형님에게 드릴 명절선물비를 챙겨주며 소풍 가는 애한테처럼 말했다.

“맛있는 거 실컷 먹고 와요”

실제 집을 나서는 남편은 뒤통수부터 잔뜩 신바람이 나 보였다. 듣자하니 과연 9순이 가까운 노모가 서울 사는 막내아들이 왔다고 오랜만에 솜씨를 발휘해서 생굴무침을 만들어주었다. 미나리와 무, 채친 배를 섞어 초고추장에 무친 생굴무침은 노모의 겨울철 주특기 요리였고 자라면서 자주 먹어본 만큼 남편이 겨울만 되면 오매불망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이기도 했다. 남주씨도 처음에는 시어머니에게 생굴무침 만드는 양념배합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돌아온 대답이 “이 양념 저 양념 손대중으로 대충 넣고 버무리다가 한가닥 먹어보고 다시 양념하면 된당께.”였다. 그런데도 주재료인 굴이 일단 싱싱한데다 매운맛과 신맛의 조화가 기가 막혔다. 재료를 계량하지도 않고 커다란 그릇에 양념을 다 넣고 쓱쓱 무치는데, 손맛의 경험치는 계량을 뛰어넘는 고도의 경지였다.

그런데, 설을 잘 쇠고 돌아온 남편은 그 다음날부터 계속 설사를 했다. 머리도 어지럽고 구역감마저 들어서 내과에 갔더니, 생굴 노로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장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겨울철에는 특히 생굴을 주의해서 먹어야 하는데 이젠 나이 탓에 바로 노로바이러스 감염으로 이행된 것이다. 약을 먹고도 꼬박 사흘을 화장실을 들락거리게 되었다. 젊었을 때는 어머니의 생굴무침을 한바가지 먹어도 끄떡없는 뱃속이었는데, 오호통재라! 이제 남편은 아무리 강렬한 추억의 맛이라도 몸에게 먼저 물어보고 먹어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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