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주의 신중년 요즘세상55] K 장녀

오은주 기자
  • 입력 2021.03.15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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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심리학과 졸업 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늪' '저녁 산행' 추천완료 등단소설집  [달의 이빨] [하루 이야기] [잠든 정원으로부터] 출간2011년 한국소설작가상 수상현재, 한국문화콘텐츠 21 운영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이화여대 심리학과 졸업
1989년 현대문학에 소설 '늪'
'저녁 산행' 추천완료 등단
소설집 [달의 이빨] [하루 이야기]
[잠든 정원으로부터] 출간
2011년 한국소설작가상 수상
2019년 조연현문학상 수상
한국문화콘텐츠 21 운영위원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큰언니가 입원한단다. 유방암 초기란다. 윤미씨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의 큰언니도 아플 줄 아는 사람이었어? 나의 큰언니는 언제나 아플 줄도 모르고 아파서도 안 된다고 스스로 말한 사람 아니었어? 3녀 1남의 셋째 딸인 윤미씨는 흐르는 눈물 속에서 자신의 버팀목이 스러지는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 윤미씨네는 강원도에서도 오지에 살았는데 딸 셋에 맨 마지막에 아들 하나라 전형적인, 아들선호 패턴인 집안이었다. 조그만 간장 종지에 참기름 한 숟갈과 계란 노른자 한 개를 띄운 그것을 아침마다 남동생에게만 주는 엄마를 보면 윤미씨는 그 종지를 달랑 엎어버리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큰언니는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너한테 계란 한 판씩 팍팍 삶아주고 부쳐줄게”라고 달랬지만 윤미씨는 서운함이 가시지 않아서 괜히 엄마에게 성질을 부리곤 했다. 큰언니가 먼저 서울로 가서 산업체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뒤 세 동생을 불러들였다. 큰언니가 봉제공장에서 벌어온 돈으로, 두 칸짜리 전세방에서 윤미씨와 작은언니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작은언니도 졸업한 뒤 바로 취업을 하고 학자금을 대줘서, 남동생과 딸 셋 중 유일하게 막내인 윤미씨만 대학을 갈 수 있었다. 집안에서는 큰언니의 희생을 ‘맏이’라며 당연시했고, 윤미씨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윤미씨가 결혼을 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큰언니의 삶이 곧 ‘형제들의 어미’로서의 삶이었던 걸 깨달았다. 큰언니의 희생으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선생님으로 살면서도 여전히 큰언니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아예 큰언니네 아파트 다른 동으로 이사를 해서 윤미씨네 아이 둘은 이모밥을 먹고 자란 셈이었다. 큰언니의 마음씀은 늘 웅숭깊었다. 큰언니네 집은 부엌도 넓고 냉장고 2대에다 김치냉장고도 2대가 있었다. 그 곳은 곧 일가의 반찬제조창이었다. 큰언니네 식구 4명에다 세 동생네 가족 10여 명이 먹을 반찬이 다 그 집 냉장고와 김치냉장고에 들어 있었다. 갖가지 반찬과, 철철이 간장 된장은 물론이요, 진짜 감자옹심이와 배추전을 모일 때마다 내어놓는 큰언니는 우렁각시에다 강철체력을 더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런 맏딸을 일컬어 K팝, K푸드처럼 K장녀라고 한단다. 윤미씨가 들은 바 K장녀는, 가족에 대한 무한한 책임감, 심각한 겸손함, 습관화된 양보가 특징이라고 한다. 어쩜 큰언니와 완전히 일치하는 미련스런 덕목들이 아닌가!

그런 큰언니에게 기대어 60살 가까이 살아온 윤미씨는 큰언니의 병마를 믿을 수가 없었다. 수술 날짜가 다가오자 울먹이는 동생들에게 큰언니는 짐짓 명랑한 목소리를 냈다.

“다행히, 초기고, 수술만 하면 곧 괜찮다니 걱정들은 말아. 내가 할 일이 좀 많아야지.”

그래, 큰언니, 큰언니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이 집안에는 너무 많아, 난 못해, 큰언니가 다시 건강해져서 해줘… 윤미씨는 이런 울음 섞인 답을 삼켰다. 큰언니가 수술하는 날, 윤미씨는 큰형부와 조카들보다 더 빨리 병원에 도착했다. 병상에 누워 수술실로 들어가는 큰언니를 향해 “언니, 언니, 큰언니…” 끝없이 불렀다. 지난 세월 친정식구와 가족을 위해 고통을 표현하지 못한 채 희생을 해온 응어리가 큰언니의 가슴에 맺힌 것만 같아 목이 메어왔다. 큰언니가 수술을 잘 마치고 퇴원을 하면 넓은 들판을 같이 걷으면서 이젠 그만 가벼워지라고 말해주고 싶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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