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창식의 인생 바라보기㉕] 굳세어라 판돈씨

윤창식 칼럼니스트
  • 입력 2021.04.08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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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식-수필가- 前 초당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 문학과환경학회 회장 역임
▲윤창식
-수필가
- 前 초당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
- 문학과환경학회 회장 역임

평생 한 직장에서만 아까운 청춘을 하얗게 불태웠던 쉰일곱 소판돈씨는 희망없는 희망퇴직을 하고보니 억울도 하거니와 나머지 인생을 집에만 앉아서 얼마 되지도 않은 퇴직금을 곶감 빼먹듯이 할 수는 없어서 피시방이라도 차릴 요량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간판 상호가 중요하다던디?"

판돈씨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용한 점쟁이를 찾는 심정으로 용당나루터 길목에 폼잡고 있는 '백운 허영무 작명소'를 찾았다. 그곳은 작명이 주종은 아닌 듯 "궁합 택일 사주 관상도 봅니다"라고 뻘건 글씨가 적힌 입간판이 좀 거슬렸다.

'작명만 하는 곳이 아닌개비여? 혹 일수놀이는 안 하는가 모르겄네.' 판돈씨는 저으기 의심이 되었으나 기왕에 거기까지 왔으니 속는 셈 치고 한 번 들어가보기나 할 심산이었다.

그래도 실내는 꽤 널찍하니 제법 윤기가 흐르는 벽면에는 백운선생의 얼굴 그림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자개로 만든 직함 명판을 새삼 어루만지며 안락의자에 앉아있던 늙수그레한 허영무 선생은 자못 어색해하는 판돈씨를 안심시키려는 눈빛이 역력했다.

"거그 앉으씨요, 편하게."

"네."

"뭘 보러 오셨소?"

"이름을 하나 지었으면 하고요."

"아! 손주를 보셨는갑소?"

"손주라니요. 저는 총각이어요."

"허허 머리카락은 희끗해 갖고... 부인과 자식들이 없단 말이요?"

"예. 그냥 쭉 혼자 살었어요."

"여태 결혼도 안 하시고?"

"사겨본 여자는 있었습니다만..."

"그러시다면 무슨 이름을 지으시려고?"

"퇴직금으로다가 피시방이나 하나 차릴려고요."

"오, 피시방 이름을 지으러 오셨구만. 그렇다면 걱정을 하덜 마씨요! 내가 대박나게 해드릴 테니께."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작명값은 톡톡히 쳐드릴랍니다. 이름 하나 값은 얼마랍니까?"

"상호는 쪼깐 비싼디... 음~. 삼백만원만 내씨요."

"예상보다는 싸게 먹히네요잉!"

"자, 그럼 작업을 시작해봅시다."

"무슨 작업을..."

"손님 이름부터 까보시라고요."

"예. 저는 작업이라고 하셔서 딴 생각을 잠시 했구만요. 제 이름은 소판돈(蘇判敦)이어요. 되살아날 소蘇 쪼갤 판判에 도타울 돈敦자를 씁니다요."

"뭐라고요? 소판돈? 으허하하하하."

"제 이름이 잘못 됐을까요?"

"내가 40년 넘게 이 일을 해오요만, 그런 이름은 생전 처음이요."

"제 이름이 잘못 된 게 틀림 없구만요?"

"대체 누가 지은 이름이요?"

"저의 아버지가 오일장 우시장에서 황소를 팔고 주막골에서 잠깐 한눈을 파시다 그 돈을 몽땅 잃으셨고요, 하도 억울해서 나중에 아들놈이라도 그 돈을 다시 찾으라고 제 이름을 소판돈이라고 지었답니다요."

"아버님도 참."

"예. 아버님은 워낙 소를 사랑한 분이었어요."

"소를 사랑하신 것은 그렇다 치고. 그래서 소판돈씨는 도로 그 돈을 찾으셨나요?"

"찾기는커녕 그 동안 번 돈도 많이 까묵어부렀지라..."

"그러니께 이름을 함부로 지으면 낭패를 보고 쪽박차기 딱이어요."

"그러면 피시방보다도 제 이름부터 고쳐야 할 모양이구만요?"

"아니 이렇게 좋은 이름을 뭣하게 고쳐요."

"아까는 안좋다고 하시더니만...?"

"바로 피시방 상호를 '소판돈피시방'으로 하세요. 작명비는 명함에 적힌 계좌로 바로 부치고요잉."

소판돈씨는 작명소 문을 나서며 자기 이름이 그토록 쓸모가 있다는 사실에 감동이 몰려왔다.

"판돈이든 산돈이든 얻어걸리기만 하면 까짓것 올해는 장가간다~ 으흐흐흐흐~~~."

모처럼 힘이 넘친 소판돈씨의 웃음소리가 선창가 바닷바람을 헤치고 하얀 갈매기 날개 위로 부서지는 것이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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