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라이프㉔] 태몽 이야기

김경 기자
  • 입력 2021.04.29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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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br>​​​​​​​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싫어, 싫어. 지금 집에 안 가. 더 놀다 갈 거야. 아빠, 빨리 점퍼 벗어!

녀석은 점퍼를 입고 나서는 아들을 흘낏거리며 벌렁 대자로 누워 시위를 한다. 기세가 만만찮다. 치켜뜬 눈에, 불끈 쥔 앙증맞은 손과 발은 쉴 새 없이 거실바닥을 쿵쿵 친다. 떼쓰는 모양도 어쩌면 저리 귀여울까. 저절로 웃음이 난다. 우리 부부는 녀석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행복의 극치에 이르렀다. 녀석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노는 재미가 꽤 쏠쏠했던가 보다.

남편은 더없이 자애로운 할아버지다. 억지로 데려가지 말고 이해를 시켜야 한다며 녀석을 꼭 안고서 말문을 연다. 할아버지의 가슴팍에 볼을 댄 녀석은 조곤조곤 할아버지의 얘기에 말귀라도 트인 듯 조용하다. 하지만 뾰로통한 기색은 여전한데, 그 모습이 더 사랑스럽다. 세 돌이 지난 녀석은 제법 또록또록 의사 표현을 한다. 지난번에도 가기 싫다고 커튼 뒤에 숨어서 꼼짝도 않다가 급기야 안방으로 내달렸다. 황급히 녀석을 쫒아간 나와 녀석의 눈이 마주쳤다. 이제 엄마 아빠랑 집에 가야지? 내 말에 녀석은 그만 앙,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까지 제 마음을 몰라주니 울컥 서러움이 복받쳤던 모양이다. 어찌나 우렁차게 울어대던지 짠한 마음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고집도 세고, 성격이 너무 강하다니까요. 절대 순한 애가 아니에요.

그래, 좀 그렇긴 하다. 니들이 힘들겠다.

일단 아들 며느리의 기분을 맞춰주고서 이내 속엣말을 늘어놓는다. 너는 뭐 순둥이였을 것 같지? 우리 집 귀염둥이, 사내 녀석이 고집도 있어야지. 나는 이쁘기만 하구만. 글고 누가 낳았냐? 다 니들 닮아서 그렇지. 내가 들려준 태몽 잊지 않았지? 범상치 않은 애니까, 암말 말고 잘 키워!

기어이 산사태가 일어났다. 천지가 진동하듯 벼락과 번개가 난리법석을 치더니 거대한 산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누런 황토 물과 흙더미의 기세에 내 앞의 가로 펜스는 금세라도 휩쓸려 버릴 듯했다. 온몸이 벌벌 떨렸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피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제자리를 꼭 지켰다. 한순간 괴성이 고막을 찢었다. 저, 저게 무엇인가. 용이었다. 산사태를 뚫고 포효하며 솟구치는 한 마리의 용! 용은 눈을 흡뜨고 코를 벌름이며 용틀임을 했다. 무시무시한 그 기세에 나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숨이 턱 막혔다. 그런데 느닷없이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금세라도 하늘 저 멀리 자취를 감출 텐데, 어떡하지? 아들이 용을 꼭 봐야 하는데, 어떡해? 용성아! 용성아! 나는 발을 동동거리고 목청을 돋우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와! 용이다! 언제 어디서 달려왔던가. 아들이 내 곁에서 감격에 찬 얼굴로 입을 벌린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제 됐다, 됐어. 나는 기쁨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아들과 나란히 차분하게 용을 구경했다. 마음이 그렇게 평온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힘차게 날아오르는 용의 꼬리까지 눈에 꼭 담았다. 헌데 아들은 삼십대가 아닌 대여섯 살배기 모습이었다. 어쨌거나 우리가 펜스 위로 올라온 얼굴을 내리고 막 돌아서려는 찰나였다. 한길 건너에 담벼락이 나타나더니, 담벼락 저 끄트머리에서 뭔가가 움찔거렸다. 담벼락에 달라붙은 거대한 물고기 한 마리! 숫제 물고기에 가려 담벼락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착 착 착 착, 물고기가 일정한 박자에 맞춰 담벼락을 따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경쾌하게 움직였다. 마침내 우리들 앞을 지나치는데, 일순간 오색찬란한 빛이 쏟아졌다. 물고기의 비늘마다 별이라도 새겨진 듯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나와 아들은 시선을 맞추면서 의미 깊은 기쁨을 나누었다. 나는 행여 반짝이는 한 점 빛이라도 놓칠까 봐 눈을 깜박일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언제 눈을 감았던가. 활짝 눈이 떠졌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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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었다. 나는 대번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결단코 태몽이었다. 나도 모르게 숙연해지면서 새벽 공기를 마셨다. 조만간에 아들 며느리가 전해올 소식을 기다리며 내내 함구했다. 한 달이 더디게 지나간 어느 날, 고대하던 소식이 날아왔다. 그동안 참아내느라 목이 간질였던 꿈 이야기를 시원스레 꺼냈다. 신기하게도 태몽을 꾼 날짜와 임신 날짜가 거의 일치했다.

나처럼 완벽하게 할머니 노릇한 사람이 어디 또 있으려나? 정말이지, 난 할머니 노릇 다 했네요. 당신은 어쩌죠?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할아버지 노릇에 매진하세요!

나는 거침없이 남편에게 일성을 날렸다. 마치 세상에서 나 혼자만 태몽을 꾼 사람처럼 의기양양했다. 하기야 태몽이라면 나보다 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 면에서 일찍이 엄마 노릇도 완벽하게 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람이다.

깊은 계곡은 아니었으나 물이 유리처럼 투명하게 맑았다. 개울 주변에는 나무들이 무성했으나 햇살은 나뭇가지를 비집고 사뿐히 개울을 찾았다. 반짝이는 윤슬과 초록 이파리들이 어울린 풍경은 더없이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나는 개울가에 쪼그려 앉아 물속을 주시하며 골몰했다. 뭔가를 탐내고 있었다. 반들거리는 조약돌 사이사이로 피라미 새끼들이 요리저리 노니는데, 서너 마리의 거북이 발을 쭉 뻗고서 물갈퀴를 휘저어댔다. 거북 한 마리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갈망은 시시각각 부풀기만 했다. 무슨 방법이 있을까?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머리칼이 날렸다. 그래, 그 방법 밖에 묘책이 없어. 바짓단을 걷어 올리고 잠시 쭈볏거리다가 신발을 벗었다. 용기를 내어 한 발을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거북이 내 발가락을 물기만 하면 성공이었다. 거북을 향해 조금씩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영락없이 내 작전에 말려든 거북이 내 발가락을 목표로 다가왔다. 한순간 무섬증이 일면서 머리가 곤두섰으나 침을 삼켜가며 기다렸다. 아니 제발 발가락을 물어달라고 뒤꿈치에 더 힘을 주었다. 어느새 다가왔던가. 거북의 입이 스스럼없이 내 엄지발가락에 닿았다. 나도 모르게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발을 서서히 끌어당겼다. 당연히 발가락을 문 거북이 딸려왔다. 아, 내가 이놈을 잡았어. 이제 이 거북은 내 것이야. 두려움과 기쁨이 혼재한 상태로 눈을 뜨는 순간 알았다. 심상치 않은 꿈이었다. 온몸을 휘감는 그 황홀한 느낌이라니. 절로 ‘태몽’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태몽은 곱씹고 또 곱씹어도 지루하기는커녕 더욱 더 선명한 영상으로 내 가슴을 지배했다. 그 거북 꿈으로 태어난 녀석이 바로 내 아들이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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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워낙 잠자리에서 꿈을 달고 살아간다. 꿈을 꾸지 않은 잠자리가 드물다 보니, 별의별 꿈의 세상이 펼쳐지곤 한다. 나는 꿈의 세상을 퍽 즐긴다. 프로이드의 꿈 이야기나 베르베르의 잠 이야기가 그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도 다 이런 맥락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꿈이 아니라면 그 어디에서 무의식의 세계를 엿볼 수 있겠는가. 상상력의 지평을 넓혀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꿈꾸는 시간이 내게는 참으로 소중하다. 좀 엉뚱한 사고이긴 하지만 그만큼 나는 꿈을 좋아한다. 그런데 태몽은 달랐다. 무의식을 뛰어넘은 뭔가가 숨어 있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흐름, 기의 세계랄까.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어떤 영적인 관계, 그 존재성이 드러나는, 그야말로 신비로운 꿈의 절정판이 태몽인 것 같다.

아들과 며느리가 손자를 달래어 현관을 나선다. 승강기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승강기 안으로 들어간다. 승강기 문이 반쯤 닫히자 손자가 금세 우리 쪽으로 팔을 뻗으며 소리를 지른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타지 않은 걸 알아챈 것이다. 집에 들어와 한참이 지나도 녀석의 애달픈 목소리가 귀에 울린다. 그래, 너무 안쓰러워하지 말자. 녀석은 한 마리 날아오르는 용이요, 빛나는 물고기가 아니었던가. 태몽을 꾸지 않았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나는 씩, 웃으며 오늘도 녀석의 태몽으로 마음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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