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라이프㉕] 카네이션 변천사

김경 기자
  • 입력 2021.05.17 13:24
  • 수정 2021.05.18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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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김경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
[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엄마! 꽃 받으세요.

아들이 덥석 내 가슴에 꽃다발을 안긴다. 웬 꽃다발? 눈이 부시다. 탐스러운 하얀 수국에서 터져 나오는 백색 빛. 곁에 낀 연분홍 장미들도 탐스럽지만, 일단 빛깔에서 뒤로 밀려나고 만다. 아들이 선배 결혼식에 가기 전에 내려놓은 제 식구들을 데리러 왔다. 그러니까 행복과 사랑이 넘치는 결혼식장의 꽃이 나에게까지 온 것이다. 나는 저절로 입을 벙긋거린다.

아유, 넘 예쁘네. 나보다는 승미한테 줘야지?

아니에요, 어머님. 전 괜찮아요.

며느리가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치는데, 아들이 걱정 말라고 한다. 꽃다발을 두 개나 챙겼다니, 참 잽싸기도 하다.

이 꽃다발로 충분하니, 낼모레 어버이날 꽃은 생략해도 된다. 알았지?

무슨 말씀을요, 이건 카네이션이 아니잖아요.

카네이션이 뭐 별거냐? 됐다 됐어.

아들의 차가 저만치 사라지는 걸 보고서 집으로 들어온다. 거실 한쪽에 놓인 도자기 꽃병에 물을 채우고 모양을 내본다. 흰 바탕에 연분홍 미풍이 살짝 스쳐간 장미의 은은함과 희다 못해 푸른 느낌마저 감도는 수국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금세 집 안에는 부드럽고 싱그러운 생기가 돈다. 때맞춰 FM에서 모차르트의 선율까지 흘러나온다. 애오라지 나를 위한 일요일 오후,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앉는다. 보면 볼수록 새삼 꽃이 지닌 속성에 감복한다. 저처럼 사람의 마음을 위무해주는 게 또 어디 있을까. 꽃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산과 들로…. 이런저런 자연의 상념에 기분 좋게 빠져들다가 다시 꽃들에게로 돌아온다. 좀 전에 꽃을 주고 간 아들의 말이 귓가에 맴돌면서 절로 미소가 번져난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아들의 역사가 서린 카네이션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 꽃들은 영원히 풍성한 함박웃음꽃 선물이다. 언젠가 그 함박웃음꽃 얘기를 수필 잡지에 발표한 적이 있다. <카네이션 변천사>라는 제목의 글이다.

활짝 핀 카네이션이 거실을 환하게 밝히는 아침이다.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어젖힌다. 나뭇잎 사이로 비끼는 햇살이 간밤의 찬 기운을 털어내고 있다. 전화벨이 울린다. 어버이날이라고 아들 녀석이 일어나자마자 한 문안 인사다.

엊그제 같이 모여 밥도 먹고 선물도 챙겨주고선…. 암튼 고맙다, 고마워.

엄마, 근데… 화분이 좀 작죠?

작다니? 그날 피어있던 다섯 송이에다 밤새 두 송이가 더 벌어졌어. 아주 온 집안이 꽃밭이다, 꽃밭!

나는 여기까지 말하다 말고 그만 웃음이 치밀어 오른다. 불현듯 뭔가 짚이는 데가 있어서다. 아마도 꽃집에 있던 화분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을 내가 차지한 것 같은 불길한(?) 예감…. 이내 내 예감이 적중한 것 같은 확신에 더욱 더 즐거운 노래가 뒤따른다. 나는 거침없이 녀석의 마음자리를 폭로한다.

어, 어떻게 아셨지? 실은요, 크고 화려한 꽃바구니들이 많았지만요, 제가 실속형으로 헤헤. 그래도 자잘한 꽃송이가 많은 게 예쁘죠?

기어코 나는 웃음보가 터져 더는 말을 잇지 못한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기쁨표 아들로서 손색이 없다. 제아무리 짠돌이 짓을 해도 밉기는커녕 더없이 사랑스럽고 유쾌한 녀석이다. 녀석도 덩달아 웃긴 하는데, 속내를 들켰다는 아쉬움인지 그 웃음소리가 영 시원찮다. 하지만 내 웃음이 식을 줄을 모르는 바람에 녀석의 웃음소리도 결국 터지고 만다. 역시 자식은 영원한 귀염이요, 기쁨조다. 지난해, 스물여덟에 예쁜 짝을 맞아 어엿한 가장이 되었는데도 하는 짓은 여전하다. 그날은 무심코 카네이션 화분을 받았는데, 화분이 작니 어쩌니 하는 통에 지난 과거사가 떠오른다. 그래, 오늘날 내가 깜찍한 화분이나마 안을 수 있었던 영광은 순전히 며느리 덕이렷다.

까마득한 날의 일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녀석이 의식을 치른답시고 조막만 한 손으로 카네이션을 만들기 시작했다. 해를 거듭하면서 차츰차츰 더 세련된 형상으로 꽃이 진화하나 싶었는데, 그해의 꽃은 완전히 새로운 종(種)이었다. 양손으로 기도하듯 움켜쥔 카네이션은 향기와 싱싱함의 상징인 생화였다.

엄마, 진짜 꽃이에요.

녀석의 눈이 샛별처럼 반짝거렸다. 생화의 가치를 벌써 음미하는 건가. 녀석이 부쩍 성숙한 듯한 느낌에 가슴이 설렜다.

녀석은 중학생이 되고 5월 8일은 또 다시 돌아왔다. 녀석이 가방을 메고 눈 꼬리를 살랑거리며 현관에 들어섰다. ‘엄마 꽃’이라고 경쾌하게 외치며 카네이션 한 송이를 내밀었다.

같은 부모님이시니 한 송이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만족하죠?

나는 갑자기 멍해져서 녀석과 한 송이 카네이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난해까지 내내 두 송이였는데…. 내 왼쪽 가슴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화사했지만, 남편의 텅 빈 가슴은 유난히 더 넓고 허전해 보였다. 남편은 허허거렸으나 내 가슴은 자꾸 오그라들었다. 인색한 놈! 녀석은 평소에도 선물을 준비해야 할 특별한 날이 다가오면 입술을 쫑긋거리곤 했다. 외동이라고 희희낙락하던 모습은 오간 데 없이, 누나나 형이 있는 친구가 부럽다고 투덜거렸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나 또한 그만한 나이에 늘 두 언니들에 눈치껏 묻어가기 선수였으니까. 아무튼 녀석은 잔머리 굴리는 게 장난이 아니었다.

녀석이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훌쩍 큰 키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물고서 안방 벽에 걸린 달력을 가리고 섰다. 어김없이 카네이션은 한 송이였는데, 얼핏 보기에도 낌새가 수상했다. 꽃잎이 부드럽게 나풀거리지도 않고 색깔은 터질 듯 지나치게 붉었다. 조화였다. 물론 예전의 조화와는 차원이 달랐다. 진짜보다 더 싱싱해 이슬방울까지 방울방울 머금었다.

1년 보증! 여기 달력에 꽂아 놓습니다. 생화는 금방 시들어 제값을 못한다니까요.

향기 한 점 없는 뻣뻣한 조화 한 송이가 5월의 달력에 붙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녀석의 말이 맞긴 맞았다. 실제로 1년 동안 이슬 머금은 카네이션은 충실히 안방에서 제값을 했다. 여하튼 꽃값도 꽃값이지만, 나는 그때에도 유머 섞인 녀석의 언변에 홀딱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은근슬쩍 내 잔머리가 가동되고 있었다. 녀석의 잔머리 굴리기는 이제 끝났다고, 카네이션에 관한 녀석의 행보는 여기까지라는 확신이 서면서 은근히 통쾌했다. 녀석의 진정한 내심과는 상반된 판단일지라도 내 생각은 그쯤에서 멈췄다. 그런데 오늘, 뜻밖의 화분으로 또 한바탕 웃게 될 줄이야. 조만간 녀석과 얼굴을 마주하면 이 깊고 깊은 역사를 가감 없이 쫙 한번 펼쳐보고 싶다. 덧붙여 정말 녀석에게 복기시켜 주고 싶은 장면이 있다.

기억나니? 네가 고등학생 다닐 때, 전철역사에서 마주친 가여운 할머니. 금세 호주머니를 몽땅 털었잖아? 거금 오천 원! 돈도 돈이지만, 때 묻은 할머니의 손에 스스럼없이 네 손을 얹는 게 정말 신기했지. 별나게 깔끔을 떤다고 늘 내 눈총을 받았잖아?

자식은 그 존재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자식은 무조건 믿고 사랑만 하면 된다는 게 남편의 지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수없이 녀석과 부딪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제대로 중재를 못해 안타까웠다. 하지만 녀석이 아버지가 걸어왔던 인생길을 좇아가는 것을 보면서 깨달았다. 보이는 사랑과 믿음이 아닌, 보이지 않는 사랑과 믿음을 어느새 녀석이 알아챘다는 것을.

벌써 7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렇지만 다시 읽어봐도 그때나 지금이나 녀석에 대한 내 마음은 한결같다. 녀석은 많이 변했지 싶다. 따뜻하고 유머가 넘치는 기쁨표 아들이긴 여전하지만, 확실히 짠돌이는 아니다. 아니 가정을 꾸리고 자식까지 낳다 보니 훨씬 더 짠돌이가 되었나? 만약 그렇다면, 이제 곧 저도 카네이션을 받을 테니 크게 깨달은 바가 있을 터다.

화병에 꽂힌 꽃들이 내 말에 앞서 합창을 한다.

아들아! 이제 더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제때에 결혼하고 금쪽같은 자식도 낳아 알콩달콩 살아가는 네 삶이 바로 최고의 선물이다. 조화면 어떻고 한 송이면 어때? 작은 화분은 정말 감지덕지였다. 카네이션 변천사는 여기서 접자.

무슨 말씀을요. 참 엄마는 뭘 저렇게 모르실까. 요즘은 카네이션이 얼마나 각양각색으로 세련됐는지 제가 알아봐준다니까요. 개봉박두!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그래? 맞다, 맞아. 나는 웃음을 만발하며 아들의 말에 또 홀딱 넘어가 자족하고 만다. 아무래도 카네이션 변천사는 끝없이 이어지지 싶다. 기쁨표 아들에 며느리와 손자까지 가세했으니 훅 밀려날 수밖에. 도무지 이길 재간이 없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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