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훈의 지구를 걷다 60] 천년 붓다왕국 미얀마13_미얀마의 삼국시대

윤재훈 기자
  • 입력 2021.07.15 12:47
  • 수정 2021.08.10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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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삼국시대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리어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 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 ‘백마강’허민

 

(천불천탑 바간 왕국. 촬영 윤재훈)
(미얀마 천불천탑 바간 왕국. 촬영=윤재훈)

[이모작뉴스 윤재훈 기자] 세계의 역사는 강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스러졌다. 어느 국가든 그 강을 중심으로 문명의 요람을 꽃피웠기 때문이다. 강변을 따라 펼쳐지는 푸른 곡창지대는 국민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문명사에서도 그 흔적은 뚜렷이 나타난다. 미얀마의 역사도 ‘이라와디(Irrawaddy, 에야와디Ayeyarwady)’ 강변을 누가 차지하느냐가 관건이었다.

히말라야산맥 남단에서 발원된 2,170km의 물굽이는, 항상 미얀마의 역사 중심에 있었다. 느마이 강과 말리 강이 카친주에서 합류해 양곤 방향으로 머리를 틀며 국토의 중심부를 관통하다, 안다만해로 빠져나간다.

(미얀마 국가 고문, 노벨 평화상 수상자, 아웅산 수치 여사. 촬영=윤재훈 기자)

미얀마 역사 역시 이 강을 놓고 벌인 투쟁의 기록이다 이 강을 차지했던 민족이 미얀마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 강이 왜 그토록 중요했는지는, 지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평야 지대는 이 강가를 중심으로 조성되어 있고, 그 면적은 무려 국토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40만km가 넘는 곡창지대이다.

미얀마의 옛 이름은 <버마>였다. ‘버마족’의 나라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러 종족이 어울려 사는 이 나라에서 어폐가 있는 듯도 하다. 그래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아웅산 수치’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옛 이름으로 돌아가는데, 찬성하고 있다고 한다. 수치 국가 고문은 정권을 잡은 후에 ‘로힝야족 학살 사건’에 침묵으로 일관하여, 세계인들의 의심을 사고 있으며, 노벨 평화상도 반납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는 그 민족의 구성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미얀마는 고대부터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였다. 그중에는 70%가 넘는 버마족과 샨족, 몬족, 라카인족, 꺼인족, 까야족, 까친족, 친족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135여 종족이 있다. 그 민족들은 때로는 싸우며 때로는 화해하고 어울렁 더울렁 얽혀 사이좋게(?) 살아왔다.

그러나 이번에 아웅산 수치가 정권을 잡고 또 선거에 참패하자, 군부는 자신들이 소유한 국가 자산과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 권력을 이어가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 그렇지만 미얀마 땅에는 14개의 주가 있고, 무려 그 반인 7개 주를 소수민족이 차지하며 자체 군대까지 보유하고 있어, 무력충돌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스님은 가족이 있나 보다. 촬영 윤재훈)
(스님은 가족이 있나 보다. 촬영=윤재훈 기자)

미얀마의 역사에서 가장 큰 세력은 ‘버마족’이였지만, 항상 그들이 이 땅에 주인공은 아니었으며, 다음으로는 ‘샨족’과 ‘몬족’을 들 수 있다. 이 세 종족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처럼 지역 패권을 두고, 오랜 세월 대립을 해오고 있다.

이라와디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버마족과 샨족이 패권을 놓고 다투었으며, 남쪽은 전통적으로 몬족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러나 점차 버마족이 남진하여 남쪽 지역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최초의 버마족 왕조이자 통일 왕조는 영어로 ‘바간(Bagan)’, 미얀마어로 ‘버강’이라 부른다. 그들은 이라와디 강을 천연의 요새로 삼아 성을 쌓고 불교 왕국을 꽃피웠다. 지금도 남아있는 성벽의 잔해들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1044년 ‘아노라타(아노여타Anawy-ahta)’ 왕과 그 후계자 짠찌타 왕에 의해 세워진 왕국은, 11세기부터 13세기 4백만 파고다의 도시로 알려지며, 이라와디 강가에 사는 타 부족을 모두 복속시킨 뒤 첫 번째로 개국한 통일왕조이다.

바간에 들어서면 사방이 탑의 숲인데, 그 모양은 종족별로 조금씩 다르다. <바간양식 , 만달레이 양식 , 몬 양식 , 샨양식 , 라카인 양식>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것은 각 종족이 불교에 끼친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노라타 왕은 남쪽에 있는 몬족의 수도인 타톤을 공략하여 500여 명의 몬족 승려와 함께, 팔리 경전 등 상좌부불교와 문화를 받아들여 불교문명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그들의 정령신앙인 ‘낫’ 대신에 불교를 통해 대통합을 꾀했다. 그러나 지금도 사원에는 낫 신앙이 같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간은 버마족의 정신적 고향이자 그들이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버마족의 두 번째 통일 왕조는 ‘따웅우(Taungoo) 왕조’이다. 1510년 이 왕조는 미얀마 대부분을 통일한다. 특히 ‘버잉나웅(Bayinaung)’ 왕은 샨족의 ‘잉와 왕조’를 멸망시키고, 인도의 마니뿌르, 중국의 윈난성, 그리고 태국까지 정복의 길을 나섰다.

그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정복지의 사람에게 불교를 믿도록 했으며, 수많은 불탑을 보수하고 불교 경전을 보급하는 데 노력하였다. 멀리 실론(스리랑카)까지 불교를 전파하였으며, 북쪽의 샨족이 사는 산간벽지까지 불교 전법사를 파견하였다.

세 번째 통일 왕조는 1753년 ‘얼라웅퍼야(Alaungphaya)’ 왕이 세운 ‘꼰바웅(Konbaung) 왕조’이다. 왕은 팽창정책으로 태국의 아유타야까지 침략했으며, 5대 왕 ‘보도퍼야(Bodawpaya)’는 동쪽의 테나세림에서 서쪽의 아라칸(오늘 날 라카인 주)까지 미얀마 최대의 국토을 만들었다.

(마하무니 금불상, 매일 새벽 4시, 세안식이 유명하다. 촬영=윤재훈 기자)

9대 ‘민돈왕’은 수도를 잉와에서 만달레이로 옮기면서, 중심부를 흐르는 이라와디 강의 항로를 정비하고 교통체계의 확대하며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또한 영국의 위협을 불법으로 맞서고자 우리나라의 팔만대장경처럼, 5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불사결집을 진행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 여파로 아들 ‘시보’ 왕은 1824년과 1852년의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견뎌내다, 1885년 포로가 되면서 133년 만에 멸망하게 된다. 이어 1886년 1월 1일을 기해 영국령으로 전락하고, 영국령 인도의 한 주로 편입되는 불운을 맞는다.

이어 영국의 식민정책은 ‘분할 통치’ 노선을 채택하여 다수 종족인 버마족들이 거주하는 중앙 평원지역은 직접 통치하고, 소수 종족은 그들 고유의 정치와 사회 제도를 인정해주는 간접 지배 방식을 채택한다.

또한 기독교 국가인 영국은 불교도이며 지배 종족인 버마족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 산간지역 소수 종족의 기독교 개종을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그 결과 불교 영향력이 적고 토속 신앙에 의한 문맹의 사람들은 많이 개종 되었다.

이것은 1948년 미얀마의 독립 과정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어, ‘고질적인 지역 분리, 종족과 종교의 갈등’ 문제를 야기하며, 지금 진행되고 있는 군부 쿠데타에도 일정 부분 책임을 미쳤다.

(다들 어디를 가시나이까?. 촬영 윤재훈)
(다들 어디를 가시나이까?. 촬영=윤재훈 기자)

‘샨족’이 거주하는 ‘샨’ 주(Shan State)는 현재 미얀마에서 그 면적이 가장 크다. 이곳에는 대략 800만 정도의 소수민족이 사는데, 그중 약 470만이 샨족이다. 그들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평야, 논, 농사’이다. 북부의 전통적인 강자로서 농경과 정착 생활를 통하여, ‘카친, 라후, 와, 아카’ 등 북부 소수 종족들을 지배하여 왔다.

이들은 비슷한 시기 인레호수가 있는 지금의 샨주에서, ‘잉와(Inwa, 아바) 왕국’을 세워 번영했다. 아마라푸라의 남쪽에 있었으며 옛날에는 ‘라트나푸라’로 팔리어로는 ‘팔리의 보석’이라는 뜻이었다. 잉와는 버마어로 ‘호수의 입구’라는 뜻이다. ‘9개 호수’를 뜻하는 ‘인나와’에서 유래되었다는 말도 있다.

(소수민족들의 고단한 삶터. 촬영 윤재훈)
(소수민족들의 고단한 삶터. 촬영=윤재훈 기자)

버마 왕조는 영국 식민지시대를 지나 1948년 독립되었으며, 그 후에도 지방 봉건 소왕국 형태의 수많은 토호 세력들을 이루며 살아왔다. 이들을 ‘샤오파(Saohpa)’라 불렀는데, ‘하늘의 군주’라는 뜻이다. 현재 켕퉁(Kengtung)에 있는 Kengtung 호텔은 원래 샨 궁전으로 1903년 영국 식민지시대 샨 왕자가 세운 것을, 1991년 중국 자본이 들어와 개축했다.

그럼 샨족은 어떻게 13세기에 이 지역에서 득세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버마족 최초 왕조인 바간 왕조가 몽골의 쿠빌라이 칸에 의해 1287년 멸망했기 때문이다. 이때 몽골군들이 중국 남부 운남성 일대을 점령하자, 시솽반나(다이족 자치주)에 살던 타이(Tai)족의 한 갈래인 샨족이 남하하여 미얀마로 유입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경을 접한 타일랜드도 타이족의 나라이니 한 갈래인 셈이다. 이후 아유타야 왕국과 쑤코타이 왕국의 불교 유적은 이들의 침략을 받고 초토화가 된다. 같은 상좌부 불교인데도, 국경이 달라지면 그들의 믿음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아편 왕 쿤사khun sa. 촬영 윤재훈)
(아편 왕 쿤사(khun sa). 촬영=윤재훈 기자)

 

샨족은 지리적 위치상 중국과 미얀마, 태국 사이의 중간에 있어 그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현재도 마찬가지다. 미얀마에서 샨족의 팽창은 특히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 절정기를 맞이하는데, 잉와 왕국은 약 3세기 동안 전성기를 이루며 이 지역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또한 18세기 중후반과 19세기에는 영국의 식민분할 통치로 버마족보다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샨족 등 무장 반군단체들은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엄청난 양귀비를 재배하여, 1970년부터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이 ‘쿤사’에 의해, 전 세계 아편의 최대 공급지로 악명을 떨쳤다. 그는 본명이 ‘장치푸(張奇夫)’로, 중국계 아버지와 샨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래 미얀마 정부군 장교로 샨족 반군토벌 임무를 수행하다가 1970년부터 이 일대에 양귀비 재배를 주도하였으며, 그 당시 세계 마약의 60%를 공급하는 최대의 마약상이 되었다.

주로 태국, 라오스, 미얀마 국경에 거주하는 카친족, 라후족 등 소수민족 흡수하여, 골든트라이앵글 일대를 마약 밀매의 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태국과 미얀마 국경을 따라 메콩강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강을 따라 삼국의 국경이 펼쳐진다. 미얀마 북부에서 산을 따라 시작된 삼각형 루트는 이곳까지 펼쳐지면서, 마침내 삼국의 강이 만나는 역사적인 장소에서 세계 마약 거래의 꽃을 피웠다.

치앙샌의 강 언덕에 서니 백제의 꿈에 서린 허민 씨의 ‘백마강’이라도 한 소절 나올 듯하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에 종소리가 들리어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 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백마강’허민(허한태, 1929년 출)

 

(왼쪽이 ‘루악강’, 오른쪽이 ‘메콩강’. 삼국의 물이 합하는 골든트라이앵글. 촬영 윤재훈)
(왼쪽이 ‘루악강’, 오른쪽이 ‘메콩강’. 삼국의 물이 합하는 골든트라이앵글. 촬영 윤재훈)

 

미얀마 오지와 국경을 가르며 달려온 루악(Ruak) 강은 마침내 이곳에서 동남아의 거대한 물줄기 메콩강을 만나는데, 삼각주 건너편 모서리의 자욱한 수풀 속에 허름한 건물이 한 채 있다. 카지노다. 그 위로 거대한 메콩강이 흐르며 그 건너편은 바로 라오스다. 그곳은 미얀마와 다르게 화려한 건물 한 채와 양쪽으로 두 동의 건물이 더 있는데, 여기는 라오스 카지노라고 한다. 두 나라의 국력에 비해서 건물이 너무 요란하다.

절벽 아래로는 마치 무너진 백제의 꿈처럼 조그만 보트들이 오고 가는데, 모두 라오스 쪽으로 간다. 타일랜드의 부자와 권력자들이 매일 카지노를 즐기고 온다고 한다. 여기서 조그만 더 내려가면 라오스로 건너갈 수 있는 ‘훼이싸이’ 국경이 나온다. 메콩강을 따라 펼쳐진 소도시들에는 그냥 강변에 앉아 한가롭게 쉬었다 가는, 장기 배낭여행자들이 있다. 일부 서양의 여행자들은 흡인하기도 한다고 한다. 문득 강가에 부는 바람에서 그 기운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치앙샌에는 아편 박물관도 있는데, 그곳에 쿤사와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의 사진이 있으며, 누워서 아편을 피는 상도 있다.

1993년 12월 쿤사는 태국 국경에 있는 샨주의 독립을 선언하고, 호몽을 수도로 선포하며 그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계속되는 미얀마 정부군의 대규모 소탕 작전에 1996년 미얀마 정부군에 투항하며, 1만 명에 달하던 반군들은 자진 해산하고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당시 쿤사는 투항의 조건으로 핵심 측근들의 안전 보장과 루비와 금 광산 및 호텔 등 막대한 수익 사업권을 보장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양곤에서 미얀마 정부의 보호를 받으며 살다, 2007년 10월 26일, 74세에 양곤에서 사망했다.

그 후 타일랜드 세계 최장기 군주인 ‘푸미폰 아둔야뎃’ 왕은 치앙마이 북부 일대의 가난한 소수민족을 불쌍히 여겨, 이 일대 마약 밭을 엎고 녹차와 커피를 심어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지원했다.

(사라진 영화, 바고 모에이(뱀) 파야snake paya. 촬영 윤재훈)
(모에이 파야(snake paya). 촬영=윤재훈 기자)

또 하나의 종족은 ‘몬(Mon) 족’인데, 그들은 양곤을 중심으로 하는 남부지역의 패자였다. 양곤에서 북동쪽으로 80km 떨어져 있는 바고 구의 주도인 ‘바고(버고, 버마어로 페구)’에 그들의 왕국을 세웠었는데, 현재 인구는 22만여 정도이다.

바고의 대표적인 사원 중의 하나인 ‘모에이 파야(snake paya)’에 가면, 스님 옆에 커다란 비단 구렁이가 있다. 미얀마어로 ‘모에이’는 ‘뱀’이라는 뜻이며, 그들의 전통 신앙인 ‘낫’과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현지인들은 관광객들이 뱀을 보러 오는 것을 잘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뱀은 너무 흔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구렁이가 많은 재물을 가져다주니, 그들에게는 보물이 틀림없다.

‘바고 왕국’은 1056년 바간 왕국에서 온 버마인에 의해 지배를 받았으나, 1287년 몽골족에 의해 바간이 무너지자 독립하였다.

‘라자디라(1383~1421) 왕 시절에는 북쪽 샨족의 나라, ’잉와 왕국‘과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 후 평화를 사랑하는 여왕 ’바 타우(1453~72)‘ 시절에는, 승려인 담마제디(1472~92)를 후계자로 해 긴 싸움의 종지부를 찍었다. 담마제디의 통치하에서 바고는 상업과 상좌부 불교 중심지가 되었다.

1539년 이 지역은 다시 버마의 따웅우 왕조의 떠빈슈웨티 왕에 의해 병합되고 말았다. 이 왕조는 1539년부터 1599년까지 1613년부터 1634년간 바고를 왕도로 해, 반복되는 시암(타일랜드)의 공격을 막아내는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또한 주요한 항구로서 유럽인들이 방문하는 커다란 도시였다.

1634년 버마족은 수도를 아바로 다시 옮겨갔다. 1740년 몬족은 반란을 일으켜 잠시 동안 독립한 듯했지만, 1757년 버마 왕 얼라웅퍼야에 의해 도시는 약탈되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후 이 도시의 번영은 다시 오지 않고 있다.

(거대한 와불은 요즘 편안할까? 촬영 윤재훈)
(거대한 와불은, 요즘 편안할까? 촬영 윤재훈)

인근에 가면 커다란 와불이 있다. 편안한 붓다의 상호와, 발바닥에는 만다라가 그려져 있지만 요즘 붓다의 마음은 편안하지 않을 듯하다. 매일 발 밑에서 그들의 백성들이 살육을 당하고 있으니, 이 난국을 어이할거나?

왕국의 후손들은 고요하게 누워있는 와불을 보면서, 언젠가 바고의 영화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까, 기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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