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앙코르라이프㉖] 내 사랑 고구마순

김경 기자
  • 입력 2021.08.21 15:34
  • 수정 2021.09.10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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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단편소설집 [얼음벌레][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김경
1997년 [신세대문학] 이문구 선생 추천
2000년 [월간문학] 신인상 수상
2012년 제37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17년 제13회 만우박영준문학상 수상
단편소설집 [얼음벌레]
[다시 그 자리] (세종우수도서)
중편소설집 [게임, 그림자 사랑]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장편소설 [페르소나의 유혹]

한여름의 새벽은 해가 중천에라도 오른 듯 훤하다. 오늘 하루도 얼마나 더 열섬 속에서 허덕여야 하는가. 어젯밤은 열대야에 지구촌의 가슴 아픈 뉴스들까지 쏟아져 잠을 설쳤다. 아프카니스탄과 아이티의 참상. 가슴이 답답해 서성이는데 뜻밖의 초록이 눈을 간질인다. 유리 꽃병에서 피어나는 싱싱한 이파리들. 고구마순이다. 고구마순이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풍성하게 자랐다. 고구마 두 개가 피워 올린 싱그러운 초록 세상이다. 할아버지 수염 같은 하얀 잔뿌리들은 부지런히 단물을 빨아올리느라 여념이 없다. 그렇다. 더위는 더위이고, 지금은 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의 계절이 아니던가. 내 성향도 꽃보다는 초록 쪽이다. 더군다나 고구마순의 초록은 내게 예사로운 초록이 아니다. 새삼 추억의 힘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여름이 시작되고 신록이 짙어가는 6월 20일, 16년 전의 그날이 엊그제처럼 선명하다. 논산 신병훈련소 입소 시간은 오후 1시였다. 아침 일찍부터 아들 친구 두 녀석이 들이닥쳤다. 그동안 영 마음이 뒤숭숭했는데, 녀석들의 해맑은 얼굴을 보니 이상하게 마음이 진정되었다. 남편은 운전석, 나는 조수석, 세 녀석은 뒤에 자리를 잡고 출발했다. 장거리 소풍 길에라도 오른 듯 금세 뒷좌석은 깔깔대는 웃음판이 벌어졌다. 앞좌석은 정반대로 적요감만 감돌았다. 문득 내 머릿속에서 갖가지 사념들이 맴돌았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때완 천지차이라니까요. 식사도 뷔페로 나온대요.

입대를 앞둔 아들이 되레 나를 위로하려 들었다. 우리 모자는 워낙 낙천적인 데가 있어서 그리 유난을 떨지는 않았다. 그런데 하필 입대 전날 연천 최전방 소초(GP)에서 끔찍한 총기 난사 사고가 일어났다. 국방의 의무에 헌신하던 꿈 많은 젊은이 8명이 죽고 4명이 다쳤다. 유가족들의 오열과 절규, 분노가 온통 매스컴을 채웠다.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애써 견뎌온 불안감이 속절없이 요동을 쳤다. 일순간 당황하던 녀석의 표정이 자꾸 가슴을 짓눌렀다.

논산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입영 시간도 점점 더 가까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먼저 식당을 찾았다. 이른 점심인데도 불구하고 한창 시절의 세 녀석들은 잽싸게 수저를 놀렸다. 재잘재잘 수다를 섞어 땀을 흘려가며 고기를 굽고, 밥과 반찬 그릇들을 비워냈다.

넉넉한 시간을 두고 훈련소로 향했으나 시간에 쫓기는 뜻밖의 사태가 발생했다. 훈련소로 향하는 차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도로의 차들은 모두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어갔다. 아들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안절부절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이러다간 완전 늦겠어요. 그냥 내려서 가는 게 빠를 것 같아요.

야, 저 차들도 다 똑같아. 네가 늦는다면 쟤들도 다 늦을 테니 그냥 앉아 있어.

고지식한 녀석의 말을 나는 여지없이 퉁겼고, 친구들도 말을 보탰다.

참아, 참아. 어머니 말씀 들어. 다들 우리처럼 가잖아?

스톱! 스톱!

아들은 기어이 차 밖으로 탈출해 냅다 달리더니, 금세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논산 훈련소 연병장에 흙먼지가 회오리바람처럼 일어났다. 흙바람이 자옥한 연병장을 한 바퀴 돌아서 신병들이 부대 시설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손수건을 아예 눈에 붙이고 있던 옆의 어머니가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연이어 여기저기서 코를 훌쩍거리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흘낏 남편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굳어있었다. 마침 아들 녀석이 저만치 모습을 드러냈다. 막 우리 앞을 지나치면서 두리번거리는데 울컥 목이 메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친구들이 고래고함으로 아들을 불러대도 아들은 결국 우리를 찾지 못하고 멀어져갔다. 아들과 눈길을 마주치지 못한 게 너무 아쉽고 서운했다. 돌아서는 발길이 한없이 무거웠다. 묵묵히 걷던 남편이 중얼거렸다. 취침 시간을 잘 지킬까, 적당히 융통성도 좀 발휘하고, 자존심도 최소한만 지키고 해야 하는데 말이야. 나는 남편을 안심시키려고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말을 쫑알댔다. 군대 생활도 안 해본 당신이 그 실상을 알기나 해? 남편이 불퉁스럽게 내뱉었다. 나는 남편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의 행군 대열이 들어간 건물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였다. 한 달이 지난 즈음에야 훈련소 조교의 전화를 받았다. 그처럼 반갑고 고마운 전화가 어디 또 있으려나. 그뿐인가. 며칠 뒤에는 아들의 씩씩한 목소리도 들었다. 헌병대와 훈련조교를 제안 받았지만 거절하고 운전병이 될 거라고 귀띔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가평수송교육연대로 이동했다. 운전 면허증은 있으나 털털거리는 군대 트럭을 운전한다고 생각하니 조바심이 났다. 허나 역시 아들은 내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훈련소 때처럼 수송대에서도 반장을 맡아 잘 적응해 나갔다. 자대 배치를 앞둔 시점에 우리 부부는 실크로드 여행길에 올랐다. 아들은 아무 걱정 말라며 너스레를 떨고, 나는 배치 받으면 이모에게 전화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언니, 너무한 거 아냐? 애가 포천까지 갔더라구. 이모, 여긴 9월부터 아주 춥대요. 겨울만 되면 눈이 엄청 쌓여 세상이 완전 하얗대요. 이러더라니깐? 내가 다 눈물이 났단 말이야.

돈황석굴에 드나들 때였다. 동생이 전화 속에서 아들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나는 일단 안도했다. 무사히 자대배치를 받았다는 게 그저 대견할 뿐이었다. 그날 수첩에 법구경의 한 구절을 써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무정한 엄마라는 질타를 모면하기 위한 한낱 핑계의 방편이었으리라.

유자유재(有子有財) 자식이니 재물이니 믿어

우유급급(愚惟汲汲) 어리석은 이는 분주하게 쫓아 고뇌하지만

아차비아(我且非我) 내 자신 또한 내 것이 아니거늘

하우자재(何憂子財) 어찌 자식과 재물에 집착하여 근심하는가.

아들이 첫 휴가를 나왔다. 반듯한 군복 차림에 반들거리는 군화를 신은 대대장 운전병 아들의 낯선 모습. 구리빛 얼굴도 그렇지만, 어찌나 깡말랐는지 이마에 주름조차 지워져 있었다. 현관에서 거수경례를 붙인 아들은 거실로 올라서자마자 다짜고짜 나를 앉히고선 다시 절을 했다. 온몸으로 하는 큰절이었다. 얼떨결에 큰절을 받고서야 아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당당하고 환한 표정에 남자다운 기개가 넘쳤다. 웃음소리도 유쾌하다 못해 마치 무슨 전투에라도 뛰어들었다가 돌아온 전사 같았으나 분명 아들의 본래 모습이었다.

초록을 떠나보낸 세상은 싸늘한 추위로 뒤덮였다. 거센 눈발이 휘날리고 매서운 칼바람 소리가 유난히 귀를 때렸다. 허둥지둥 지나가는 일상에서도 오로지 ‘군대’라는 말에는 촉수를 곤두세웠다. 언제 어디서나 군인들만 눈에 띄면 으레 조바심이 일었다.

어느 날이었다. 주방 쪽 베란다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듯했다. 한쪽에 놓아둔 고구마에서 앙증맞은 싹이 움트고 있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한동안 나 몰라라 했던 수반을 끄집어내어 물을 채우고 고구마 두 개를 넣었다. 괜히 가슴이 설렜다. 행운의 선물처럼 여겨지는 고구마의 싹을 잘 키워보고 싶었다. 매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수반으로 찾아가 고구마순에 눈을 맞추고 하루를 열었다. 뜻밖에도 고구마순이 날이면 날마다 싱싱한 초록 이파리를 달면서 무럭무럭 줄기를 뻗어갔다. 싹이 난, 또 하나의 고구마를 찾아내어 수반의 새 식구로 합류시켰다. 풋풋한 초록 이파리를 보면서 차츰차츰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야릇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나만의 주술을 외고 있었다. 그 어느 화초와도 비교할 수 없는 싱그러운 초록에서 아들의 기운을 느낀 것이었다. 나는 아들을 대하듯 고구마 줄기의 성장에 매달렸다. 아들을 보듯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고구마 줄기는 유려한 곡선을 그려가며 튼실하고 아름답게 무성한 초록 숲을 이루어갔다. 아들이 제대할 때까지 한 치의 쉼 없이 초록 이파리들이 찰랑거렸다. 그것들은 나의 신념이었다. 고구마 몸체가 껍질만 남기고 녹아내리면 다시 새 고구마의 싹을 틔웠다. 그 당시에 처음 알았다. 고구마 이파리가 하트 모양이라는 것도.

아들은 제 의무를 다하고 득의양양 제대를 맞았다. 물론 나는 그 기쁨의 순간을 고구마의 초록과 함께 맞았다. 그러고 나서도 한동안 고구마 줄기는 거실을 장식했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사랑스러운 초록 이파리들과 눈을 맞추며 무언의 기도를 한다. 아스라이 멀어져간 그날 그 시간들을 복기하면서 새로운 오늘을 맞는다. 그때는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으로 두 손을 모았다면, 지금은 내가 아닌 타인에게로 시선을 돌려본다. 최대의 위기에 빠진 아프카니스탄 난민들과 대지진 피해자인 아이티 국민들에게 하루 빨리 평화가 깃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유리 꽃병을 두 손으로 받들고서 베란다로 나간다. 물갈이를 한 초록 이파리에 이슬처럼 영롱한 물방울이 맺힌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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